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네 번째 행선지
이리저리 캐리어를 끌고 호텔생활을 한지 한 달째
간절히 '정착'이라는 게 하고 싶어졌다
사실 정착에 있어서 밀라노는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하려고 했다
여기에 많은 한인들이 거주하며 이미 공유된 세계였기 때문이다
밀라노에 온 이유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이기에 인프라가 갖춰져 있어 편리함이 컸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다른 도시와 비교해도 월세가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결국 아무런 소속이 없는 나에게 뭐든지 가능성의 선택 폭이 넓은 곳이 유리했다
예를 들어 선택할 수 있는 집, 어학원, 일자리 수 라던지
외국인에게 특화된 영어가 지원되는 어플을 통해 방을 구했다
등록비, 수수료, 청소비에.. 부동산에서 이만큼 떼어가는 게 맞나 싶지만
모든 게 처음인 외국인 입장에서는 사기만 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탈리아와 우리나라의 원룸의 의미가 다르다
여기서 원룸이란 집에서 하나의 방을 뜻한다
한국 같은 원룸구조가 없고, 만약 있다면 불법개조를 한 거라고 한다
여긴 보증금이 월세의 1~3배인 반면에 다달이 내는 금액이 가격이 사악하다
그래서 대학생, 사회초년생은 대부분 집 하나를 나눠서 사용한다
내가 선택한 곳은 12명과 함께 지내는 쉐어하우스이다
처음에 쉐어하우스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모르는 사람과 한 집에서 지내야 하고, 특히나 혼성이라는 점이 아주 충격적이었다
단둘이서 지내는 거 아닌 이상 동성 쉐어하우스를 찾기 어려웠다
유교걸인 나는 용납할 수 없었지만, 결국 체념하고 문화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들어가 보니 우리나라 아파트 나눠 산다는 개념이랑 다르다
사감 선생님 없는 자유로운 작은 기숙사 느낌이랄까
당연한 건데 입주한 첫날 침구를 구매해야 했다
호텔생활이 길어지다 보니 베개와 이불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먼저 입주한 메이트에게 자취생에게 적합한 가게를 추천받아 침구를 구매했다
거실과 주방은 공용공간이다
방에만 있기 답답할 때 거실에 와서 기분을 전환한다
서양 특유의 개인주의가 있어서 의외로 불편하지 않다
내가 뭘 하던 남이 뭘 하던 신경 쓰지 않는다
각자의 할 일에 집중하기도 하며, 때로는 함께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그리고 나라별 식사시간이 달라서 주방 사용이 대체로 겹치지 않는다
나를 제외하고 모두들 서양에서 온 유학생이다
영국, 아일랜드, 포르투갈, 아프리카 등 국적이 다양하고 겹치지 않는다
당연히 이탈리아인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이건 조금 아쉽다
동양과 발음이 다른지 나와 상대방은 서로 발음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
그래도 이래저래 손짓몸짓을 하며 필요한 의사소통은 하고 있다
매일이 퀴즈쇼 하는 느낌이다, 상대방이 전달하고자 하는 말을 추측한다
막상 지내보니 잘 선택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쉐어하우스는 유럽에서 있는 특유의 문화니까
서로의 국가와 관습에 대해 알아가고 고정관념도 타파한다
이슬람교인 친구가 있는데 음식만 가릴 뿐 나머지는 우리와 똑같다
돼지고기를 안 먹으면 뭐 먹고살아? 했지만 대체할 음식은 많았다
닭, 소고기, 생선 등 타국에서 어떻게 요리하는지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이건 위험발언일 수 있으나 고정관념을 반성하게 되어 적어봤다)
GDP가 낮은 '가난, 후원'이 떠오르는 이미지의 나라에서 온 친구가 있다
세상 청결하고 정리정돈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매너도 갖추고 있어서 본받고 싶어졌다
상대적으로 따뜻한 나라에서 온 친구들은 여유 있고 웃음에 인심이 좋다
이제 정착해서 몸과 마음이 편해진 건지 예전보다 먹는 양이 늘었다
당분간 짐을 옮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든다
이렇게 부닻거리며 사니 밀라노에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도 외롭지 않다
사람 수가 많으니 언제 집에 들어와도 누군가는 꼭 있다
무언가 없을 때 서로 빌리는 재미도 있다, 자주 거래되는 품목은 '빵'
만약 내가 한국에서 의미하는 원룸에 살았으면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없었겠지
처음 만난 낯선 사람들 속에서 인간의 온기를 느끼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