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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키거 Jul 13. 2024

다시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난다면 바꾸고 싶은 것들

언젠가는 내 반드시 다시 걸을 순례길

아는 만큼 보인다고, 두 번째 산티아고는 조금 더 낫지 않을까

 2023년에 서른아홉 생일을 갓 넘기자마자 마흔을 앞두고 걸은 나의 산티아고 순례길은 이상하리만치 걷는 내내 ‘이번이 내 인생 유일한 산티아고 길은 아닐 거다’라는 확신을 주었다. 걸음마다 더 선명해지는 이 확신은 순례길을 걸어본 순례자들이 느끼는 ‘까미노 블루’와 같은 그리움이 아닌 이미 정해진 사실처럼 다가왔고, 지금 나는 내 두 번째 산티아고를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다.

 2024년은 아니지만 아마도 근 몇 년 안에 나는 또 산티아고를 갈 것이고 (물론 우리 신랑은 아직 모른다) 그 길을 위해 다리 아픈 것도 잘 낫도록 운동도 차근히 하고, 짐과 길에 대한 계획도 서서히 세워두려 한다. 그래서 아직 기억이 생생할 때 나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글로 남기기 시작했던 거고, 그 기억과 기록을 바탕으로 나의 두 번째 순례길에서 정말 바꾸고 싶은 것들, 더 잘 챙기고 싶은 것, 다음번에는 꼭 피하고 싶은 것들을 잘 분별해 준비하기로 했다. 순례길을 한번 더 걷는다고 해서 첫 번째와 다르게 모든게 완벽한 길이 될 거라 장담은 못하겠지만 내가 처음 걸으면서 너무나 아쉬웠던 커다란 부분들을 바꿔 준비함으로 적어도 몸과 마음은 전보다 더 가벼워질 것 같다.


1. 적어도 33일로 계획 짜기

 일단 나는 체력이 정말 좋은 편의 여성이다. 늘 운동을 잘했고, 좋아하고 뭘 배워도 빨리 배우고 순발력도 뛰어난 편이라 순례길에 대해 큰 걱정은 안 했다. 하지만 그런 나도 순례길을 31일에 끝내는게 꾀나 힘들었고 다음번에는 절대 이렇게 몰아 걷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다. 앞에 20일은 남들이 많이 걷는다는 루트로 평균 25km 전후로 큰 무리 없이 걷다가 20일 차에 레온에서 친언니를 만나 걷기 시작하면서 반 넘는 날을 30km 이상 걷고 아주 긴 날은 34km도 걸었는데 이게 정말 힘들었다. 누구의 계획이었냐면 언니가 옛날에 걸었던 순례길의 루트를 그대로 따라 가져온 것. 이것이 아주 큰 오류 였던게 그 당시 언니는 젊었고 (9년 전이니까 갓 서른 살), 너무 예전이라 본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면 9년 전 희미한 기억 속 언니의 막무가내 루트를 그대로 따온 건 아주 큰 실수였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아무리 멀고 험해도 계획해둔대로 다 걷긴 걸어진다. 정말 무서우면서도 다행이었던 인간의 본능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걸으며 느낀건 조금 더 여유 있게 걸으며 행복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걷는다면 무조건 33일 이상으로 계획을 세우리라 각오했다. 물론 20대의 더 젊은 분들, 또 남성분들이라면 29일도 거뜬하실 거라고 본다. 나는 이제 곧 마흔을 바라보는 중년의 초입구에 서있는 중년 새내기임과 동시에 여성임을 감안해 33일 정도면 서두르지 않으면서 뒤쳐지지도 않는 적당한 리듬으로 더 즐겁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내 첫 순례길의 루트를 짜는 것의 가장 큰 오류는 31일이었다 해도 나눠서 조금씩 더 걸었으면 덜 힘들었을 텐데 20일은 평범하게 잘 걷다 마지막 11일을 몰아서 길게 걸은 것이었으니 역시나 중요한 건 중도를 지키는 것 같다.


2. 내가 지나쳤던 예쁜 도시, 새로운 도시에서 머물기
아스토르가와 빌라 델 프랑카

 

 이것도 언니의 예전 순례길 루트를 그대로 가져오면서 생긴 오류였는데 더 많은 거리를 걷기 시작하면서 메인 도시보다 조금씩 더 걸어가다 보니 유명하고 예쁜 도시 몇 군데를 놓쳤었다. 지나쳐가며 너무 아쉬움이 많이 남았던 아스토르가와 빌라 델 프랑카 그리고 포르토마린. 이곳들은 마을 자체가 참 예쁘고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곳들이라 나의 두 번째 산티아고 순례길에선 반드시 자고 가는 도시들로 이미 찜을 해두었다. 한 번 다녀와 보니 정말 유명하고, 편의시설도 많고 큰 도시들을 다 들릴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도시가 워낙 많을뿐더러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처음인 순례길이라 솔직히 어느 도시가 뭐로 유명한지는 지나가며 나중에 배운다.

 내가 미래를 기약하며 아스토르가와 빌라 델 프랑카, 포르토마린을 넣고 얼추 계획을 짜보니 정말 맛있게 행복했던 기억이 가득한 멜리데에서 자고 가기에는 일정이 또 애매해지더라. 아… 벌써부터 고민이 많아진다. 멜리데에서 먹은 문어는 정말 맛있었단 말이지. 오죽했으면 문어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 내가 점심도 문어, 저녁도 문어를 먹었을까… 여하튼 정 안된다면 지나가면서라도 문어는 꼭 먹고 갈 것이다. 첫 순례길에서 너무 아쉬웠던 세 도시에 머물게 된다면 아주 즐거울 것 같다.


3. 아쉬웠던 숙소들을 바꿔보기
고시원 같았던 까리온의 개인실과 산 후안 오르테가의 12인실 침실


 구글맵이나 북킹닷컴의 리뷰들을 확인하고 나름 최선으로 숙소들을 골랐지만 가성비, 가심비가 떨어졌던 곳들이 몇 있었다. 이건 정말 개인적인 만족도 차원이기에 묵기 전에는 모르지만 다시 걷는다면 변화를 주고 싶은건 분명했다.

 먼저 숙소 대란으로 예약을 안 한 사람들이 다른 도시로 택시를 타거나 부르고스로 되돌아갔던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의 의 숙소 Albergue El Alfar de Rosalía. 6명이 한 방이라 크게 불편하진 않았는데 화장실과 침대 등 시설이 낡았어서 다음번에는 같은 도시지만 다른 숙소의 개인실을 예약할 것 같다.

 그리고 까리온 데 로스 콘데스의 숙소 Hostal Plaza Mayor에서는 30유로를 주고 묵은 1인실이 너무 고시원 같아서 많이 실망했다. 이날 발의 물집이 너무 아팠고 하필 저녁부터 비도 추적추적 내리는게 내가 지금 이 좁은 곳에서 뭐 하고 있는 건가 마음까지 우중충해졌다. 이런 방에서 묵어본 적이 없어서 처음에 방을 보자마자 후다닥 로비로 내려가 청소하느라 열려있던 큰 방들을 보고 돈 더 낼 테니 방을 바꿀 수 있냐 물었지만 역시나 만실이 된 성수기라 아쉬웠던 기억이 있다. 내가 다음에도 같은 곳에 머무른다면 20유로를 더 주고라도 좀 더 넓고 밝은 곳에 머물겠다 다짐했었다. 개인실이라고 다 같은 개인실이 아니구나, 어쩐지 1인실 사진이 사이트에 없어서 난 올라와있는 더블침대방 사진이 1-2인실인 줄 알고 예약했지 뭐야. 역시 경험으로 배워가는 산티아고였다.  

 이 외에 다른 숙소를 정할 것 같은 곳은  푸엔테 다 레이나의 Hotel El Cerco(가격은 비싼데 방과 침대가 너무 작아서), 산 후안 데 오르테가의 Albergue El Camino (가격은 저렴하고, 운영하시는 분들이 너무 친절했지만 강당 스타일의 12인실에서 남녀 다 섞여 자는 건 아직 불편했다), 그리고 프로미스타의 숙소 Hotel Rural San Pedro (위치와 뷰 좋지만 역시 높은 가격에 비해 시설이 조금 오래되었다) 정도가 있다.

 내가 경험한 것을 토대로 다음번에는 비슷한 가격대에서 더 새로운 숙소들을 시도해 보며 더 즐겨보고 싶다.


4. 다른 순례자들의 유용한 아이템들 추가하기
믹스어블의 썬가드 (14900원), 씨투써밋의 빨랫줄 (10400원), 팻츨의 해드랜턴 (35유로)


 길을 걸으며 만난 순례자들에게서 본 나에게는 없던 알찬 아이템들도 다시 걷게 된다면 내 짐에 추가하는게 내 계획 중 하나이다. 비행을 하면서도 동료들과 선배들에게 비행에 유용한 아이템과 신문물들을 참 많이 배웠었는데 (컨테이너의 씰을 뜯는 씰커터, 갤리 담당일 때 유용한 미니 아이스스쿱, 화장실 냄새 없애주는 일본의 향기 드롭 등) 순례길에서 하나 둘 나는 몰랐던 걸 배워가는 것 또한 신기하고 즐거웠다. 단 이 배움은 두 번째 산티아고에서부터야 쓸 수 있다는게 함정이라지. 아, 나에게는 그렇다는 거고 미래의 순례자분들은 내 경험을 통해 조금 더 나은 첫 순례길이 되실 수 있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다.

 첫 번째로 J 씨가 사용하는 걸 보고 ‘완전 부럽다’ 느껴서 몇 주 뒤 도착하는 언니에게 주문 부탁해 받았던 모자용 햇볕 가리개. 나야 순례길 21일 차부터 언니에게 전달받아 잘 사용했지만 언니가 오는 스케줄이 아니었다면 정말 어땠을지 앞이 깜깜해진다. 이건 지금은 나에게 있지만 나도 순례길에서 발견해서 너무 부러웠었고 나중부터 잘 쓴 거라 다른 분들이 유용한 아이템으로 꼭 넣어 가셨으면 해서 먼저 언급해 둔다.

 두 번째는 선생님이 가지고 계셨던 집게 필요 없는 빨랫줄. 캠핑용으로 나온 휴대용 빨랫줄인데 비즈들을 잡아당기면 안이 두 줄이라 빨래를 줄 사이에 넣고 비즈를 빨래 넓이에 맞춰 조여주면 딱 고정되는 신문물이다. 침대처럼 어디 묵을 곳만 있으면 완성에 크기도 작고 가벼워서 신기하고 부러웠다. 나도 다음에 꼭 사야지 했던 거. 빨랫줄은 개인실을 쓰던 단체실을 쓰던 작은 빨래를 하고 건조기를 안 쓸 경우에 정말 유용하다.

 세 번째는 호주 순례자의 경량 해드랜턴인데 내가 가져갔던 데카트론에서 산 해드랜턴은 밝기 조절과 빛 세기도 좋았지만 부피가 있고 줄이 두꺼워 머리가 좀 조이는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주비리에서 만난 호주 순례자분이 정말 장난감처럼 예쁜 해드랜턴을 하고 있길래 물어보니 본인은 하이킹을 자주 하는 사람이고, 이게 가벼워서 참 잘 쓰고 있다고 해줘서 바로 탐나기 시작했다. 검색해 보니 페츨(Petzl)이라는 프랑스 제품이었는데 다음번에는 이렇게 줄도 얇고, 초경량인 해드랜턴을 사 와야겠다 싶었다.


5. 목마를 때 생각났던 한국의 바로 ‘그 음료’ 챙겨가기

 함께 걸은 일행과 정말 많이 했던 이야기 중 하나가 “아~ 여기서 시원한 보리차 팔면 얼마든지 사 먹을 텐데”, “얼음 가득한 믹스 냉커피 마시고 싶다”. 바로 이런 거였다. 그래서 나의 두 번째 산티아고에는 첫 순례길에서 없어 정말 아쉬웠던 보리차 티백과 카누 같은 봉지커피 그리고 믹스커피 몇 개를 꼭 챙겨가리라 다짐했다.

 나는 외국에 오래 살면서 한국 음식과 김치 없이도 불편함 없이 잘 살았는데 이상하게 순례길에서 보리차와 믹스커피가 그리 생각이 나더라고… 왜 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평소에 믹스 냉커피나 보리차를 사두고 먹는 타입도 아닌데 말이다. 그냥 순례길에서 어떤 특정한 음료에 대한 나의 갈망은 오 필승 코리아로 리셋되어 버린 듯했다.

 얼음이야 규모가 좀 있는 슈퍼에서는 봉지로 쉽게 구할 수 있으니 (1-2유로면 파티를 해도 될 정도로 커다란 얼음 한 봉지를 살 수 있다) 가끔 생각날 때 얼음 가득한 냉보리차와 냉커피를 마셔주며 스스로에게 상을 주고 싶다. 그리고 조금 더 여유가 된다면 나와 함께 걷게 될 소중한 인연들과 이 음료를 나누고 싶다. 혹시 아나, 첫 순례길에서 느꼈던 이 두 음료에 대한 갈증을 풀고자 두 번째 순례길에 잊지 않고 챙겨갔는데 생각했던 만큼 고프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없어서 후회하느니 일단 챙겨가서 지켜볼 테다.


그 순간만으로도 이미 완벽한 순례길

 무언가 부족하고, 안타깝고 아쉬운 순간들이 생겨도 순례길은 그 자체로 이미 완벽한, 신나는 모험이다. 내가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미 합격이라고나 할까. 산티아고는 완벽하자고 걷는 길이 아니라 불완벽한 우리 모두가 나름의 의미를 찾고자, 아니면 대놓고 크게 한 번 헤매보자고 웃으며 도전하는 길이니까 말이다. 두 번을 가고 세 번을 가도 어느 순간에 조금씩 차고 넘치거나 부족한 상황은 매번 생길 것이다. 그래도 한 번 걸어봤다고 우습잖게 다음은 더 잘 준비할 수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해본다. 10년 정도 더 어렸다면 치기일 수도 있을 텐데 이젠 내가 누군지 꾀나 잘 아는 마흔의 순례 완주자로 의외의 어려움 앞에서 덜 당황하고 담대할 수 있는 용기를 첫 산티아고를 통해 배운 것 같다.

 바꾸고 싶은 것들을 줄줄이 적어봤지만 그저 고려할 조건들일뿐이지 더 행복한 산티아고를 보장해 주는 골든티켓들은 아니다. 이러면 어떠하고 저러면 어떠하리. 우리가 걷는 모든 산티아고는 그 용기와 희망이 담긴 긴 걸음 자체로 이미 매 순간 반짝반짝 빛날 완벽한 순간들이 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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