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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ee Aug 16. 2017

지키지도 못할 나와의 약속과 싸우다

초고를 만드는 과정


책에 넣을 원고를 워드 파일로 정리해서 보내달라는 메일이 왔다.
기한은 봄까지.




해가 지면 문을 닫는 미술관 자작나무숲


오후 6시, 7시가 아니라, '일몰 시에 문을 닫는다’는 수목원이 있다. 정말 근사한 안내라고 생각했다. 나의 원고 마감도 근사하다. ‘봄’이라니. 그런데 봄이 오면일까? 여름이 시작되기까지 일까? 봄의 기준은 온도 몇 도 정도일까?


출판사에 보낸 총 50여 편의 여행기 중 국내여행을 제외하고 41편의 원고를 다시 정리해야 했다. 한꺼번에 하면 지쳐버릴 것 같아서. 또 ‘전체를 한 번에 보내주시면 수정이 힘들어지므로 나눠서 보내주세요’라고 들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총 5차에 거쳐 원고 묶음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여섯 편에서 열 편 정도의 원고들을 하나의 그룹으로 묶었다.


제1그룹에서 제5그룹까지. 그룹 배정을 하기 위해선 현황 파악에 들어가야 한다. 41개 원고를 다시 읽으며 고쳐쓰기 난이도를 평가했다. 다녀온 지 조금 된 여행기이거나, 인용한 작품이 난해한 경우나, 분량이 너무 짧은 글은 다시 쓰기 까다로우므로 ‘상’, 조금 수월한 원고는 ‘중’, 거의 고쳐쓸 것이 없는 원고를 ‘하’로 분류했다.  (나중에 깨달았지만 거의 고쳐쓸 것이 없는 원고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각 그룹에 상, 중, 하의 원고를 적절히 배분했다. 한 그룹에 속한 원고들을 수정하고 다시 쓰는 데는 2주의 시간을 주기로 했다. (나 자신에게)



그런데 이런 작업… 굉장히 많이 해 본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중학생 때부터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준비하던 날들이 떠올랐다. 나는 시험을 한 달 정도 앞두고 문구점에 예쁜 수첩을 사러 간다. 그에 걸맞은 색깔 펜도 고른다. 내가 강점이 있는 과목과, 잘 못하는 과목이 있다. 어려운 단원이 있고, 쉬운 단원이 있다. 그들이 자연스레 상, 중, 하로 분류된다. 하루에 공부할 수 있는 분량을 감안하여 (물론 포부가 한껏 더해져) 그룹이 지어진다. 배치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므로 정교하게 이뤄진다. 그렇지 않으면 잘 하고, 관심 있는 과목만 공부하게 될 수 있으니까.


이렇게 시험 대비 계획을 세우는 일 만으로 반나절이 족히 지나간다. 아직 공부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공부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피곤해지니 침대가 나를 부른다. 결국 첫날부터 계획은 지켜지지 않는다. 2,3일이 미뤄지고, 1주일이 미뤄지고… 밀린 계획들은 시험 전 주에 걷잡을 수 없이 모여들었다. 시험을 목전에 둔 날들엔 해야할 공부가 여백도 없이 빽빽하게 들어선다. 결국 시험 전날은 벼락치기로 밤을 지새운다. 한 달 전부터 열심히 적은 글씨들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던 것일까. 수첩에 적을 시간에 공부를 했다면 조금 더 좋은 점수를 받지 않았을까. 그것이 모여 보다 나은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을까.


이 학생은 그대로 성인이 되었다


나는 이미 첫 번째 그룹부터 스스로 만든 마감일을 지키지 못했다. 2차, 3차 원고 그룹의 마감일이 한 주씩 밀어지는 것은 다반사였다. 마지막 그룹에 포함되어 있던 여섯 편의 원고를 고치는 데는 한 달 넘게 소요되었다. 마감일이 미뤄질 때마다 나는 굉장히 초조했다. (출판사에서는 ‘봄’까지만 달라고 했을 뿐인데!) 기온이 올라가고, 옷이 얇아지자 예민함이 절정에 다다랐다. 평년 같았으면 더디오는 봄을 무척이나 기다렸을 텐데, 올해 봄은 유난히 나를 향해 돌진해 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론적으로 거의 매일 같이 수정해가며 공을 들인 나의 초고 완성 계획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상, 중, 하로 분류했던 원고들은 모두 '상'으로 수정되었고, 마지막 그룹에는 그 중에서도 가장 난해한 원고들이 모여들었다. 학생 때부터 안고 있던 문제를 여전히 반복하고 있는 나. 하루에 처리할 수 있는 공부량, 원고량을 미리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약 4,5년간의 여행 기록이다 보니 한 책에 담기엔 전체적인 톤이 맞지 않았고, 통으로 들어내야 하는 문단도 많았다. 내가 쓴 문장에 스스로가 어색함을 느끼기도 했다. 처음에 고쳐쓰기 난이도 ‘하’로 분류한 원고임에도!


드라마 '빵과 수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 속 그곳 - 휴무.
영화 '해피 해피 브레드' 속 그곳 - 역시 휴무.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 속 펜션 - 흔적도 없이 사라짐.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 속 해바라기 풍경 기억나시나요? - 해바라기 없음.



초고를 만드는 모습을 보면 나의 여행이 대략 예상되실 것이다. 굉장히 빼곡한 계획 아래 시작되지만, 전혀 다른 양상으로 진행된다. 늘 허술하고 비효율적이다. 가고 싶은 곳, 가야만 하는 곳이 노트를 한가득 채우고 있지만 보통 하루에 한 작품 속 한 명소를 다녀오면 해가 지곤 한다. 그마저도 실패할 때가 많다. 가는 길이나, (그곳이 문을 열고 닫는 장소라면) 영업시간이나, 여전히 영업을 하고 있는가 등에 대해 거의 알아보지 않고 무작정 떠나기 때문.


쏟아지던 졸음을 참으며 겨우 가게에 도착했지만, 아쉽게도 휴일이었다. 나는 사전에 준비를 제대로 해가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가게 영업일 운이 유독 좋지 않다. 차로 두 세 시간을 달려 찾아갔는데, ‘직원 야유회로 오전만 영업을 한다’는 안내가 붙어있다든지, 단체 예약으로 식사가 어렵다든지 하는 일을 빈번하게 만난다. 미리 영업일을 알아보고 전화를 걸어서 예약을 하고 가면 되는 일이겠지만 그러면 왠지 가기가 싫어진다. 참으로 번거로운 청개구리다.

- '다정한 여행의 배경' (가제) 중에서



계획 세우기를 좋아하는

청개구리가 초고를 쓰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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