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푸드의 기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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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브라(Bra)는 겉보기엔 조용하고 평화로운 전형적인 유럽의 시골 마을이다. 매년 가을이면 이곳은 미식가들의 발걸음으로 북적인다. 바로 슬로푸드(Slow Food) 운동의 발상지이자, 세계 최대의 치즈 축제 'Cheese'가 열리기 때문이다.
지역 각지에서 온 치즈 생산자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자랑스럽게 선보이고 있었다. 이 축제는 단순히 치즈를 사고 먹는 자리가 아니었다. 고유의 전통과 자연 속에서 천천히 만들어진 음식을 음미하는 공간이었다. 슬로푸드 운동의 철학을 몸소 느낄 수 있는 기회였다.
축제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만나 서로의 문화를 공유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치즈에 관련된 워크숍과 강연은 축제에 깊이를 더했다. 계절과 땅의 기운, 그리고 사람의 손길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언어는 달라도, 치즈를 향한 애정은 모두에게 공통된 관심사였다.
고르곤졸라 장인이 건넨 치즈는 색다른 맛이었다. 약간은 짭짤하고, 묵직하며, 어디선가 쿰쿰한 흙내음이었다. 낯선 블루 곰팡이가 어우러져 의외로 거부감 없이 편하게 먹을 수 있었다. 반면, 양젖 치즈인 페코리노는 야생동물 냄새가 먼저 다가와 주춤하게 되었다. 처음엔 조용하게 퍼지다가 곧이어 깊고 진한 농후함이 입안 가득 채웠다. 일부 치즈는 전통 방식대로 지푸라기나 나뭇잎으로 숙성되어 있었다. 독특한 숙성법 덕분에 마치 한적한 시골에서 풀향을 맡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치즈 축제를 떠난 후, 내게 남은 것은 단지 미각의 기억만은 아니었다. 슬로푸드의 메시지로 인해 먹는다는 행위가 얼마나 철학적인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이곳에서의 맛은 단순한 미각의 만족뿐 만 아니라, 누군가의 손길과 시간, 자연의 흐름이 녹아든 이야기였다. 브라에서 보낸 시간은 음식, 문화, 철학이 하나로 어우러진 진정한 감각의 축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