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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키거 Oct 12. 2024

5개월의 산티아고 순례길로 대신한 신혼여행

Day 13 산티아고 순례자 사무실에서의 자원봉사 마지막 날

2024년 9월 16일 월요일
산티아고 순례자 사무실 자원봉사 Day 13


다시 한번! 산티아고 대성당 지붕 투어!
성당 정면 가운데에 있는 산티아고상 바로 뒤 지붕에서 투어가 진행된다. 산티아고 상 앞으로 보이는 오브라도이오 광장의 모습

 

 오전 11시 산티아고 대성당 지붕 투어를 예약해 놓아서 오후 근무인데도 서둘러 숙소를 나섰다. 2주일 전 내 생일에 신랑과 함께 이미 같은 투어를 했지만 그날 날씨도 너무 흐렸고, 오직 스페인어로만 진행하는 투어에 뭐라도 주워듣자고 번역기 들고 쫓아다니느라 지붕 자체에서의 사진도 많이 못 담아서 아쉬웠었다. 그래서 오늘!  산티아고를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도전해 본다. 다행히 해도 쨍쨍하니 너무 밝은 날에, 오늘은 설명보다는 뷰를 더 즐겨보자고 생각하니 마음도 가볍다. 스무 명 정도의 사람들이 11시 투어를 위해 모였고, 오늘의 가이드는 우연히 지난번과 같은 산드라이다. 그녀가 스페인어를 하는 사람들이 있냐고 물어보니 절반 이상의 많은 사람들이 손을 드시는 게 나와 미국인 청년, 영국인 두 커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스페인어를 하시거나 이해하시는 것 같네 그래. 자신의 나라 스페인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오늘따라 신이 난 산드라는 빠른 스페인어로 거침없이 투어를 이어간다.

 근데 오늘 뭔가가 좀 다르네? 지지난주에 들었던 투어보다 훨씬 많은 장소에 멈춰서 설명을 해줬고, 설명해 주는 양도 긴 게 아마 투어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스페니쉬일 경우 질문들에 대답도 해가며 더 깊은 이야기들을 전달해 줄 수 있어 그런 것 같았다. 지난번 투어에는 이동하는 시간과 자유 시간을 제외하고 설명해 주는 시간만 따지면 한 15분 남짓이었단 말이지. 그런데 오늘은 30분을 거뜬히 넘기는 게 정말 다양한 내용들을 소개해주더라고. 이 좋은 투어를 언젠가는 최소한 영어로라도, 가능하다면 한국어로 들을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조금 아쉽다. 그래도 대성당 지붕 위에 올라가는 경험은 두 번째 하는 거여도 참 특별하고, 탑에 올라가 내려다보는 산티아고의 전경이 아름다우니 이것만으로도 난 만족하겠어. 2주일간의 산티아고에서의 생활과 순례자 사무실 자원봉사의 모든 시간을 정리해 보는 마지막 날의 세레모니로 참 잘 고른 선택이었다.


꽃밭에서 당근 케이크를 먹을 수 있는 카페
Costa Vella Café의 당근케이크

 

 산티아고 대성당 지붕 투어를 끝내고 눈여겨보던 카페 Costa Vella Café로 브런치를 하러 가본다. 이게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내 마지막 카페가 되겠구나 생각이 드는 게 오늘은 무엇을 하더라도 다 나의 마지막이 되는 경험들일테라 기분이 이상하다. 신기하건 요상하게 즐겁다는 느낌. 마지막인 모든 것들 : 먹는 거, 구경하는 거, 자원봉사 하는 거, 순례길을 걸어가는 거 이 모든 게 다 즐겁고 감사한 느낌이다. 평소라면 마지막은 늘 아쉽고 좀 슬프고 그런 감이 없진 않은데 내가 2주일간 이곳에서의 매일 매 순간을 정말 즐겼기 때문에 행복하기만 한 이 느낌이 낯설 정도였다. 그리고 뭔가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지 않은 그런 느낌이 드는 게 자원봉사를 하는 내내 이 일이 참 즐거웠고 의미 깊었고 멀지 않은 시일에 다시 돌아올 것만 같다. 다행이야 마지막 날까지 즐겁다니! 슬픈 거보다는 훨씬 낫고 말고.

 Costa Vella Café는 도시 안의 발코니 느낌이 난다고, 정원에 꽃과 나무가 한가득이라 앉아있는 것 자체가 힐링이라고 해서 찾아간 곳이었다. 실제로도 색색가지의 꽃과 나무들이 너무 잘 어우러져 있었고, 그 안에 자리 잡고 커피 한잔 할 수 있는 설정이 꼭 온실에 있는 기분이라 평온한 게 마음에 들었다. 당근케이크가 또 기가 막히게 맛있다고 해서 시켜보고, 카페콘레체에 에스프레소 샷하나 추가해 달라고 했더니만 카페콘레체와 에스프레소를 따로 가져다주셨구먼 그래. 당근케이크는 정말 너무 맛있는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는데 스페인 물가치고는 정말 아주 많이 비싼 4.6유로(한화 6800원). 가격치고  너무 얇게 잘라 나와서 아주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푸릇한 식물들을 보며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격을 감안하고로도 다시 갈 의향은 있었던 곳. 적어도 이런 컨셉의 카페를 시티 안에서 찾을 수도 없을 것 같고 일단 케이크가 아주 맛있었으니 그런 면에서 오늘의 브런치도 성공!


디와 니콜라의 선물
우리집 장식장에 자리잡은 디와 니콜라의 선물 필그람 도자기와 디의 집에 있는 필그람 도자기

 

 어제 나를 픽업해 주시고 숙소까지 데려다주신 착한 E언니가 오전 근무를 하고 계시기에 언니를 뵐 겸 30분 일찍 사무실에 갔다. 옆 테이블에 앉아 일을 해가며 이런저런 마지막 대화들을 나누는데 언니는 언제 봬도 교회 언니처럼 편한 느낌이 너무 좋다.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시는 언니를 보내는 게 아쉽긴 했지만 잠시라도 만나 인사라도 할 수 있어 다행이었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보내드린다. 이런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해야지 그럼! 언니를 보내고 여느 날과 다름없이 오늘은 어떤 순례자분들이 오실까 궁금한 마음 가득 안고 본격적인 순례자 사무실 일정을 시작해 보려던 찰나였다. 오전 근무를 마친 내 동기 디가 나를 부른다.

 “ㅇㅇ야, 잠깐 저기 정원으로 나와봐. 나랑 니콜라가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뭔 일이지 하고 나가보니 디와 니콜라가 둘이 함께 작은 선물을 준비했다며 내 손에 쇼핑백을 하나 쥐어준다.

”네 생각이 나서 준비했어, 이거 내 집에도 똑같은 거 하나 있으니 이제 우린 같은 걸 가지고 있는 거야. “

  디가 말을 이어가는데 난 벌써 눈물이 난다. 이곳 순례자 사무실에서 보낸 이주는 정말 좋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서로 존중과 사랑을 주고받으며 행복하기만 했거든. 힘든 일 하나 없고, 속상한 일 하나 없고 늘 좋은 기운을 받으며 순례자분들의 다양하고 멋진 이야기들에 귀 기울였던 게 전부였다. 매일 새로운 감동에 심장이 벅차고 행복하기만 했던 꿈같았던 시간들. 그런데 이렇게 내 선물까지 준비하다니 고맙다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순간이다. 행복합니다, 행운이었습니다. 이런 말들이 마음속에 가득 차오른다. 디와 니콜라와 함께 선물을 들고 사진을 찍은 뒤 저녁에 숙소에서 보기로 하고 내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제대로 업무를 시작하기도 전에 거하게 울어버렸지만 좋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이런 류의 느낌은 늘 가슴 벅차오르는 따뜻함을 주는 것 같다. 이제 정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자 사무실에서의 자원봉사가 마지막이란 게 슬슬 실감 나기 시작하는 것 같다.


5개월의 산티아고 순례길로 대신한 신혼여행
5권의 크레덴시알, 순례자 여권

 

 오늘 방문했던 순례자들 중에 가장 흥미로웠던 커플은 단연 이탈리안 프란체스코와 독일인 안니카일 것이다. 순례길 위에서 만난 이 커플은 결혼 후 2024년 4월 4일부터 오늘까지 무려 5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순례길을 걸어 이곳에 도착했다는 사실!  이탈리아 풀리아 지방의 산타 마리아 디 레우카(레체)에서 그들만의 “신혼여행”을 시작해 마지막 프랑스 길을 통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는데 사용한 크레덴셜만 5개에 3900km를 걸어 내셨다. 도시들을 확인하면서 늘어놓은 이분들의 크레덴셜이 10미터는 돼 보이는 게 빡빡하게 채워진 순례길 도장 하나하나 마다 두 분의 신혼이야기가 담겨있을 생각을 하니 너무 로맨틱하다. 화려한 곳으로 여행을 가셨을 수도 있었고, 비싼 선물을 할 수도 있으셨을 거야. 근데 이분들은 길 위에서 서로를 더 알아가는 시간을 선택하셨다는 게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다. 나라면 절대 할 수 없을 것 같은 결단과, 남다르게 추구한 행복이랄까, 프란체스코와 안니카의 웃음은 너무나 행복해 보였고 닮아 있었다. 길 위에서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가며 더 닮아져 가는 걸까? 아니면 애초에 비슷한 두 분이 만나 같은 열정을 실행하신 걸까. 그 어떤 이유에서 시작한 산티아고 순례길이었다고 해도 두 분은 길 위에서 배우고, 생각하며 분명 함께 성장하셨을 거야. 서로의 한계도 마주하고, 의외의 장점을 발견해 감탄도 해보고, 서로의 부족함을 사랑하는 방법까지 부부로서 그 깊이가 남들과 다를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을 받았다.

 아 거참, 내가 이래서 우리 신랑이랑 꼭 한 번 산티아고를 걸어보고 싶은 거라고! 우리가 서로를 잘 안다고 해도 순례길이 주는 다양한 시련과 변화들에 함께 대응하면서 부부로써 더 깊어지고, 더 단단해지고 싶은 나의 마음이 프란체스코와 안니카의 웃음에서 답을 얻은 것 같았다. 이분들처럼 긴 시간은 아니더라도, 반드시 우리 신랑과 순례길을 걷고 말리라! 우리가 순례길을 마치고 순례자 사무실에서 콤포스텔라를 받을 때 지금 저분들이 짓는 편안한 웃음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진심으로 난 우리 신랑과 내 사이가 다른 커플들보다 매우 돈돈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순례길은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를 시험할 거고, 더 나은 우리 속의 우리를 찾아내게 해 줄 것 같은 아주 막연한 믿음이 있다. 무언가 말이야 걸으면서 지금도 사랑하는 신랑에게 한 번 더 심쿵하고 깊이 빠지는 그런 순간이 올 것 같단 말이야. 아, 우리 신랑이 갑자기 너무 보고 싶어 진다. 일단 오늘은 프란체스코와 안니카의 완주를 축하하자. 매일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그 기록 자체만으로도 정말 대단한 일이라 순례자 사무실에서도 이분들의 이야기를 공식 계정에 올리신다고 한다. 두 분이 나중에 함께 크레덴셜을 보며 하실 이야기가 얼마나 많으실지, 서로에 대해 깊은 확신을 결혼 선물로 주었을 산티아고 순례길은 그 누구의 화려한 신혼여행보다도 더 빛나고 값진 여행이 되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Ultreia et suseia 더 멀리 그리고 더 높이

 나의 산티아고 순례자 사무실 자원봉사자로서의 모든 일정이 끝났다. 함께 일했던 자원봉사자 분들과 직원분들과 함께 단체 사진을 찍으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사무실을 나온다. 자원봉사자를 관리하시는 몬세(나를 자원봉사로 선택해 주신 분이다.)는 내년에도 꼭 돌아오라고 기다리겠다며 나를 안아주셨다. 그리고 처음에 정말 차가워 보였던 루이스는 내 테이블에 다가와 “나도 콤포스텔라 줘!” 하면서 평소 하지도 않던 장난도 하고, 숫기 없던 파블로도 나와 웃으며 사진을 찍어주시는 등 모든 분들을 기억할 추억을 만든 날이었다. 난 늘 스페인 사람들도 이탈리안 못지않게 외향적이고 친근한 스타일의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와보고 의외로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 뭐야. 우리도 서울사람이랑 부산 사람의 결이 다르듯 아마 스페인도 지역마다 사람들 특성이 조금 다를 수도 있겠지만 여기 갈리시아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분들은 조금 경상도분들 같이 투박하지만 알고 보면 순진하고 따뜻하신 그런 분들이란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는 ‘저분이 날 좀 안 좋아하시나?’ 느낄 정도로 인사를 해도 딱히 반겨 받아주시는 것 같지도 않고 거리를 두는 차가운 느낌이었거든.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매일 부딪히며 웃어 드리면 이렇게 어느새 먼저 오셔서 장난을 치실 정도로 웃으며 살갑게 대해주신다. 알고 보니 처음에 내가 차가웠다고 생각하는 모든 분들이 실은 스마일 킹들이셨어! 이렇게 짧지만은 않은 시간 동안 이곳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것도 참 좋은 경험이었다. 스페인 사람들 의외로 친해지는데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는 거, 그래도 그 안에 정말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들을 가지고 계시다는 거 의외로 재밌는 발견이었다.


 마지막으로 순례길을 걸어 숙소로 돌아와 본다. 2주일간 매일 오가던 순례길이지만 순례자로 걸었던 소중한 길을 다시, 그것도 매일 걸을 수 있었다는 게 오늘도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오는 길에는 내일 이주만에 만날 신랑이 좋아하는 이베리코 하몽을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평소 좋아하는 거 분명한 나에 비해 뭐든 호불호가 크지 않은 우리 신랑이 유일하게 좋아한다고 말하고 찾아 먹는 게 바로 스페인의 이베리코 하몽이다. 나는 얘가 뭘 맛있게 먹는 것만 보면 세상 뿌듯하단 말이야. 내게 그늘을 만들어주는 아빠 같고, 사랑하는 아들 같고 동시에 제일 친한 남자친구에 내가 사모하는 남자가 하나에 합쳐져 있는 게 우리 신랑이라 이렇게 떨어져 있을 때면 많이 보고 싶어 진다. 드디어 내일 우리 신랑을 볼 생각에 설레는구먼.


숙소에 들어와 마주치는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처음에 가장 큰 도움을 받았던 사브리나에게도 마지막 인사를 전한다.

 “지금의 타오르는 불씨를 꺼지지 않게 잘 보관해 두길 바래. 네 인생,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며 언제나 마음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걸 잊지 마. 네가 보낸 이탈리아에서의 긴 시간들이 활짝 꽃을 피우기 위한 꼭 필요했던 겨울이었을 수도 있어. 무엇이든지 도전하고 다양한 곳에 씨앗을 뿌려두었으면 좋겠어.”  

 이곳에 도착한 첫날 함께 마트에 가며 가끔 내가 외국에서 멈춰있기만 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던 걸 기억하고는 마음이 담긴 조언을 해주는 사브리나. 이렇게 한 명 한 명 그저 고마운 사람들 밖에 없었기에 원래 단체 생활이 크게 내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내가 이곳에서 너무나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나 말이야… 단체 생활에 부담이 있어서 작년 순례길에 개인실 위주로 숙소비만 200만 원을 쓴 여자잖아. 물론 이곳에서 개인방을 쓰고 화장실과 부엌만 공용으로 쓰는 거였다고 해도 나름의 불편함들이 있기도 했거든. 그래도 자잘한 것들 감안하고도 정말 마음 편하게 생활했고, 오며 가며 나눴던 정말 다양한 국적의 다양한 나잇대의 분들과 나눴던 많은 대화들은 정말 소중했어. 우리는 자원봉사자를 떠나서 다 적어도 한 번의 순례길 경험이 있는 순례자라는 사실만으로도 형제애 같은 게 느껴지는 그런 사이었으니까 말이야.

 갈리시아 말로 순례자에게 응원을 담아 하는 말이 있다.

Ultreia et suseia  
더 멀리 그리고 더 높이

 

 오늘은 이곳 산티아고에서의 감동 깊었던 시간들을 돌아보며 이 경험을 통해 나와 스쳐 지나갔던 모든 분들의 밝은 미래를 응원하면서 마무리를 하고 싶다. 어디에 계시던지 무엇을 하시던지 행복과 평온이 함께 하시길, 그리고 더 멀리 더 높이 가실 수 있길 기원하겠습니다. Ultreia et suse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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