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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도 Oct 07. 2023

인스타그램과 구텐베르크

지금 나는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쓰고 있다. 그럼으로써 자라는 매체를 통해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려고 한다. 나는 책 읽기도 좋아하고, 글쓰기도 좋아한다. 아마 브런치스토리의 많은 작가들과 독자들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글을 이용한 의사소통 및 정보전달 행위는 우리 시대의 사양산업이다.


사람들은 갈수록 글을 읽지 않는다. 특히 길고 복잡한 내용이라면 더더욱. 해마다 문해력이 떨어지고 있다. 나 역시 점점 긴 글을 읽기 힘들다고 느낀다. 예전에는 짧게는 30분에서 길게는 한 시간씩 종이신문을 정독했는데, 지금은 온라인 뉴스로 중요한 내용만 슥슥 훑고 지나간다. 책을 읽을 때도 몇 장 넘어가지 않아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 곧 폰 화면으로 시선을 옮기고 만다.


글자를 밀어내고 주류가 된 매체는 이미지와 영상이다. 인스타그램, 핀터레스트, 텀블러와 같은 이미지 중심 SNS는 한 때 삽화나 참고사진으로서 글자의 보조 역할에 머물던 이미지를 주인공으로 끌어올렸다. SNS에서 사람들은 모자이크식으로 배열된 이미지를 위아래로 스크롤하고 확대하고 캡쳐하며 정보를 공유한다. 글자는 이미지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을 제공할 뿐이다.



문자가 주는 힘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따라오는 일반적인 답변은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생각할 수 있다'라는 점이다.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곧 어떤 외부의 현상 또는 자극에 본능적으로, 유전자에 각인된 대로 즉각 반응하지 않고 이를 잠시 억누른 상태에서 세분화하고 분석하여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행위를 도출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인간 역시 본래 동물과 마찬가지로 '생각없이' 오랜 세월동안 몸 속에 저장되고 유전된 반응체계만을 가지고 있었으나, 문자를 발명하고 문명을 일으키면서 즉각적인 반응을 미루고 생각 후에 행동하는 힘을 점차 키우게 되었다.


마셜 맥루언은 <미디어의 이해>에서 문자를 통해 인간은 외부 현상과 거리를 둘 수 있게 되었고, 이를 통해 사건에 직접 관여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문자 이전에는 눈 앞에 닥친 불 앞에 어쩔 줄 모르고 날뛰기 바빴다면 이제는 강 건너 불을 구경하듯 원인을 분석하고 대응방안을 준비할 여유를 갖게 된 셈이다. 이 힘을 이용해 최초의 문명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문명의 최정상에 위치한 지배층은 문자를 독점하며 '생각없이' 사는 구전 문화의 집단 또는 하층민들을 지배할 수 있었다.


"우리는 말을 할 때 그때그때 일어나는 모든 상황들에 반응을 보인다. 심지어 자신이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이야기를 한다는 행위 그 자체에 대해서도 음조나 동작 등에서 반응이 나타난다. 그러나 글쓰기는 대개 고립되고 전문화된 행위이기 때문에 반응을 보여야 할 필요도 없고, 또 그럴 만한 기회도 거의 없다. 문자 문화를 가진 사람이나 사회는, 무(無) 문자 문화의 감정 개입이나 정서 개입 없이 행동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발전시킨다."


문자의 힘이 폭발적으로 커지기 시작한 때는, 15세기 중반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기술이 등장한 시기이다. 이전까지는 한 권의 책을 만드는 데 많은 자원이 필요했기에 사회의 일부 지배층, 주로 학자나 성직자들만 글을 읽고 쓰면서 문자 생활을 향유했고 나머지 일반인들은 대부분 구술 문화 속에 머물며 체계적인 지식이나 사상을 습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인쇄기술이 등장하여 저렴한 비용으로 대량의 출판이 가능해지면서 비로소 보통 사람들도 책을 읽고 생각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배경을 바탕으로 근대사회에서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와 인권 사상이 싹을 틔웠고, 경제적으로는 개인의 재산권을 기본으로 삼는 자본주의가 발달하였으며, 관찰과 실험을 통해 새로운 기술을 탄생시키는 과학적 사고방식이 보편화되었다. 이제 문명과 문명 속 개인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고 개척하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오랜 세월 자연의 변화무쌍한 변화와 특정 지배층의 변덕스러운 횡포에 영문도 모른 채 질질 끌려다니던 사람들이 이제 "왜" 질문하고 "아니오" 외치면서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고 본인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미지의 시대


그러나 구텐베르크의 인쇄혁명 이후 약 400년이 지난 19세기 중반, 루이 다게르에 의해 카메라가 발명되면서 이미지가 문자를 대체할 새로운 매체로 급부상하게 된다. 물론 구전 문화에서도, 문자 문화에서도 이미지는 존재했다. 역사 이전 시대부터 사람들은 동굴에 벽화를 그렸고, 종이와 성당 유리창 등 그림을 그리기 좋은 위치라면 어디든 이미지를 생성해왔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많은 시간을 요하는 번거로운 행위였기에 말이나 글자처럼 보편적으로 사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를 카메라 기술의 발전으로 점차 해결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사진 한 장을 찍는데 몇 시간씩 노출시간이 필요했고, 장비도 비싸면서 무겁고, 화질도 흐릿해서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점차 흐르고 기술이 향상되면서, 훨씬 싸고 휴대하기 편리한 카메라로 매우 선명한 화질의 이미지를 수백 수천장 찍을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디지털 카메라와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진 뿐만 아니라 영상도 쉽게 촬영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이 때 발맞춰 등장한 이미지 중심 SNS는 세계 곳곳에서 촬영된 예쁘고 재밌고 너무나 생생한 나머지 실제처럼 느껴지는 이미지들을 빠르게 공유하고 전달하며 우리 생활에 이미지 문화를 확산시켰다.


문제는 마치 만질 수 있을 것 같이 생생한 이미지와 영상이 문자처럼 거리두기, 객관화, 비관여를 통한 분석 가능성의 힘을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사람들을 상황 속에 몰입시켜 감정적이면서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낸다는 점이다. 이미지 문화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이제 다시 생각하지 않게 된다. 복잡하고 어려운 논리 또는 사상과는 이제 이별이다. 예쁘냐 안예쁘냐, 좋으냐 싫으냐, 재밌냐 지루하냐, 우리 편이냐 적이냐 사람들에게 세상은 점차 단순해지고 그냥 느낌대로, 하고 싶은대로 다시 전처럼 본능이 시키는대로 행동하는 삶으로 돌아가게 된다.


"촉각적인 지각 양식은 폭발적이기는 하지만, 전문화적이지는 않다. 그것은 전체적이고 공감각적이며, 모든 감각을 참여시킨다. 모자이크적인 텔레비전 영상에 젖어 있기 때문에 텔레비전 어린이는 문자 문화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정신을 가지고 세계와 만난다."



 GPT, 글을 대신 써주는 AI


막강한 이미지의 부상에 이어 문자 문화 그 자체에 대한 공격도 매섭게 진행된다.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고 믿어왔던 논리적이고 창의적인 글쓰기 분야에 AI가 침투하기 시작했다. 챗 GPT를 활용하면 순식간에 법률과 의학 등 전문적인 지식 분야의 논문을 쓸 수도 있고, 특정 산업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는 보고서도 뚝딱 생성이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신문사설과 소설, 에세이 등 인간의 감정과 문맥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요하는 글도 시간이 갈수록 사람이 쓴 내용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진화하고 있다. (언젠가는 브런치스토리에 챗 GPT가 쓴 작품이 인기글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글쓰기를 배우는 데 인간은 얼마나 비효율적인가. 우리는 유치원에 들어가면서부터 한 글자씩 읽고 쓰는 법을 배우기 시작해서 10년 이상 읽고 쓰기를 반복하며 엄청난 시간을 들여야 겨우 문자 생활이라는 걸 좀 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전문분야의 글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며, 그들은 남들의 몇 배 이상 시간과 노력을 추가로 투입해야만 한다. 그런데 챗 GPT는 이를 너무나 손쉽게 뛰어넘어 버린다. 월 이용료만 내면 누구나 챗 GPT를 활용하여 남들이 수십 년간 쌓은 실력과 비슷한 수준(나중에는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의 글을 쓸 수 있다.


이미지는 쉽고 재밌고 직관적이며 단순한 반면, 문자는 어렵고 복잡하고 습득하는 데 시간도 오래 걸린다. 게다가 AI를 활용한 글쓰기가 범용화되면서 굳이 글쓰기를 잘해야 할 필요성도 줄어들고 있다. 아무리 봐도 문자 문화는 승산이 없어보인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이는 사람들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때 인쇄혁명을 통해 개인이 주권을 가져왔던 시대는 이제 저물고, AI가 주도하는 질서에 다시 주권을 양도하고 이에 순순히 따르는 태도를 가져야하지 않을까. 이미지의 홍수 속에 파묻혀 생각없이 살면서, 외모를 꾸미고 챌린지에 열심히 참여하는 등 남들의 시선을 끄는 방법을 찾는 데 더 많은 정성 것이 지금 시대에 정말로 맞는 삶의 방식 아닐까.



그래도 나는 글을 읽고 쓴다


어떤 지역의 산업공동화를 취재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한 때 밝은 미래를 꿈꾸며 몰려든 젊은 노동자들로 바글거렸던 기계 장비 공장이 이제는 노후한 외부 구조물만 남아 쓸쓸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예전에 이 공장에서 17년 간 근무했다는 한 노동자는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예전의 번성했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 시절 정답이었고 미래였던 산업은 이제 사양산업이 되어 역사의 뒷편으로 밀려났고, IT와 같은 최첨단 산업이 새롭게 떠올라 중심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


지하철을 탔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SNS 또는 유튜브, 웹툰 등 이미지와 영상을 보고 있고 나만 책(그것도 종이책)을 읽고 있을 때면 사양산업의 노동자와 비슷한 기분이 든다. 이제 인간을 대신해서 AI가 대신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며, 글도 더 예쁘고 깔끔하게 잘 써줄텐데 왜 나는 계속 글을 읽고 쓰고 있는걸까. '나는 남들과 달라'하는 식의 자존심 부리기일까. 아니면 인쇄혁명 이후 수 백년 간 지속된 계몽의 시기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고 헛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나름의 이유를 들자면 그냥 좋으니까.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시대 흐름을 외면하는 것도 아니고. 어려서부터 함께 했던 절친 같은 존재가 글이라서 그렇다. 외롭고 고민이 많을 때 이미 같은 경험을 했던 사람이 쓴 글을 읽으면 위로를 받아 마음이 편안해지고, 이렇게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밖으로 내놓을 때는 뭔가 배출의 쾌감이 있다. 설사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행위라고 할지라도 글을 읽고 쓰는 게 행복하면 그 자체로 된 것 아닌가. 그래서 언젠가 나보다 더 정확하게 내 마음을 표현하는 글을 AI가 대신 써주는 날이 온다고 할지라도 나는 계속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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