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적인 첫 피드백을 받고 떠오른 풍경
눈앞에는 붉은 글씨들이 한 데 모여 뒤엉켜 있었다.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고 첫 피드백을 받은 날이었다.
백과사전 편집자로 5년 가까이 일하면서 어림짐작 만으로도 수백 장에 달하는 글에 첨삭을 했다. 나의 주요 업무는 집필자들이 써온 백과사전 글을 다듬는 일이었다. 첨삭 과정에 인간미 따위 없었다. 비문, 오탈자가 나오면 글씨를 붉은색으로 칠해버리고, 때론 줄을 쫘악 그어버렸다. 바로 삭제해버리는 일도 부지기수다. 원고 하단에 기입하는 코멘트도 가차 없이 날렸다. ‘나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겨 화가 났음’을 한껏 드러내며.
“일부는 수정을 했습니다만, 비문이 너무 많군요. 내일 오전까지 전체적으로 다시 손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책을 쓰기 시작한 나는 정반대의 입장이 되어 있었다. 내가 쓴 원고를 첨삭받게 된 것이다. 일곱 편의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고 며칠 뒤, 나의 원고들은 붉은 글씨를 가득 안고 돌아왔다. 그 모습을 보자 갑자기 내 눈 앞에는 지난날 내 손으로 붉게 바꿔버린 글씨들이 잔뜩 모여들어 뒹굴고 있었다. 그 글씨들은 나를 향해 화를 내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얼굴에 여드름이 잔뜩 난 것처럼도 보였다. 가슴이 미어졌다.
‘일단 검은 글씨가 많은 페이지만 봐야지.’
이렇게 생각했지만, 사실 거의 모든 페이지에 붉은색이 포함되어 있었다. 전체가 붉은 글씨로만 가득한 페이지를 만나자, 또 그 안에 맞춤법까지 틀려 있던 것을 발견하자 나는 한계에 다다랐다. 물론 '한글을 굉장히 잘 구사하는 사람'이라고 자부하진 못하지만. 그러기에 나는 여러 방법을 동원해서 글을 완성시켰다.
우선 문서작성 프로그램에 기본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맞춤법 검사기. 틀린 문장과 단어에 그어지는 빨간 줄을 꼼꼼히 본다. 그리고 다음과 네이버 두 곳의 맞춤법 검사기를 각각 돌려본다. 서로 다른 부분을 짚어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총 세 번의 검사기를 돌렸음에도! 틀린 한글은 들어 있었고, 담당 편집자의 눈을 피해가지 못했다.
붉은색 글씨 중에는 표현과 단어를 다른 방향으로 제안한 내용도 있었다. 읽어보니 제안을 받은 방향으로 수정을 하면 의미가 훨씬 명확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나의 원고 속 단어와 표현들... 사실 단어의 바닷속에서 고르고 고른 아이들이다. 얼마 전 마스다 미리의 만화를 보다가 '맞아 맞아' 소리를 내며 공감했다.
아는 한자와 어휘의 수가 빈곤해서 유사어 사전이 아주 도움이 됩니다.
'놀라다'의 유사어는....... '혼비백산하다', '간담이 서늘하다'...
- 마스다 미리, '평범한 나의 느긋한 작가 생활' 중에서
나도 유의어 사전의 큰 도움을 받아 글을 썼다. 물론 웹사전을 이용하기 때문에, 마스다 미리처럼 종이사전을 펼쳐볼 필요는 없다. 같은 단어가 너무 많이 반복된다는 느낌이 들 때, 내가 사용한 어휘가 문장에서 유독 튄다 싶을 때, 하고 싶은 말이 백 프로 표현되지 않았을 때. 유의어 사전에서 보물을 발견하곤 했다.
아무튼. 나의 글은 거르고 걸러, 고치고 고쳐 완성되었다. 그럼에도 불긋불긋하게 돌아왔다. 도저히 첨삭 내용을 읽을 자신이 없어서 파일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부엌에 가서 인스턴트커피 두 봉지를 뜯어 아이스커피를 만들었다. 얼음도 잔뜩 넣었다.
소파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멍 때리기를 20분.
카페인과 설탕이 긍정적인 생각을 하도록 만든 것일까. 문득 감사한 마음이 일기 시작했다. 내가 쓴 문장을 다른 누군가가 이토록 꼼꼼하게 읽어준 적이 있던가. 아니, 단지 읽은 것뿐 아니라 이렇게 세심하게 고민해주다니. 굉장히 행복한 일이었다.
붉은색은 가장 따뜻한 색이다.
세상에 나온 대부분의 책들은 붉은 글씨를 품은 후 탄생했을 것이다.
행복한 기운이 돌자 문득 한 도시가 떠올랐다. 나는 미국 세도나에서 이토록 따뜻한 붉은빛을 만난 적이 있다.
맙소사.
붉은 암석들이 마을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었다.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도, 상상해본 적도 없는 자연의 얼굴이었다. 이런 선물이 기다리는 줄도 모른 채 잠들어 있었구나……. 대개 미국 서부 여행하면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나, 그랜드캐니언의 장엄함, 여유가 넘치는 해변 풍경을 떠올린다. 이들은 나의 상상력 범주 내의 풍경이다. 영화나 사진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이미 많이 접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문교나 그랜드캐니언을 마주했을 때 대단한 감탄사가 내뱉어지진 않았다. 대략 예상했던 풍경이었다...
- '다정한 여행의 배경' (가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