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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키거 Jul 21. 2024

마흔의 산티아고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물집이 굳은살 방패가 되는 그날까지

마흔의 순례자. 지금이에요, 떠나세요

 우리가 순례길을 안 걸을 이유는 참 많다. 시간이 안돼서, 나이가 많아서, 몸이 아파서, 걷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등 당장 열거할 수 있는 이유만도 여러 가지인 걸 나도 안다. 10년 전에 언니가 순례길을 걷는다고 했을 때 나도 이해가 안 되었다. 아니 왜 그 먼 곳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서 하루종일 땡볕에서 매일 몇 시간씩을 걷는다는 걸까… 왜 알베르게에서 생판 모르는 전 세계의 남자여자들과 공동생활을 하는 불편함을 겪으려는 걸까? 언니가 순례길 이후에 오랫동안 나에게 같이 가자 조르던 이유가 이해가 안 되었는데 코로나를 겪으며 ‘지금이다! 나는 그 길을 걸어야겠다’고 계시처럼 번뜩이는 순간이 왔었다. 그 이후로는 마음속의 불씨가 꺼지지가 않더라. ‘언젠가는 내 꼭 간다!’ 이런 불씨가 한 번 짚여지면 산티아고를 갈 때까지는 계속 타오르는 것 같다. 혹 어떠한 작은 이유 하나로라도 순례길이 끌리기 시작했다면 내가 장담할 수 있다. 동기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한 번 가고 싶다 생각한 산티아고 순례길은 그 길을 떠나고 완주하기까지 절대 없어지지 않을 열정이 될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걸으시라. 그 끌림에는 분명 이유와 목적이 있을 것이다.

 

 순례길을 다녀와서 내가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지독하게도 가기 전과 똑같은 사람이고 나의 생활 패턴이라던가 행동하는 모습들은 아주 한치의 변화가 없다. 그런데도 산티아고를 조금이라도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걸으시길 추천하고 싶은 이유는 내 스스로가 놀라울 정도로 내면의 정리가 되었던걸 경험했기 때문이다. 막 다녀오자마자 ‘아!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하고 느껴지지는 않지만 조금씩 시간이 지나며 꿈같기만 했던 완주 사실이 실감나며 내 안에 크고 작은 변화들을 가져왔다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성급했던, 감정적이었던 나의 못났던 모습들이 조금 더 직관적으로 보인다고 할까. 결국에는 다 비슷비슷한 인생에서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자고 사는 건데 이왕이면 지금 행복하자, 남에게 보이는게 중요하지 않다는, 그전에는 머리로만 알던 사실들이 이젠 마음으로 받아들여지는 걸 가능하게 해준게 산티아고 순례길이었다.


가감 없이 스스로를 볼 수 있던 길

 걸으면서도 실수를 참 많이 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포인트에서 말이 삐쭉하게 나간 적도 있고,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불편해서 마음이 상했던 적도 있고, 좋았던 사람이 있었던 반면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한 내 몸이 나를 실망 시키는 경험은 생각보다 충격이었고 슬펐다. 하지만 내가 컨트롤할 수 있지 않은 부분을 받아 들이고 나아가는 용기 또한 기를 수 있었기 때문에 나름의 의미도 있었다고 본다.

 내가 나이를 더 먹고 순례길을 다시 걷는다고 해도 내가 성자에 슈퍼히어로가 아닌 이상 분명 몸과 마음이 불편하고 상하는 상황은 언제나 있으리라. 하지만 다음번에는 적어도 마음가짐 하나는 더 여유롭고 가볍게 갈 수 있을 것 같다.

 못난 나를 보면서도 참 많은 생각을 했고,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던 순례길이라 바로바로 스스로를 거울 비추듯 돌아보는 시간이 참 새로웠다. 걸으면서 세상에 별 중요하지도 않았던 감정들에 많이 매달려 살았다는 걸 이리 깨끗하게 돌아볼 수 있었던 것도 처음이라고나 할까.


 순례길 전 내 감정들은 바쁜 일상 속에서 반추할 시간 없이 흐리멍텅한 덩어리로 돌아가는 시간들에 섞여 내일로 또 모래로 계속 넘어가며 쌓여만가고 있었던 것 같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한번 걷고 나니 쭉쩡이가 걸러져 나간 알맹이만 남은 나를 볼 수 있었다. 큰 감정의 바구니를 40년 가깝게 묵히고 묵히며 들고 다니다가 이제야 키에 담아 허공에 치대 걸러낸 느낌이다. 저 위에 하늘에서 흩뿌려진 가벼운 껍질이란 감정들은 어렸던, 못났던, 실수투성이의 나였고 적당히 무게를 지키며 내려온 남은 알맹이들이 내가 지금까지 나라는 존재를 지켜온 중심들이었다. 그건 내가 직장을 갖고, 외국 생활을 하고, 결혼을 하며 생긴 굵어진 잔뼈와 손과 발의 굳은살들이었고 또 가족의 지원과 사랑으로 지켜온 행복과 안정감이었다. 책이고 방송에서고 누군가의 입을 통해서 언제나 많이 들었지만 이해는 잘 안 되었던 결국 중요하건 내 자신의 행복이고, 가족의 응원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다 하는 소설 같았던 이야기들이 이제야 현실에서 알맹이라는 실체로 만질 수 있는 순간을 마주한 것이다.


혼자여도 좋고, 나이가 있어도 좋다

 혼자 걸으면 혼자 걸어서 다행이고, 같이 걸으면 같이 걸어서 다행인게 순례길이다. 이렇게 걸어도 저렇게 걸어도 나에게 교훈 하나는 남기는게 순례길이니까. 나이가 조금 있다고 어려울 것 같아도 같은 고생을 하는 우리들은 순례자라는 이름아래 모두가 평등하고 지극히 닮은 사람들이니 걱정하지 말자.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은 긴 여정에 겁먹지 말 것, 사람에 기대하지 말 것 이 두 개뿐이다.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도움을 받는 감동적인 순간들도 분명히 있다. 그래도 내가 베풀 생각을 갖고 남이 내가 필요한 순간에 똑같이 되돌려 줄 거라는 기대는 내려놓고 가야 매 만남이 더 감사하고, 그래서 더 즐거워질 것이다. 다들 사람 사는 곳이고, 나와 같은 순례자들이 가득하기에 우리가 도움을 받을 때도 또 도움을 줘야 할 때도 항상 예절이 함께해야 한다는 전제 또한 잊지 말자.

 뭔가 바라는 길이 아닌 베품의 길임이 목적이고 그건 나 스스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고치고, 바뀌자 바라면서 가는게 아니라 스스로에게 진심으로 관대해지고 내면의 목소리에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에 귀 기울이는 길이다.


 난 적당히 나이 들어서 간 서른아홉의 산티아고 순례길이 참 좋았다. 걸으면서도 내가 너무 어렸을 때 이 길을 걷지 않았음을, 아무것도 모를 때 제목도 없는 텅 빈 열정만 가지고 가지 않았음에 수도 없이 감사했다. 돌이켜보면 20대를 통틀어 30대 후반까지 내가 나 스스로를 제대로 알았던 적이 많이 없었구나 싶을 정도로 산티아고에서 나는 스스로에 대해 많은 발견을 했다. 그동안 그저 시간 가는 대로, 남들 사는 대로 발버둥 치기만 했을 뿐이지 그 안에는 여유도, 담대함도 없이 괜찮은 척만 하며 살았음을 이제야 조금 돌아볼 수 있는 들숨의 순간에 도달한 것 같다.


물집아 고맙다

 산티아고를 걸으며 지금의 나와 예전의 나에 대해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지금 이 길을 큰 걱정과 근심 없이 걷고 있는 내 인생 자체가 축복이고 행운이라는 거였다. 순례길을 다녀온 다음에야 그동안 내가 살아오며 조금씩 마음에 굳은살을 만들고 있었구나를 바라볼 수 있었다.

 굳은살은 순례길을 걸으며 최고의 방패였다. 물집이 생기고 한참을 날 아프게 한 후에야 딱딱해지는 굳은살은 내 무기가 된다. 아파서 걷기가 힘들었던, 온갖 신경을 다 빼앗아 갈 정도로 징글징글했던 그 물집들이 한번 딱딱해지기 시작하면 신기하게도 같은 곳은 두 번 다시 아프지 않다. 내 마음도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린 상처받았던 사람들에게 또 상처받기도 하고 아팠던 그곳이 또 아프기도 하는데 순례길의 물집은 한번 터지고 굳어지면 절대 안 아픈 굳은살이 된다는게 얼마나 큰 위로인지 모른다. 우리 모두의 순례길이 우리 미래에 어떤 의미가 될지를 묻는다면 딱 물집 뒤 굳은살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 자신있게 말해줄 수 있다. 내가 힘들 때 떨어진 고개를 다시 들게 해 줄 든든한 자존심이자 마음의 방패가 돼줄 것이 산티아고 순례길 같다.

 언젠가 ‘아! 내가 이 순간을 위해 지금껏 버텼구나’ 하는 인생의 어떤 깨달음의 순간에 아마도 순례길을 걸었을 때 생겼던, 잊고 지내던 굳은살을 기억해 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러니 우리 인생의 굳은살 만들러 한 번 걸어보자.


2024년 7월 20일 이탈리아에서 작년의 산티아고를 기억하며

from. 2023년 10월 5일에 첫 번째 산티아고 프랑스길을 완주한 몽키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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