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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도 Oct 11. 2023

네이버지도와 천일야화

예전에는 여행지를 정할 때 국내보다는 해외를 우선적으로 염두에 두고 계획을 잡는 일이 많았다. 전국 어딜가나 비슷비슷하고 딱히 재미도 없고, 반면 해외에 나가면 날씨와 풍경, 사람, 건물 등 모든 게 새롭고 흥미진진하니 말이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국내 여행이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겉으로 봤을 때 뭔가 크게 달라진 건 없는데, 왜 갑자기 이럴까. 나이가 들어 새로움 보다는 익숙한 것에 더 편안함을 느끼게 되어서일까.


생각해보니 그 사이 변한 게 하나 있다. 네이버지도와 카카오맵 등 지도 앱 서비스가 출시되고 보편화되면서 생활에 필수적인 서비스로 자리잡았다. 지도 앱으로 검색만 하면 서울 시내 곳곳 뿐만 아니라 교외 지역, 그리고 지방 도시에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식당, 카페, 공원, 쇼핑몰 등이 즐비하다. 휴일에 어디 놀러갈 곳 없나 하고 장소들을 하나씩 클릭하다보면, 이미 방문했던 사람들이 찍은 사진을 보고 그들이 남겨놓은 리뷰를 읽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지도', '맵'이라고는 하지만 모험기, 견문록의 기능도 같이 맡고 있는 것 같다. 덕분에 예전 같았으면 밍밍하고 무미건조하여 눈길도 안 주었을 지역들이 오색찬란하고 생기넘치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그래서 주말이나 쉬는 날에 가벼운 차림으로 스마트폰 하나 들고 여기저기 도장 깨기를 하러 다니게 된다. 식사는 여기 식당에서, 식사 후 커피는 여기 카페에서, 다음엔 여기 공원에서 산책하는 식이다. 비용도 안 비싸고, 시간도 별로 안 들이면서 가볍게 기분전환을 할 수 있어 좋다. 또 방문하고 싶었던 장소들의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가는 묘미가 있다.



이동을 부추기 스토리


한 곳에 정착해 사는 사람들은 루틴에 따라 살아간다. 농부는 절기의 흐름대로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수확하고, 공부하는 학생은 시험기간과 방학 일정에 맞춰 학습 진도를 나가며, 공무원은 매월 처리해야 하는 업무와 진행해야 하는 행사를 중심으로 정해진 일을 수행한다. 생활은 안정되어 있고 크게 달라지는 변화는 없으며, 그저 때에 맞게 해야할 일을 하면 되는 삶이다.


오랜 세월을 거쳐 형성된 반복적인 리듬과 규칙적인 생활 속에서 안정된 인생을 사는 정착민들은 좀처럼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지 않는다. 이미 익숙해진 흐름에서 벗어나 새로운 패턴을 형성하는 일이 쉽지 않고, 또 두렵기 때문이다. 귀찮기도 하다. 이러한 두려움과 귀찮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어딘가로 가고 싶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특별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인간의 호기심과 상상력, 욕망, 즐거움, 쾌감을 자극할 수 있는 스토리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한 스토리의 대표격인 <천일야화>는 8세기에 이집트부터 아랍,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아바스 왕조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동서양의 길목에 위치해 상업과 무역으로 번성한 아바스 왕조에서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동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물자가 풍부한 지역에서 모자란 지역으로, 인재가 넘쳐나는 장소에서 부족한 장소로 옮겨다녀야 영토 곳곳에 피가 돌고 전체 왕국이 고르게 발전하며 역동성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이동을 부추기는 스토리 문화가 발달하였고 이를 집대성한 작품이 <천일야화>이다.


<천일야화> 속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대부분 상인, 선원, 모험가 등으로 세계 여러 지역을 옮겨다니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여행 중에 이들은 악당과 괴물, 자연재해와 마주치고 음모와 함정에 빠져 죽을 고비를 넘기지만, 한편으로는 온갖 화려한 보석과 비단 옷, 궁전, 요정과 미녀를 얻어 부귀영화를 누린다. '너희들이 이래도 여행 안하고 배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매 이야기마다 꿈 같이 환상적인 신세계가 묘사되고 금과 보물, 진귀한 보석이 쉴 새 없이 등장해 독자의 혼을 빼놓는다.


"섬의 수도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들이 에워싸고 있는, 섬 중앙의 아주 훌륭한 계곡 끝에 자리하고 있어. 바다를 3일 동안 항해해야 보이는 곳이지. 루비와 여러 가지 광물들이 풍부하고, 바위들은 대부분 깎고 닦아서 보석을 만들 수 있는 금속성의 돌들로 되어 있지. 그곳에서는 희귀한 식물과 나무들이 자라는데, 특히 삼나무와 코코넛 나무가 자라고 있어. 그곳의 큰 강 입구에는 진주조개 채취장이 있고 계곡에서는 다이아몬드를 캘 수 있어."


이런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누구라도 여행자가 되어 모험을 떠나고 싶어진다. 손에 땀을 쥐는 흥미진진한 사건을 직접 겪어보고, 또 그 결과물로 엄청난 부와 쾌락을 즐길 수 있다고 유혹하니 말이다. 그 결과 아바스 왕조는 물자와 사람들의 이동성을 향상시킬 수 있었고, 경제적 풍요와 함께 이슬람 문명의 황금기를 구가하였다. 같은 이유로 근대 제국주의 시대에는 <걸리버 여행기>, <보물섬>, <80일 간의 세계일주>가 있었고, 지금 우리 시대에는 <아바타>, <미션 임파서블>, 마블의 여러 히어로물이 있다. 시대가 달라도 본질은 같다. 사람들의 욕망과 상상력을 자극해 이동성을 증가시키고 경제의 순환을 활성화하는 촉매제 역할을 수행한다.



공간에 스토리를 더하다


우리 조부모님 세대는 시골에 살며 농사를 지었고 부모님 세대는 한 직장에서만 몇 십년 간 근무하다 퇴직하는 삶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세대는 도시화와 교통, 정보기술의 발달로 인해 어느 때보다 이동이 잦아진 시기를 살고 있다. 경제 구조가 수시로 바뀌고 산업과 기업의 생애주기가 짧아짐에 따라 자원과 인재의 이동이 쉽고 빨라야 할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사람들의 이동을 부추기는 스토리 역시 수요와 공급이 동시에 증가하게 된다.


종이 지도와 지도 앱의 가장 큰 차이점은 공간 정보 외에 이런 스토리를 담을 수 있는가의 여부이다. 종이 지도만 있어도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찾아갈 수는 있다. 좀 불편하고 느리긴 하겠지만. 그러나 종이 지도를 아무리 보아도 각 장소가 실제로 어떻게 생겼고, 가서 어떤 경험을 할 수 있고, 어떤 느낌을 얻을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반면 지도 앱에는 이미 그 장소를 방문했던 사람들이 남긴 온갖 사진과 글들로 가득해서, 가보기도 전에 실제로 방문하면 어떤 기분이겠구나 미리 상상하게 된다.


'동네 주민만 아는 찐 맛집', '내 인생 최고의 감자탕', '2시간 줄서서 겨우 먹었는데 기다린 시간이 하나도 아깝지 않은 맛이었어요'와 같은 리뷰를 읽고, 카페의 예쁜 인테리어를 배경으로 사람들이 찍은 사진들을 보고 있다보면 여기로 가고 싶다, 아니 가야겠다는 마음이 절로 솟아난다. 그리고 실제로 방문한 이후에 나의 경험과 느낌을 다시 리뷰로 남기면 그 장소가 더욱 특별해지고, 내 인생의 소중한 한 조각 추억으로 남게 되는 즐거움까지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또 다시 새로운 장소를 찾아나서게 되며, 선순환의 흐름을 타고 사람들의 이동성은 점점 더 증가한다.




낡고 숨겨진 장소의 재발견


공간에 스토리를 입히는 작업이 활발해지면서 한 가지 좋아진 점이 있다. 장소 선택의 다양성이 증가했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친구들과 만날 곳을 정할 때면 언제나 강남 아니면 신촌이었고, 가는 식당도 프랜차이즈를 고르는 경우가 많았다. 괜히 잘 모르는 장소에 갔다가 실패해서 그 날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남과 신촌에 있는 식당이라면 어지간한 퀄리티는 보장이 될테고, 게다가 프랜차이즈라면 이미 많은 사람들의 검증을 거쳤으니 실패할 확률도 그만큼 낮다.


하지만 지도 앱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을지로, 문래, 샤로수길 등 오래되어 발길이 뜸하던 골목에 '힙한' 식당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더니 인파가 몰려들었다. 이 식당들은 저마다의 독창적인 컨셉과 인테리어로 프랜차이즈의 식상함에 질려있던 사람들에게 신선함을 주었고, 동시에 음식의 퀄리티 또한 방문한 수많은 사람들의 리뷰 평가로 인증했다. 덕분에 사람들은 안심하고 낡은 골목의 숨겨진 식당에서 약속을 잡고 친구들을 만나 새로운 경험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맛과 서비스 외에 흥미로운 스토리가 식당 성공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았다. 이 식당은 다른 식당과 비교해 어떤 점에서 특별한가. 음식을 먹고 사진을 찍고 친구들과 시간을 보낼 때 어떤 경험과 느낌을 얻어갈 수 있는가. 이러한 스토리를 지도 앱 리뷰에 글과 이미지로 일관성 있고 풍부하게 담아낼 수 있어야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방문한다. 심지어 스토리가 너무 매력적이라면 전국 곳곳에서 먼길 마다앉고 찾아온다. 아무리 구석 귀퉁이에 숨어있다 할지라도.



스토리를 품은 공간


졸업한지 이제 꽤 되어서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나의 20대를 불태웠던 대학가를 방문할 때가 있다. 남들에게는 그저 여느 식당이고, 술집이겠지만 나에게는 너무 특별하고 소중한 장소들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곳에서 친구들과 웃고 울고 떠들며 희노애락으로 뒤덤벅된 추억들을 아주 많이 쌓았다. 식당에 들어가 천천히 밥을 먹고 있으면, 오래 전에 건너편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학생 시절의 내 모습과 그 때의 감정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공간은 스토리를 담기에 아주 좋은 그릇인 것 같다. 같은 장소여도 어떤 스토리를 품고 있는가에 따라 그 의미와 가치가 크게 달라지니까 말이다. 우리 바로 근처에 있지만, 미처 그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던 공간에 스토리를 조금만 더해주면 활짝 꽃을 피울 수 있는 장소가 얼마나 많을까. 지도 앱 덕분에 국내 곳곳에 매력적인 장소로 탈바꿈한 지역들이 늘어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앞으로 지역 사회 곳곳의 더 많은 장소들이 재발견되고 가꿔져서 사람들의 기억과 추억이 겹겹히 쌓인 풍성한 공간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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