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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 연주된 음악

by 쓰는 사람

몸이 아파서 집에만 있던 시기가 7년 정도 있었다. 집에만 있으니 시간이 많았다. 몸이 낫기를 기대하며 이런저런 운동을 하고 건강카페를 들락거리며 정보도 구해보지만 하루 종일 그러고만 있을 수는 없다. 사회적인 활동을 할 수는 없지만 이 시간 동안 내 안에 뭔가 근사한 걸 쌓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중 하나가 음악이었다. 시간도 많은데 음악이나 왕창 들어볼까? 세상에는 멋진 음악이 많으니까. 음악에 정통한 사람이 되면 있어 보이지 않을까. 음악을 즐길 줄 알고 음반에 대해 그럴듯하게 한마디 할 줄도 알고. 순수하게 음악을 즐기기 위해서라기보단 음악이란 '교양'을 갖추고픈 허영심도 있었다.


클래식 100대 명반, 대중음악 100대 명단 등의 리스트를 구해 프린터로 출력했다. OO파일, OO디스크등의 웹하드 사이트에서 리스트에 보이는 음악을 되는대로 다운받아 틈나는 대로 들었다. 글렌굴드 골드베르크 연주곡, 베토벤 합창, 호로비츠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브람스교향곡, 언니네 이발관, 브로컬리너마저, 9와 숫자들, 비틀즈, 퀸, U2, 이적, 이소라, 장필순... 음악의 세계는 방대하고 깊었다. 음악을 듣는 동안 노래의 순간이 현재에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눈에 보이는 현실세계가 있고, 소리로 이루어지고 소리로만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세계가 있단 걸 설핏 느꼈다. 여기 아닌 또 하나의 세계가 현실의 고단함을 잠시나마 잊게 해 주었다.


내가 그렇게 체계적인 사람이 못돼놔서 한 분야의 음반을 차례대로 들어가며 지식을 쌓아가진 못했다. 내 관심사는 깊게 뿌리내리기보다 여기저기로 툭툭 튄다. '재즈 잇 업'이란 재즈만화책도 사놓고 부분 부분 읽었을 뿐이다. 그저 다운받은 음악을 이것저것 들어보다 마음에 쏙 들어오는 음악을 만나면 오만 원 지폐폐도 주운 듯 신나서 듣고 또 들었다.


유독 마음에 들었던 음반은 키스 자렛이란 피아니스트의 <퀼른 콘서트>였다. 이 음반은 독특하면서도 전통적이고, 즉흥적인듯하면서도 인간 공통의 정서를 담고 있었다. 보통의 음악은 기본적인 멜로디 하나가 음악의 중심에 있고, 기본 멜로디를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하며 곡을 진행해 간다. 이 곡은 멜로디가 계속 변화했다. 현미경으로 세포를 확대해서 보면 자기들끼리 꿈틀대며 분열도 하고 새로운 세포가 만들어지기도 하는데, 이 음악의 멜로디는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갔다. 조금씩 변해가다 어느 순간 전혀 새로운 멜로디로 탈바꿈해 있다.


그런데 피아노는 두 손으로 치는 게 아닌가? 한 손으로 치는 멜로디가 조금씩 변해갈 때 다른 손으로 치는 멜로디도 조금씩 변화해 간다. 각각의 멜로디가 테니스 선수들이 치고받는 공처럼 유기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한 곡의 역동적인 피아노곡을 만들어간다.


듣다 보면 피아노 연주의 틀을 넘어 일종의 특수음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도 있다. 깜깜한 동굴에서 '누구야~'하고 외친 소리가 동굴벽에 부딪쳐 웅웅웅웅 계속 울리다가 불현듯 뚝 끊기기도 하고.


피아니스트들은 공연을 위해서 연주하기로 정해진 곡을 수없이 반복연습한다. 이 음반에 대해 알게 되고 놀랐던 것은 이 공연에 애초에 정해진 악보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 연주는 피아노연주자가 자기 안의 감성과 마음을 즉흥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그것이 네 단락의, 한 시간이 넘는 연주로 나온 것이다. 퀼른에서 콘서트를 할 무렵 키스 자렛은 긴 시간 동안 고물자동차를 타고 이 지역 저지역의 공연장을 돌며 순회공연을 하고 있었는데, 자동차 의자의 쿠션이 딱딱하고 불편해 허리통증이 도졌다. 공연장에 준비돼 있던 피아노도 사전에 요구했던 그랜드피아노가 아니라 공연장 끝까지 음량을 전달하기 어려웠고, 조율이 잘못돼 있었기 때문에 고음부 건반을 못 쓰는 상태에서 연주를 해야 했다. 허리도 아프고 공연 시설도 안 좋은 상황에서, 말하자면 감기약 먹은 것처럼 정신이 몽롱한듯한 상태에서 3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기막힌 연주가 탄생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단 한 번만 연주된 음악이다. 연주자조차도 처음 들어본 음악. 연주자와 관객이 함께 처음 들어본 음악.


물론 그는 물리도록 피아노를 쳐왔을 것이다. 같은 곡을 숱하게 치고 또 쳐왔을 것이다. 즉흥곡이라지만 집에서 혼자서는 많이 쳐봤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즉흥적으로 연주한 공연 자체가 한 장의 명반이 돼버린 건 마술 같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연주자가 단 한번 연주한 음악을 나는 꽤 여러 번 들었다. 걸으면서 듣고 오디오로 듣고 이어폰으로 듣고, 오늘 듣고, 내일 듣고, 몇 달 있다 또 듣고. 가만히 듣고 있으면 어느 순간 몰입이 돼서 몸이 덜덜 떨리기도 한다. 햇볕 난 베란다에 빨래를 널면서 음악을 듣다 보면 내가 빨래를 널고 있는 건지, 빨래가 나를 널고 있는 건지 아득해지기도 한다.


차를 운전해 어딘가로 가고 있다. 차 안에 왕왕 울리는 음악에 빠져들어 내가 파란 신호등에 직진을 한 게 맞는지, 앞에 트럭이 있을 때 좌회전은 어떻게 했는지 모르는 상태로 목적지까지 왔다. 까딱하면 반대차선으로 돌진해 버릴지도 모를 무서운 음반이다. 목적지에 도착했는데도 애간장을 끓이며 언덕길을 오르고 있는 음악을 끌 수가 없어서 시동을 끄고 가만히 음악을 듣는다. 곡이 끝나고,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온다. 공연장을 가득 메우던 박수갈채가 어느 순간 간격을 두고 북처럼 짝! 짝! 짝! 짝! 박자에 맞춰 울리기 시작한다. 누가 키스자렛 관람객들 아니랄까 봐 박수소리도 생물처럼 변화해 간다. 연주를 마치고 관객들의 환호를 받는 그 순간, 그의 마음은 얼마나 뿌듯하고 충만했을까. 피아노 연주는 그에게 '왜 살아가는가'란 질문에 대한 생생한 답이 돼 주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창작자가 공들여서 자신의 감성을 오롯이 담아낸 작품에 끌린다. 이런 작품을 보고 들으면서 울림을 느끼는 순간이 소중하게 여겨진다. 이 작품들은 분명히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무언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다른 작품들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자신만의 고유한 목소리를 지니고 있다. 나는 음악이든 문학이든 영화든 이런 걸작들에 관심이 있다. 살아오며 이따금 마음에 쏙 들어오는 작품들을 만날 때마다 하나하나 수집해 왔다. 집안일을 끝내놓은 휴일이면 이 작품들을 꺼내어놓고 바라보며 혼자서 웃고 감동하고 눈물짓기도 한다. 언젠가 나도 이 정도의 울림을 주는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쓸쓸히 생각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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