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아이티백

또 다른 아버지들을 도우며 배워요.

6년차 커뮤니티 매니저, 롤리

by 아이티백
사업을 하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대단하다고 느낀 순간도 많았고 안쓰럽다고 느낀 순간도 많았던 것 같아요. 아빠 같은 사람들이 잘 성공하게 하는 환경과 원리를 좀 보고 그 사람들을 도와서 잘 되는 걸 보고 나면 나도 선업이 어느 정도 쌓였으니까 할 수 있겠지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제 오랜 취미가 명상하고 역학이에요. 역학을 보다 보면 IF라는 말을 잘 못하게 되는 게 그 일이 있기 위해서는 그 앞에 있는 퍼즐들이 다 필요한 경우가 많아요. 인생의 밑바닥 같은 경험도 그게 있었으니까 그다음에 원했던 곳이 오는 경우가 많아요.
차에 치일 뻔한 적이 있는데 제 앞에서 바로 멈추시더라고요. 안도감이 드는 순간에 그래도 내가 뭔가 의미 있는 성취는 해보고 싶었는데 그거 못해 보면 너무 아쉬웠을 것 같은데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수행, 성장, 사랑 이게 저한테 중요한 키워드인데 그걸 알고 있어서 이렇게 쓴 것 같아요.


아이티백 롤리님 모셨습니다.

반갑습니다.


자기소개 간단하게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커뮤니티를 통해서 세상을 여행하고 있는 수행자인 롤리라고 합니다. 초대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수행자라는 수식어는 처음인데요. 지금 어떤 일을 하고 계시죠?
제 본캐는 비영리 재단에서 창업가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고요. 돕는 방식이 굉장히 여러 가지인데 돈을 투자를 한다든지 아니면 그분들의 교육을 돕는다든지 여러 가지 방식이 있겠지만 저는 그들끼리의 연대감을 만들어 줘서 그들이 잘 무너지지 않도록 돕는 회복 탄력성과 관련된 커뮤니티를 만들고 최근에는 그분들의 성장을 좀 더 직접적으로 돕기 위한 그런 교육 기획도 하고 있습니다.

그들끼리라고 하시는 부분은 재단 안에 있는 회사들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제가 일하고 있는 아산나눔재단에서 마루 180, 360이라는 건물, 창업 정신이 살아 있을 수 있는 그런 건물들을 운영하고 있고요. 거기에 다양한 루트로 창업 프로그램들을 운영을 하면서 들어오시는 창업가들이 계세요. 그분들과 창업가와 함께 일하시는 또 다양한 스타트업 워커들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들을 하나의 커뮤니티로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일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는지부터 여쭤볼 수 있을까요?

2019년도 9월에 제가 입사를 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벌써 6년이 넘었어요. 첫 직장이고요. 정규직으로서 첫 직장이고 가장 컸던 동기는 저희 아버지였던 것 같아요. 저희 아버지가 지금으로부터 한 20년 전쯤에 언어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 베트남이라는 나라에서 사업을 하겠다고 가신 거예요. 그리고 지금까지 사업하고 계시거든요. 근데 저는 옆에서 보면서 제가 사실 주요한 이해관계자잖아요. 딸이니까. 엄청 중요한 이해관계자인데 왜냐하면 아버지의 사업이 행방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제 삶도 같이 춤췄기 때문에 근데 옆에서 사업을 하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대단하다고 느낀 순간도 많았고 안쓰럽다고 느낀 순간도 좀 많았던 것 같아요. 안쓰럽다고 느낀 순간은 대부분 좀 고립돼 보일 때 뭔가 도움을 받으면 금방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혼자서 다 해야 되니까 고립되어 보일 때. 그리고 또 하나는 저도 언젠가는 사회에 의미 있는 비즈니스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주는 그런 사업가가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는데 아버지보다 더 나은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자신이 있을 때 하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아빠 같은 사람들이 잘 성공하게 하는 환경과 원리를 좀 보고 그리고 그 사람들을 도와서 잘 되는 걸 보고 나면 나도 선업이 좀 어느 정도 쌓였으니까 이제 할 수 있겠지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사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아버지가 사업하시는 걸 보고 난 후에 든 거예요?

네. 원래 이전에는 그런 개념조차 없었던 것 같은데 아버지가 하는 사업이 무역업이었어요. 그래서 베트남에 있는 수산물을 한국의 소비자들한테 적절한 가격에 수출을 하시는 그런 일부터 시작하셨는데 굉장히 많은 사람들을 엮는 걸로 가치를 만드시더라고요. 그러니까 공장은 아버지 것이 아니지만 공장을 갖고 있는데 소비자를 못 찾는 사람, 그 사람을 찾아서 품질을 어느 정도 정확하게 잘 알고 관리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연결을 해가지고 그다음에 컨테이너선에 적재할 수 있는 사람을 또 만나서 그 뒤에 무역과 관련된 서류를 볼 수 있는 사람을 또 연결을 해서 그리고 이제 소비자를 찾아가지고 이걸 하나의 밸류체인으로 만드는 데 돈을 벌잖아요. 그런 게 되게 멋있다고 느끼긴 했어요.


하나의 플랫폼이시네요.
네, 인간 플랫폼인 거죠.

아버지가 사업에 대해서 되게 자세하게 알려주셨나 봐요.

지금 생각해도 아버지가 좀 재미있으셨던 분인 것 같은 게 진짜 제가 어렸거든요. 초등학생 진짜 아기였는데 저를 다 데리고 다니셨어요. 바이오 미팅 그다음에 공장 그다음에 수출하는 현장 밤새는 것도 같이 하고 그 당시 베트남은 굉장히 발전 중인 때였기 때문에 사회 인프라가 지방 가면 많이 없었어요. 근데 그냥 그런 도시에도 막 데리고 다니시고

아버지의 목적이 우리 딸이 혼자서 심심하니까 봐줄 사람이 없어서 내가 데리고 간 건지 아니면 미래의 사업가가 될 내 딸에게 이런 걸 좀 보여줘야지 해서 간 건지 궁금한데 물어본 적 있어요?

그냥 정말 계속 얘기를 하셨어요. 너 나중에 사업하려면 이런 거 알아야 된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랬던 것 같은데 그래서 돈을 어떻게 쓰는지 장부도 보여주시고 제가 어릴 때 혼자 컴퓨터로 뭘 만드는 걸 되게 좋아했는데 요즘으로 하면 프론트엔드 좋아했는데 그런 홈페이지 만드는 거 보시더니 회사 홈페이지 만들기 시키시고 그러면서 굉장히 사업을 한다는 거에 대해서 익숙해질 수 있는 좋은 환경이었던 것 같아요. 동시에 두려움도 많이 생기는 그런 환경이었어요. 아버지가 굉장히 믿던 어떤 공동 창업자급의 파트너한테 좋지 않은 일을 당하고 그 사업을 날리거나 아니면 납기일을 못 맞췄을 때 아찔한 순간이라든가 최선을 다해도 결국 손발이 되는 주는 파트너들이 기한 내에 못 맞추면 못하잖아요. 그런 모든 과정들에서 컨트롤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때 그리고 사실상 제가 봤을 때 아버지의 사업은 몇 번 이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횟수가 꽤 있었어요. 근데 그 과정에서 사람이 굉장히 힘들어지고 내 뜻대로 안 되면서 오는 분노와 우울들이 있잖아요. 그걸 감내하시는 걸 옆에서 보면서 저 무게를 내가 어른이 된다 해도 견딜 수가 있는 건가 이런 생각도 했던 것 같아요.

부모님들이 일터에서 어떤 일을 겪게 되는지를 잘 알지 못하잖아요. 근데 같이 데리고 다니시면서 봐라 그리고 배워라 하셨던 게 너무 신기한데 몇 살 때 정도부터 다니신 거예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다녔던 것 같아요. 제가 베트남에 초등학교 4학년 때 갔거든요. 근데 방학 때 데리고 다니시고 제가 좀 크고 중학생 되고 나서는 통역도 시키시고 근데 통역할 사람이 없어서라기보다는 통역사도 있는데 저한테 계속해서 바이어랑 직접 얘기할 기회를 주시고


초등학교 4학년 때 베트남에 가서 롤리님은 베트남어도 공부를 하고 나중에 아버지 사업하실 때 통역도 하고 그러면 베트남에 계속 남아 있어야지 왜 지금 여기 있는 거예요?
제가 중요한 인생의 몇 번 결정들을 제가 독단적으로 내리게 되는데요. 일단은 고등학교 들어가는 결정이었던 것 같은데, 그 당시에 제가 다녔던 학교의 선배들이 한국에 대학을 갔을 때 적응이 어렵다고 호소하는 선배들이 좀 계셨었어요.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교육 환경이 달라서 그랬을 수도 있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제가 있었던 학교는 그래도 좀 더 자유롭고 반 국제학교 성격이었어 가지고 좀 더 자발적인 수업, 수업도 그때 선택해서 듣는 그런 체제도 있었고 하다 보니까 또 아이들 숫자도 적고 교민 학교라서 그랬는지 그래서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였는데 한국의 입시는 굉장히 하시하잖아요. 전체 과정이 굉장히 어렵잖아요. 난이도가 높고 굉장히 오랫동안 시간을 고밀도로 투자해야 성과를 얻는 그런 시스템이다 보니까 막상 대학교 들어갔을 때 그런 시스템이 이미 익숙해진 동기들과 본인 사이에서 힘들어하는 모습들이 있었어요. 근데 아버지가 저한테 너무 도전 정신을 불어넣은 탓인지 어차피 매도 맞을 건 빨리 맞아야 된다 해가지고 고등학교 때 나는 한국에 가서 빡센 입시를 겪고 들어가겠다 해가지고 아버지 몰래 고등학교를 넣었고 됐습니다. 그래서 부산에 제가 또 전체 기숙사여야 되니까 부산에 있는 기숙사 학교 통 기숙사 학교가 된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한테 출국하기 한 달 전에 사실은 고등학교를 한국으로 넣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죠. 아버지랑 그래도 상의는 하고 커뮤니케이션을 좀 했어야 되지 않나. 한 달 전이라서 너무 갑작스러워서 너무 갑작스러워서 나는 너 여기서 고등학교도 다 나오고 그다음에 해외에 오래 지낸 친구들을 위한 전형이 있어요. 보통 그걸 위해서 또 준비를 하거든요. 근데 그 방식과 보통 해외 특례라고 저희가 불렀는데 특례랑 한국의 입시는 완전 다른 방식이라서 그걸 준비할 줄 알았는데 완전 다른 루트로 다시 처음부터 간다고 하니까 아버지 입장에서 좀 걱정도 되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근데 그래도 몇 마디 안 하시고 바로 보내주셨어요.

고등학교에 가서 일찍 매를 맞으니까 적응하는 데 어떠셨어요?

저도 적응을 못하겠다. 되게 힘들었어요. 교장 선생님이 굉장히 열의가 있는 선생님이셨고 입학식 날부터 야자를 12시 넘게까지 했어요. 그게 계속 이어졌고 3년 내내. 제가 부산 도시를 정말 애정하는데 그 시절로는 가고 싶지 않아요. 굉장히 하시한 트레이닝이었어요. 좋은 선생님들이 많이 계셨고 굉장히 좋은 친구들이 많았어 가지고 잘 버텼는데 쉽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재수 했을 때 좀 후회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근데 이 악물고 다시 해서 그래도 내가 원하는 목표를 이루고 나니까 또 그게 값진 거가 되더라고요.

다시 중3으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할 것 같아요?

제 오랜 취미가 명상하고 역학이에요. 근데 역학을 보다 보면 사실 IF라는 말을 잘 못하게 되는 게 그 일이 있기 위해서는 그 앞에 있는 퍼즐들이 다 필요한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좋고 나쁨이 사실 좀 없는 것 같거든요. 사실은 내가 생각했을 때 내 인생의 밑바닥 같은 그런 경험도 그게 있었으니까 그다음에 내가 원했던 곳이 오는 그런 경우가 많아가지고 저도 그런 경험이 되게 많이 있고 지금 아산나눔재단에서 일하기 전에 굉장히 긴 진로적 방황이 있었는데 그 시절이 되게 힘들었거든요. 사실 입시보다 더 힘들었어요. 근데 그게 있어서 지금 이 재단에서 되게 재미있게 일하고 있는 거라 또 좋고 나쁨을 얘기하기가 어려운 것처럼 그 시절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해야 되지 않을까

대학은 어떤 걸 전공했어요?
경영학과로 왔습니다. 사업? 경영이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몰라요. 사업에 그것만 필요한 게 아닌데 그때는 몰랐어요 그래서 경영학과를 갔는데 학문으로 접하는 경영은 사실 저한테 그렇게 와닿지 않았고 그때 철학학회랑 동아리 이런 활동을 했는데 너무 재미있었고 동아리 밴드를 했었거든요. 오히려 협업을 밴드를 통해서 많이 배운 것 같아요.

밴드에서 어떤 포지션을 하셨어요?
처음에는 피아노로 들어갔는데 나중에 보컬할 기회도 있었고 그다음에 공연을 책임을 맡고 끝까지 완수하는 그런 직책이 있어요. 제가 있던 동아리에서는 지도부장이라고 불렀거든요. 그 역할을 맡게 돼서 누군가가 도망가면 왜냐하면 이게 자발적인 동아리잖아요. 도망갈 수도 있죠. 도망가면 추노하고 추노로 안 되면 내가 땜빵하고 그래서 그 덕분에 아주 재미있는 악기들 많이 다뤄봤습니다. 베이스 체험도 해보고

지도부장은 어떤 사람들이 주로 맡아요?

순진한 친구. 그 동아리도 처음에 들어갈 때 선배들이 ‘너 피아노 칠 줄 안다며 들어가자’라고 하시길래 보통은 무슨 장르의 곡을 하는 그런 밴드다라고 소개를 해 주셔야 되는데 스토리가 잘 안 들리는 거예요. OO한 밴드래요. 앞이 잘 안 들리네. 네가 술 마셔서 그렇다 들어오면 안다 들어가 보니까 프렌치 팝 밴드인 거예요. 진짜 샹송을 부르는 거예요. 중앙 동아리에 매우 유서 깊은 밴드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 졸업하기 전쯤이었는데 저한테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었어요. 일단 하나는 창업가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그때 아주 몽글몽글하게 조금 있었던 것 같아요. 근데 돕는 방식이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그 당시에 저는 주변에 고시하는 분들이 많았어 가지고 그래서 행시를 보는 게 어떨까라고 진로에 대해서 막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고 또 한 가지는 그때부터 제 수행의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 같았는데 그전에도 저도 모르게 그냥 뭔가 명상을 하고 있거나 이런 적은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 돌아보면 어릴 때부터 근데 제가 어릴 때부터 꿈 같은 거를 꾸면 그게 한 3개월 2개월 뒤에 그대로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근데 이게 되게 어릴 때부터 시작이 됐어요. 예를 들면 진짜 아기 때 이제 외할머니 그냥 유치원생이었던 것 같은데 외할머니가 꿈에서 노란 강을 건너시는 거 본 거예요. 그래서 제가 어릴 때 일어나 가지고 그게 뭔지는 몰랐고 엄마한테 말씀을 드렸는데 엄마는 별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던 것 같아요. 제가 설명을 잘 못했던 것 같고 그다음 날 진짜 돌아가신 거예요. 나중에 보니까 동아시아권에서는 노란 강이라는 게 황천 그러니까 이 세계와 저 세계를 구분하는 강의 의미가 있더라고요. 근데 그건 되게 상징적인 꿈이잖아요. 외할머니의 뭔가 그런 마음 아픈 이별 이런 걸 미리 본 것도 좀 충격적이긴 했는데 사실 그걸 내가 하루 전에 꿈을 꿨다는 것도 너무 충격적인 거예요. 근데 그 뒤에도 제가 자전거 사고가 난 적이 한 번 있었는데 꿈에서 엄청난 오르막길에서 제가 신나게 내려오다가 두 바퀴를 구르고 살점이 떨어지는 걸 봤어요. 꿈에서 보고 잊어먹었거든요. 한참이 지나서 마침 그 시기에 이사를 간 친구네 놀러 갔는데 예쁜 자전거가 있는 거예요. 타고 싶죠 그래서 탔어요.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난 거예요. 근데 일이 일어날 때쯤 이거 내가 꿨던 건데 근데 이게 한두 번 일어난 게 아니고 계속 일어나니까 처음이야 재밌지만 나중에 되면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나는 체스 말 같은 건가? 그냥 녹화된 인생이 있고 그냥 그걸 재생하는 그러니까 환영 같은 건가? 주체성이 없는 건가?’라는 그런 생각이 엄청 드는 거예요. 근데 고등학교 때 그런 얘기를 주변에 좀 했는데 누가 내 착각일 수 있대요 생각해 보면 굉장히 심리학에 조예가 깊은 친구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건 뇌의 어떤 착시 효과일 수 있다. 착란 효과일 수 있다. 이런 얘기를 친구가 해줘가지고 그걸 이길 수 있는 게 기록이잖아요.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를 이제 진짜 해보고 확인을 해야 되는데 그건 그냥 가설이고 그래서 제가 그다음부터 꿈 일기를 썼어요. 근데 꿈을 꾸면 일어나서 그걸 바로 쓰고 다시 좀 잠들어 이렇게 하면서 수면의 질을 양보해 가면서 그 기록들을 쌓아나가는데 어느 날 고3 때 제가 학교에 기숙사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저는 학원을 다닌 적이 없는데 제가 학원에 있더라고요. 중앙에 있었어요. 그리고 저 입구 쪽에서 선생님이 스트라이프 티를 입고 있는 남자 선생님이 뽀글머리었는데 17차를 들고 막 흔들면서 앞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이게 무슨 상황이지 이렇게 봤는데 모든 수능 공부의 시작 기출 문제라고 하시더라고요. 근데 그 당시에는 별 생각 크게 안 하고 그냥 그걸 쓰고 잠들었는데 시간이 흘러서 제가 수능 1교시를 시원하게 말아 먹고 또 제 성격에 재수학원을 정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많은 요소들을 다 고려해가지고 엑셀 시트도 만들어 장학금, 거리, 통학 버스 비용 다 해서 진짜 합리적인 선택을 내려가지고 첫날 딱 가는데 그 학원이 너무 익숙한 거예요. 그래서 딱 꿈 일기를 폈는데 거기에서 스트라이프 입은 뽀글머리 수학 선생님께서 차를 들고 들어오시면서 수능 공부 시장 기출이라고 하시는데 약간 그때쯤 되니까 이건 확실하게 착란이 아니고 찰=ㄱ란이 아니라면 나는 이 문제를 안 풀면 인생을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좀 들었는데 주변에서는 빨리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수능 공부 재수생이었으니까 재수생이고 지금 숨 쉬는 이 시간에도 돈이 나가고 있다. 그리고 대학에 가면 그걸 질문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 만날 수도 있다라는 얘기를 해 주셔 가지고 그때부터 2학년 놀고 공부를 해서 수능을 잘 쳤습니다. 치고 딱 대학에 들어가는데 철학 수업도 제가 원하는 질문에 답은 사실 줄 수 없는 상황이었고 사실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제가 더 찾아봤으면 계셨을지 모르겠지만

보통 그럴 때 굿해야 된다고 그러지 않아요? 신내림 받으라는 말은 안 들었었어요?

그런 말은 듣지 않았고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다행히 그때 제 주변에는 그런 사람은 없었고 그냥 들었을 때 와 신기하다 왜 그럴까라고 같이 궁금증을 증폭시켜 주는 사람들만 있었어요. 저는 궁금한 건 알아야 되기 때문에 내가 직접 알아내자 해서 사실은 고시를 아까 제가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했었잖아요. 딱 고시촌에 들어갔는데 그 공부가 너무 재미가 없는 거예요. 왜 해야 되겠는지 모르겠는 그 공부를 할 만큼의 열정도 사실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시간은 근데 공부할 수 있는 환경 자체는 최적이잖아요. 그래서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한 15시간씩 책들을 봤는데 제가 알 수 있는 방식 그러니까 미래가 진짜 정해져 있고 나는 정말 자유 의지가 없는 건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답을 줄 수 있는 학문을 여러 개를 추렸는데 양자 역학 수업은 들어갔다 졸았고요. 청강을 들어가는데 도저히 못 알아듣겠더라고요. 그리고 미래학이라는 게 있었는데 그건 사실 미래에 어떤 변화가 올 테니까 비즈니스 기회를 어떻게 잡자라는 쪽에 인사이트를 뽑는 거에 더 가까웠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원하는 학문이 아니었고 그래서 결국 남은 게 종교학 그다음에 종교 그다음에 명리학 정도였던 것 같아요. 근데 저는 그 당시 종교가 없었기 때문에 명리학을 하자. 명리학을 배우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이 명리학의 여정이 시작된 것 같아요.

점집을 차릴 수도 있었는데 취업을 한 거잖아요. 취업을 한 계기가 있어요?

일단 명리학을 배우면서 한 6개월 동안 진짜 책을 달달달 다 외웠고요. 이게 어쨌든 태어난 그 시간의 정보만 가지고 태어난 시간과 공간의 정보만 가지고 이 사람이 어떤 성향을 가질 거다. 어떤 가족 환경을 가질 거다. 그다음에 어떤 사회적 환경을 선택할 거다. 그 어떤 확률이 높다. 그리고 어떤 시점에는 주로 이런 이런 일들이 일어나서 이런 생각 변화를 겪어야 된다. 이런 것들이 사실은 생년월일이라는 인풋 하나로 나온 아웃풋들이잖아요. 그러니까 이걸 되게 잘 풀면 앞으로 내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도 알 수 있을 거고 사실 더 궁금했던 건 이게 정말 맞다고 하면 이걸 깰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건가라는 생각도 좀 했었던 것 같아요. 근데 명리학을 계속하면서 일부의 아웃라이어들을 좀 발견을 했고 아웃라이어라고 함은 일어나야 되는 일들은 겪는데 마음은 굉장히 평온하고 괜찮아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보통은 희로애락에 따라 같이 희로애락을 하는데 뭔가 겪어야 될 일은 보는데 되게 괜찮아 보이네. 아무 타격이 없어 보이네. 근데 그분들이 적극적인 평온에 가까웠어요. 얘기를 좀 하다 보니까 그냥 주어지는 평온이 아니고 본인이 뭔가를 해서 그만큼의 상쇄를 시키니까 얻는 평온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분들을 쫓아다니면서 질문을 했어요. 당신은 왜 지금 괜찮냐 지금 2010년대 당신한테 엄청 고난의 시기인데 왜 당신은 멀쩡하냐 이런 거 물어보러 다니고

롤리님이 사주를 봐주다 보니까 이 사람은 지금 힘든 시기고 실제로도 힘든 일을 겪고 있는데 평온한 사람들을 몇몇을 발견을 했고 그래서 그분들에게 물어봤다는 거죠?

네 맞아요. 왜 그랬는지가 너무 궁금했어요. 뭔 차이가 있는 건지가. 근데 그때 만나서 제가 여쭤봤던 분들의 대다수가 자기가 명상하고 있다고 그래서 마음을 컨트롤하는 것에 뭔가가 있나 보다. 그래서 저도 그다음 날 바로 명상 학원에 등록하고 명상 학원을 다니기 시작하는데 마침 제가 처음으로 다닌 명상 학원도 지도하시는 선생님이 오랫동안 글을 쓰셨는데 제가 그 글을 보고 있다가 되게 괜찮다라고 생각했는데 이 명상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면서 인연이 시작됐는데 굉장히 초기 불교 그래서 부처님이 실제로 살아계셨을 때 했던 행법 그대로 수행을 하는 그런 전통을 유지하는 불교의 계열이 있어요. 초기 불교라고도 하고 근본 불교라고도 하는데 그쪽 계열로 수행하시는 선생님이었어요. 거기에 독특한 어떤 기법을 같이 접목을 해서 결국 방향을 불교 쪽으로 보시게 만들어준 선생님이었는데 그걸 보면서 사주를 제가 계속 배우고 있었다 보니까 그 과정에서 이 두 개가 합쳐지면서 많은 질문이 해소가 됐어요. ‘삶이 진짜 정해져 있는가?’ 범주는 있을지라도 그 범주 안에 있는 카테고리는 경우의 수가 굉장히 많아서 그걸 선택하는 건 내 주체성이다라는 결론을 내렸고 그리고 왜 생년월일시를 넣었는데 지금의 생이 나올까도 너무 궁금했는데 불교에서 까르마라는 업이라는 개념이 있거든요. 그게 어떤 정치적인 논리로 쓰인 인류의 역사도 있고 하지만 사실 되게 심플한 게 인과관계예요. 제가 생각했을 때 그냥 인과관계인데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이게 있다는 사람이 원인이 있다는 거라서 그래서 생년월일식을 가지고 이번 생을 알 수 있다면 이번 생이 있다는 건 전생이 있다는 거잖아요. 그런 것도 다 좀 해소가 되고

전생이 있나요?
저는 있다고 분명히 믿는 사람이에요.

계속 윤회를 거듭하다가 내가 모든 업을 다 덮는다고 하나 그러면 안 태어나는 거 맞아요?

부처님이 얘기하신 게 네 가지 진리가 있는데 그 얘기를 하고 있어요. 모든 고통은 집착, 애착. 이 애착과 집착이 고통을 만드는 원인인데 그것 때문에 생기는 거고 이 고통은 소멸될 수 있는데 이 원인이 없어지면 안 태어난다. 윤회의 여정이 끝이 난다. 그래서 이 여정을 끊은 수행자들을 가장 처음으로 자기가 배우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알아내서 끊은 존재를 우리는 부처라고 부르고 그다음에 부처님 이후의 방법론들을 알아서 이걸 끊은 사람들을 아라한이라고 부르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윤회라는 고리를 탈출한 거죠.

부처님은 처음 태어나서 그 고리를 끊고 다시 안 태어난 사람인 거예요?

저도 불교 공부를 하다 보니 안 건데 저희는 석가모니 부처님만 알잖아요. 이전에도 되게 많은 부처님들이 계시더라고

달라이 라마 같은 건가요?

좀 달라요. 왜냐하면 부처라는 개념을 제가 배울 때 정의를 찾아봤더니 한 우주에서 그래서 우주도 불교의 부처님이 깨닫고 나셔서 자기라는 제가 생각했을 땐 그래요. 아닐 수도 있는데 우리는 에고라는 어떤 관념이라는 거가 있잖아요. 그래서 자유롭지 않거든요. 근데 명확하게 보고 이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깨달은 자들은 이 에고라는 거에 더 이상 구애받지 않는 상태가 되는데 그러면 어디선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 이 정보를 보실 수 있는 것 같아요. 저를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들이나 저랑 같이 수행했던 사람들 중에 일부는 자기 의지로 이걸 볼 수 있는 사람이 좀 있었어요.


뭘 봐요?
자기 전생이라든가 아니면 남의 전생이라든가 등등 그런 것들이 있는데 부처님이 깨닫고 나서 역관, 순관 그래서 첫 순서대로 보고 거꾸로 보고 이 모든 고통이 시작된 원인과 그다음 결과부터 원인을 거꾸로 보고 바로 보고 이렇게 여러 번 하셨는데 그때 하셨던 말씀이 그 책에 남아 있거든요. 근데 제가 되게 인상 깊었던 게 우주도 생멸을 반복하는 거예요.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고 하는데 생겼다가 확장됐다가 줄어들고 다시 전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또 확장했다가 이걸 반복하니까 한 우주에 한 부처님이 있는 거예요. 부처님이 되게 여러 명 계시더라고요.

우리는 집착과 애착이 있어서 오늘 이 자리에 만난 사람들인 거네요.

어딘가에 분명 내가 갖고 있었던 에고의 관념과 그리고 이것을 내려놓지 못할 만큼의 어떤 애정, 애증 이런 것이 있었기 때문에 태어난 거라고 생각할 수 있죠.

인간으로 안 태어 날 수도 있는 건가요?

제가 알기로는 그런 것 같아요. 이게 티베트 불교 책도 몇 권 읽었는데 거기에 사자의 서라고 사람이 죽음 이후에 다시 육체를 얻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책이 있어요. 거기에 보면 제한이 없습니다.

그래도 생명을 가진 걸로는 태어나나요?

일단 제가 알고 있는 경우의 수 안에서는 그랬는데 뭐 그 이상이 있는지는 제가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물은 번식이라는 목적을 다 갖고 있잖아요. 그러면 거의 무조건 다시 태어나겠네요.

인간으로 태어나는 게 쉽지 않은 거라고 합니다. 엄청난 기회라고 하고요. 수행이라는 걸 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굉장히 진짜 그 확률을 비유하신 것도 있어요. 망망대해에 갑자기 어떤 나무 토막이 있는데 여기서 일단 확률이 확 줄죠. 근데 나무 토막이 있는 것도 이상한데 거기 안에 딱 거북이가 들어갈 만큼의 구멍이 뚫린 나무토막이어야 돼요. 일단 여기서 확률이 도대체 몇 퍼센트로 떨어지는지 모르겠는데 거기에 거북이가 잠깐 위에 숨 쉬러 올라왔다가 거기에 머리가 통하고 끼는 정도의 확률이라고. 그리고 아까 찌니님이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게 꼭 좋은 거예요?라고 하셨는데 사실 저도 처음에는 아니 인생이 이렇게 좋고 맛있는 거 나 좋아하는 사람들 많은데 안 태어나기를 위해서 이렇게 수행을 해야 돼라고 생각을 했던 적이 있거든요. 근데 어느 날 책을 읽다가 깨달았어요. 그리고 어느 순간 제가 몸이 되게 아플 때가 있었는데 태어났으니까 아프고 죽어야 되고 그 당시에 또 제가 상을 좀 갈 일이 있었는데 이별해야 되고 만나고 싶은 사람 못 만날 때의 고통도 있어야 되고 만나기 싫은 사람 만나는 고통도 느껴야 되고 원하는 거 다 가질 수 없고 그러니까 그런 것들의 고통에 사실 가장 큰 원인이란 태어남인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건강하고 행복하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태어난 것도 저는 되게 럭키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렇지 않은 사람 굉장히 많잖아요. 그러니까 사실 그렇게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도 엄청난 확률로 어려운 확률로 되는 건데 선업이 어느 정도 받쳐줘야 일어날 수 있는 거라고 한다면 그 안에서 이렇게 천차가 큰데 내가 언제고 이 고리를 끊지 않은 존재 중에 거의 대다수는 언제고 어느 때라도 아래 위 제한 없이 떨어질 수도 있는 거예요. 근본적인 걸 해결하는 건 결국 고리를 끊는 거구나 하지만 저는 오늘 또 맛있는 우동을 먹고 맛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명리학과 불교까지 공부를 하게 되고 나서 그 이후에 그럼 나는 이런 일을 해봐야겠다라고 어떤 식으로 생각의 흐름이 흘러가셨어요?

명상을 하는 과정 중에 제가 아버지에 대한 굉장한 분노가 있다는 걸 알아차렸어요. 전 아버지를 굉장히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살아왔고 사실 사랑하는데 굉장히 깊은 어떤 명상 상태 그러니까 제 감정에 집중할 수 있는 상태가 되니까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진짜 몸 어디에 있는지 모를 어떤 것에서부터 분출이 되는 거예요. 근데 한참 그렇게 계속 꺼내고 분노하다가 어느 순간 소강 상태가 돼서 진짜 명료해지면서 보기 시작했는데 제가 본 게 아니고 봐진 것 같아요. 그 상태에서 보였던 게 이 시나리오에서 나는 나를 100% 피해자 아빠를 100% 가해자로 상정하고 계속 보고 있네. 되게 이상하다.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저희 아버지를 보자면 우리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한 인간이기도 하잖아요. 내가 아빠였으면 더 잘했을 거야라는 그런 생각은 아빠도 동일한 조건이었으면 그랬을 수도 있는데 사실 저보다 아버지가 되게 힘들게 사셨거든요. 아버지가 저만큼 주변에 아주 좋은 사람들이 가득했던 것도 아니고 사람은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고 다 영향받으면서 배우는 그런 모든 것들이 갑자기 객관적으로 명료해 보이면서 내가 해석했던 게 틀렸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명상적 경험과 그다음에 제가 명리학적으로 제 어떤 사주를 분석을 했을 때 아버지와의 고리가 되게 강하게 보이긴 했어요. 그런데 그 아버지라는 글자가 재성이라고 해서 많은 돈, 커다란 돈의 무대를 뜻하기도 해가지고 결국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돕는 그런 제 커리어 초반이 보이긴 했거든요. 근데 그게 저는 고시 그러니까 공직자로서의 길일 줄 알았는데 그건 그냥 제 어떤 아주 좁은 소거법이었던 것뿐이고 사실은 되게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는 거잖아요. 다시 시작하자 그래서 그때쯤이 되니까 내가 사회에 나가서 실제로 경험해야만 채워지는 나의 질문에 대한 답 찾기 여정이 또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전에 궁금하던 거 내 인생은 그냥 리플레이 버튼만 누르면 되는 그런 녹화 넷플릭스냐 이런 거는 해결이 다 됐고 뭔가 인생을 의미 있게 살아가고자 하는 목표, 수행자로서 살지만 나는 전생의 수행이 부족했는지 사회생활을 다 포기하는 극단적 수행자는 아마 못 될 것 같고 이번 생에는 내가 사회에서도 그런 걸 할 수 있는 거를 같이 융합을 해서 사실 대다수가 다 사회생활을 하니까 그럼 이 사람들도 빠르게는 못 가더라도 느리게나마 안정적으로 이 두 가지를 병행하면서 같이 갈 수 있는 길도 찾아보자 약간 이런 생각도 있었어요. 사회생활을 해야겠다라고 생각을 했고 그때 처음 했던 게 해외 인턴이었어요. 그래서 무슨 농수산식품유통공사라는 우리나라에 공공기관이 있는데 거기서는 농수산식품 중소기업들의 수출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그때 인턴을 뽑아서 해외로 보내줘요. 마침 아버지가 저를 어릴 적에 부트 캠프로 데려가 주신 덕분에 인사만 할 줄 알았고 그게 되게 좋은 가산점을 받아가지고 베트남 인턴으로 갔고 거기서 마침 아버지 부트 캠프가 빛을 발해서 제가 첫 컨테이너 수출을 땄습니다. 한 3개월 정도의 기간 안에 그래서 거기서 최우수상을 탔어요. 그래서 기사가 나갔고 기사가 나가면서 재단이라는 곳에 오프닝을 보다가 지금 있는 재단은 창업가들을 돕는 일을 굉장히 진정성 있게 해 온 곳인데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돈 교육을 시키셨다 보니까 돈이 의사결정권하고 굉장히 중요하게 밀접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거든요. 근데 제가 있는 재단은 그걸 되게 독립적으로 할 수 있는 구조가 되어 있는 되게 흔치 않은 재단이었어요. 재단 중에서 여기를 유일하게 그냥 하나를 되게 가볍게 넣었는데 됐습니다. 면접은 물론 무겁게 봤어요. 감사하게도 기회가 주어졌고 그래서 이 일을 계속하고 있으면서 저도 성장하고 있어요. 작년까지만 해도 저는 저를 커뮤니티 매니저라고 소개를 했는데 이 직업이 되게 생소한 직업이더라고요. 잘 들어보기 힘든 그런 직업이었던 것 같은데 제가 생각하는 커뮤니티 매니저, 제 일은 한 공간에 있는 창업가들끼리 서로의 유대감과 그다음에 안전한 신뢰감 이런 것들을 쌓아서 힘든 일이 있을 때 서로를 의지하고 공유하면서 더 나은 방식을 꾸준히 찾아갈 수 있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고요. 그걸 위해서 이분들이 이 공간에 선발되면 나가야 되는 시기도 있어요. 빨리 성장하시고 또 새로운 초기 창업가들을 지원을 하는 거니까. 근데 이 여정 동안 경험하는 모든 활동들, 커뮤니티 활동들 처음에 들어왔을 때 오리엔테이션부터 나갈 때 졸업식까지 이 사이사이에 다른 팀들은 뭐 하는지 들을 수 있는 어떤 접점을 설계하고 그다음에 이들이 소통할 수 있는 상시 소통 채널을 만들고 중간중간마다 이분들이 각자의 시행착오를 나눌 수 있는 자리도 만들고 또 대표님들끼리만의 어떤 소속감도 되게 중요한데 그런 소속감을 만들 수 있는 자리도 만들고 이것들을 다 설계하는 일들이 사실 메인이었고요. 멋진 창업가들을 선발해서 교육하고 그다음에 데모데이. 사실 교육이라고 하는 건 저희가 감히 그분들을 교육할 수는 없고요. 그런 경험을 해보신 분들을 또 네트워크를 다 찾아서 그분들께 필요한 도움을 그때그때 연결해 드리면 성장을 지원하는 그리고 투자자도 연결하고 이런 여러 가지 일들을 좀 지금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한 공간에 있는 창업가들의 유대감과 안전한 신뢰감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냥 모아놓는다고 그게 생기는 건 아닌데 어떻게 유대감과 안전한 신뢰감을 만들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신경을 쓰고 계세요?

되게 여러 가지 장치들이 꾸준히 쌓여야지 생기는 게 그런 감정인 것 같고요. 그래서 그런 말을 오히려 자주 강조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이게 그런 의도 때문이라고, 인공적인 거라고 생각 안 하고요. 근데 다만 그거를 제한된 시간 내에 그래도 좀 더 도와드리기 위해서 그래서 잘 생길 수 있는 생장 환경을 잘 세팅하는 느낌에 가까운데
[오잉] 제가 정주영창업경진대회 저희 나가면서 마루에 같이 입주해 있었고 그때 롤리님을 처음 알게 됐거든요. 그때 그 혜택을 누린 사람 입장에서 말씀을 드리면 저는 아산나눔재단이 여러 가지 많은 물질적인 지원도 주시지만 거기에 구성원들이 정말 마음을 다해서 창업가들을 대한다는 걸 굉장히 많이 느꼈어요. 롤리님 말씀하신 다양한 프로그램들 이런 것도 있지만 그런 거는 다른 센터에도 분명히 있을 수 있거든요. 근데 그걸 지원해 주시는 분들이 그 마음이 느껴지잖아요. 언제, 어떤 시간,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얘기해도 내 일처럼 걱정해 주는 그거를 다 온전히 느낄 수 있어서 저는 그게 아산나눔재단이 가진 힘, 정주영 회장님의 어떤 레거시. 거기에도 항상 그냥 도와만 줘 이런 차원이 아니고 도전해, 도전 정신을 불러일으키는 키워드도 있고 그리고 그걸 해내기 위한 사람들을 돕는 물질부터 마음까지 A to Z가 다 있다. 저의 증언이었습니다.

[롤리] 저보다 설명을 더하시네요.
[오잉] 왜냐하면 한 사람은 그게 본인의 일과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감정이나 생각이 섞일 수 있는데 온전히 그 혜택을 받은 사람은 그냥 순수하게 제가 느낀 점만 얘기하면 되니까 저는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마루에 있을 때 좋았어요.
[롤리] 이런 창업자분들이 또 잘 성장하셔서 후배님들이 필요하시다면 도움을 선뜻 주세요. 이런 정신이 그 공간에서 계속 살아 숨 쉬면서 이어져 오는 어떤 에너지가 있는 것 같아요.

근데 여기는 추가로 하나가 더 있어요. 돈. 다른 지원 조직보다 돈이 좀 더 많은 것 같아요. 실제 그런가요?

처음에 조성을 할 때 6천억 정도의 기금 주식, 이런 저런 범 현대가에서 해 주신 자산이 있고 그 자산의 운용으로 계속해서 자발적으로 해 나갈 수 있는 기틀이 좀 있습니다. 근데 저희가 스타트업 분들한테 직접 투자를 하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까 힘들 때 밥 사달라고 할 수 있는 이웃집 삼촌, 이모 정도의 포지션을 가져가고 있는 거 같아요.

나는 VC 소개해 줬으면 좋겠어라고 하면은 찾아오는 능력이 있는 이모, 삼촌?
왜냐하면 그 이모가 VC 분들 출자를 하실 수 있으니까 네트워크가 있고 선별되어 있고 그다음에 좋은 창업가들을 알고 있고 좋은 VC들을 알고 있고 또 좋은 교육 파트너들 알고 있고 좋은 전문가들 알고 있고 또 이분들 사이에서 선순환이 되면서 생기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들이 있고 이걸 하나로 엮는 일종의 라우터 같은 개념인 것 같아요.

요즘 시간과 돈을 가장 많이 쓰고 있는 거를 심리과학대학원을 진학한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심리과학대학원을 이라는 전공을 선택하셨는지 여쭤보려고 했거든요. 근데 얘기 듣다 보니 자연스러운 수순 같아요. 근데 이 선택이 커리어와도 연관이 있는지는 조금 궁금해요.
명리학으로 어떤 대표님들의 말하기 되게 힘든 속내를 알게 되는 경우가 정말 많았는데 근데 그분들의 리텐션이라고 해야 되나요? 그게 꽤 좋아요. 그러니까 계속 오세요. 근데 그거를 어느 정도 좀 해결을 해 드리고 싶은 거예요. 심리적으로 힘들어하시는 뭔가를 나도 내 힘이 닿는 만큼 해결하고 싶은데 해서 만든 게 죽음에 대해서 얘기하는 모임이었어요. 죽음이라는 것이 사람들이 평소에는 안 죽는 것처럼 살지만 사실 우리 모두 다 지금 태어난 순간부터 다 죽어가고 있는 중이고 이 유한성이라는 게 삶을 해석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변수거든요. 그래서 이걸 폭력적이지 않은 안전한 방식으로 자기 속도에 맞춰서 받아들일 수 있는 맥락을 고민을 하다가 죽음과 관련된 경험, 그리고 상상했을 때 내 끝, 이런 것들을 하면서 유언장도 써보고 주변 사람들과 이런 경험도 나누고 어떤 영화도 보고 거기에 대해서 자기 생각도 정리하고 동시에 명상도 하는 그런 모임들을 몇 번 했었는데 하면서 생각이 드는 게 이게 효과가 분명히 있어요. 그리고 그 행사, 그 이벤트, 그 경험을 기반으로 자기의 인생에 되게 중요한 결정을 바꾸신 분들도 꽤 있어요. 근데 이게 왜 일어나는지를 제가 명리학처럼 풀 수 있을지 몰라도 다 풀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과학적으로 알면 제가 개선을 해 나갈 수 있는데 그걸 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탐구하는 방법을 사람들의 커먼센스가 합의된 영역이자 과학이니까 그 과학이라는 인과관계를 밝혀내는 방식으로도 좀 풀어보고 싶다. 이 관점, 저 관점 다 합쳐서 하나의 산을 만들고 싶다라는 생각이 있었고 그게 내 일에서도 좋은 프로그램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는 거고 그다음에 제 부캐에서도 그런 모임을 하거나 제가 만나는 사람들한테 줄 수 있는 걸 더 풍부하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들어갔어요.

10년 후 나의 멋진 하루를 이렇게 소설처럼 눈에 그려지게 써준 사람은 제가 그랬었거든요. 찾았다 내 동지. 나의 멋진 하루를 너무 멋있게 써주셨는데 GPT가 작성을 해 준 거군요?

네, 시켜봤습니다. 10년 후에 내가 어떻게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내가 그동안 알려준 내 일기랑 내 삶의 방향과 이런 걸 고려해서 써줘 볼래 이렇게 얘기했더니 이렇게 써주더라고요.

마음에 드셨어요?

그럴 법하다 생각이 들었어요.

제일 눈길을 끌었던 게 감사 기도를 올렸는데 오늘도 배웠고 나눴고 사랑했다. 이게 실제로 롤리님 생각하는 생각과 같아요?

제가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 가지 키워드가 있어요. 어느 순간 죽음을 경험하면 주마등이 흘러간다 하잖아요. 죽음을 앞둔 사람 앞에 제가 차에 치일 뻔한 적이 있는데 주마등이 딱 스쳐갔는데 결국 요약하면 수행해서 다행이다 제가 명상 학원을 갔다가 나오는 길에 그 일을 당할 뻔한거라서 마지막으로 한 게 명상이라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두 번째는 어제 엄마한테 사랑한다고 말했던가? 했구나 잘했다라는 생각이었고 세 번째는 제가 되게 사람들한테 이기적으로 구는 순간들도 있었거든요. 근데 그래도 더 많은 쪽은 뭘 주려고 했던 때라서 난 사람들이 되게 좋아하고 사랑하려는 사람이었나가 있었고 마침 그게 외제차였는지 외제차였어요. 포르쉐였거든요. 제 앞에서 바로 보고 멈추시더라고요. 그 차가 되게 제 인생의 스승 같은 거예요. 안도감이 드는 순간에 그래도 내가 뭔가 의미 있는 성취는 해보고 싶었는데 그거 못해 보면 너무 아쉬웠을 것 같은데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수행, 성장, 사랑 이게 되게 저한테 중요한 키워드인데 그걸 알고 있어서 이렇게 쓴 것 같아요.

오늘도 많은 걸 배우고 같이 롤리님의 인생을 나눴고 사랑하는 시간이었는데 하고 싶었는데 아직 못한 얘기 있으실까요?
성공과 실패는 길게 보면 사실 별로 그렇게 정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 안 하지만 그래도 단기간에 성공이나 실패라고 규정하는 경험들을 하시는 분들을 봤을 때는 그분들 하나하나도 너무 대단한데요. 그냥 되게 많은 인연의 집합인 것 같아요. 그래서 그냥 하루하루 만나는 분들의 존재에 감사하고 제가 지금 겪고 있는 이 건강, 젊음, 좋으신 분들과의 인연 이런 기회를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나중에 제가 또 이걸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CREDIT

오잉

인터뷰 오잉, 찌니, 써니


인터뷰 전문 듣기

EP74_롤리.pn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세상이 필요로 하는 교육에 관심이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