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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린이 Feb 18. 2019

인생은 평영

어쩌다, 수영


수영에 대한 나의 로망은 휴양지 수영장에서 우아한 수영을 하는 것이었다. 가끔 수술 상처가 아물면 가까운 호텔이라도 가서 휴양지 미녀들처럼 비키니를 입고 우아한 평영을 해보는 상상을 해보곤 했다. 비키니가 이번 생엔 불가능한건 둘째치고 '우아한 평영'이라는 로망을 이루기까지 얼마나 고된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평영을 배우고 나서야 알았다. 그렇다. 우아한 휴양지 수영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었다.


록쌤은 평영이 상대적으로 다른 영법에 비해 '정적인 영법'이라고 했다. 자유형과 배영은 쉼없이 팔을 던지고 끌어당겨야 한다. 접영은 보기만해도 역동적이다. 팔과 함께 가는 다른 영법과 달리 평영은 한번의 킥이 너무나 중요하다. 그래서 킥을 완성하지 못하면 평영은 끝이다.


처음에 나는 '뒤로 갔다'


평영 킥을 처음 배울때였다. 나는 있는 힘껏 뻥! 찼다고 생각했는데 정확히 뒤로 갔다. 록쌤은 반 사람들을 불러세웠다.


'자 여러분 여기 회원님 보세요. 뒤로가죠? 이렇게 하시면 안되요. 절.대.안.됩.니.다. 발을 엉덩이 뒤쪽으로 당길 때 너무 힘을 줘서 당겨서 그래요. 그러면 뒤로 가요. 우리 뒤로 가려고 수영하는거 아니잖아요'


대굴욕이었지만 정말 중요한 가르침이었다. 평영 킥은 개구리처럼 다리를 뻥! 차는 동작에 힘을 실어야하는데 다시 다리를 모으는 동작에 쓸데없이 준 힘이 10cm 간신히 나아간 거리도 다시 원위치로 되돌리고 마는 것이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레베카 소니


모든면에서 나는 참 힘을 뺄 줄을 몰랐다. 아니 사실 모든 순간마다 쓸데없는 힘을 들이고 살았다. 요가의 마무리는 사바아사나, 즉 송장 자세다. 한시간 동안 계속된 수련으로 긴장된 근육을 이완하고 눈을 감고 누워있으면 수련실을 따뜻하게 채우는 만트라와 싱잉볼 소리로 마음까지 고요해지기 마련이다. 가끔은 코를 골며 잠에 빠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그 시간마저도 좀처럼 긴장을 풀지 못했다. 3분에서 5분 남짓한 그 짧은 시간동안 '오늘은 왜 다운독 자세 할 때 허리가 좀 더 유연하게 펴지지 못했던 거지?', '오늘은 어제보단 좀 더 잘 한 것 같아' 머리 속에서 누군가가 계속 말을 걸어왔다. 요가로 올림픽에 나갈것도 아니면서 왜 굳이 긴장을 풀고 쉬라는 시간에까지 머리속에는 잘하고 싶은 욕심이 가득했는지.


지금껏 살아온 인생이 그랬다. 크게 유복하지않고, 그저 적당히 없는집에서 태어난 대한민국 맏딸들이 대부분 그럴 것이다. 성실하게 공부하고 성실하게 부모님 말씀 듣고 성실하게 대학 졸업해 성실하게 취직해서 지금껏 10년간 하루도 적당히 노는 법 없이 살았다. 하루정도는 좀 힘빼고 땡땡이도 치고, 하루정도는 반항도 좀 해줬으면 킥을 뻥뻥 찰때마다 앞으로 쭉쭉 나갔을 텐데 단 한번의 킥도 나는 허투루 찬적이 없었고, 단 한번도 다리에서 힘을 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나가지도, 뒤로 후퇴하지도 않고 지금도 어정쩡하게 제자리에 둥둥 떠있나보다.


그렇게 평영이 내게 가르친 첫번째 과제는 '힘을 줄때 주고, 뺄때 빼는 것'이었다.


두번째 과제는 '매일매일 나아지기'였다.


어느날 록쌤은 물 밖으로 나가더니 '회원님 벽부터 시작해서 25미터 스트록 몇 번에 가는지 셀게요'라고 말했다. 몸치인 나는 평영 풀과 킥의 교묘한 엇박자에 신경쓰느라, 내가 지금 완벽한 윕킥을 구사하고 있는지와, '뻥' 찬 순간만큼이나 중요하게 다리를 딱 붙여서 물을 끝까지 밀어내는지, 물속에서 한없이 뒤뚱거리는 몸을 신경쓰느라 10번 다리를 찼는지 20번 찼는지 셀 겨를이 없었다.  

 

천천히 걸어서 나를 뒤따라온 록쌤은(그렇다...내 평영은 걷는것보다 느리다) '몇번인지 아세요?'라고 물었다.


"그..글쎄요 한 10번인가?"

"휴 저도 몇번인지 헷갈리네요. 제가 다른회원분들 평영하실때 10 넘게는 세본적이 없어서요"

 

뒤로 간 날에 이어 2차 대굴욕이었다. 록쌤은 어릴때 평영 연습이 제일 즐거웠다고 했다. 무림의 고수가 매일 검을 갈아 검술을 연습하듯 매일매일 킥을 가다듬어서 연습하다보면 어느날은 10번, 어느날은 9번, 어느날은 8번하고도 약간 못미치는 거리로 줄어드는게 눈에 보여서라고 했다.


디스크를 안고있는 나는 내게 맞는 무릎의 간격, 발목을 굽히는 정도, 킥의 모양을 찾기까지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했다. 어느날은 고관절이 아프고 어느날은 허리가 아팠다. 어느날은 발목이 너무 빨리 펴져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복숭아뼈와 정강이에 물이 걸리는 느낌이 났다. 이게 내 킥이었다. 너무 신이나서 물속에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만의 킥을 드디어 찾은 것이다. 물론 물에서 뒤뚱뒤뚱 가는 주제에 이 황금같은 킥이 매번 나오라는 법이 없었다. 몸에 익을때 까지 연습 또 연습이었다.


세상에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에 있을까. 물에 몸을 맡기고 머리속을 비울 수 있는 최고의 운동이면서도 벽을 떠날때 머리 속을 비워선 안된다. 내가 어떤 모습으로 앞으로 나가고 있는지, 그리고 매 순간 조금이라도 나아지고 있는지 생각해라. 그저 어제보다 오늘 조금만 더 나아지면 된다. 그게 평영이 나에게 가르쳐준 두번째 교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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