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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있을재수 May 06. 2023

관계하지 않음으로 관계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H선생님

세상이 맑아지겠지, 행운을 빌어


2023.04.07 ㅣ 개운해진 발걸음, 산책 경로를 벗어나다.


항생제를 같이 먹으면 안 되는 약이 종료됨에 몸살감기 약을 먹을 수 있게 되어서 먹고 잠들었더니 몸이 개운해진 듯하다. 아니면 하늘과의 조우 때문이었을까. 오늘은 산책 루트를 조금 벗어나 빌딩 사이로 걸었다. 망설이고 서성이었던 그곳의 화단 앞으로. H선생님과의 만남, 그 장소. 


도착해 화단에 앉아 쉬면서 떠올렸다. 쪼그라든 그날의 심장을.





30대의 방향성을 정하기 직전의 일이다. 


20대 모든 걸 이루지 못하고 이것저것 하고 싶은 건 없던 그날들에, 이번에는 하고 싶은 것보다 사람들이 적극 추천해 주던 걸 해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에 시작이 되었다. 나에겐 딱 한 가지, 여러 사람으로부터 꽤 오래전부터 해보라며 적극 권유받았던 게 있었다. 지금도 어디 가서 말하기 굉장히 남사스럽고 부끄럽지만 '작가'되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것도 아주 꼬맹이 시절부터. 


책을 굉장히 좋아했다. 집에는 책이 많았고 그 앞에 앉아 모든 책을 보았다. 한글을 모르던 시절엔 그림책으로 과학 잡지나 내셔널지오그래픽 잡지를 봤고 글을 깨우치면서 집에 있는 모든 전집을 읽었다. 전집도 종류가 다양했는데 역사, 철학, 인문, 연령별 서적 등 누군가의 전공 서적까지 다양한 책이 있었고 마치 활자 중독자처럼 모조리 다 읽고 또 읽었다. 나노 단위로 쪼개서 일을 할 때도 한 달에 최소 20권은 읽었으니 상당히 많은 책을 읽었으며 책을 읽지 못했던 날은 길 가다가 전단지라도 주워 읽곤 했다.


독서를 하지 못하게 되기 직전까지, 책은 늘 내 손에 있었다. 



그렇다. 그러면서 작가에 대한 동경은 살며시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책을 많이 읽는 거와 쓰는 건 다르지 않은가. 난 글을 써본 적이 없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일기도 몇 줄 쓰지 않았으며 그 이후로 한 줄 이상의 문장이 되는 글을 써본 일이 없는데 어떻게 이런 사람에 '작가'가 되는 걸 권유할 수 있을까. 신뢰하지 않았다. 그냥 하는 소리겠거니 했지만, 그 그냥 하는 사람의 수가 상당히 많았다. 성인이 돼서도 지속적으로. 잊을만하면.


가끔은 누가 알바를 고용해서 나에게 작가의 길을 가라고 좀 전해달라며 사람을 쓴 건 아닐까 싶을 만큼 아주 많은 사람들로부터 들었다. 해서 타당한 구석은 없지만 타인이 권유해 준 것이 내게 적성이 맞을지 누가 알까 싶어 '시나리오 작법' 학원 앞에서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고 또 망설이며, 읽는 자에서 읽고 쓰는 자가 되어 볼까 싶어 서성이었던, 지난날의 그곳에 왔다.




아..! 글쟁이들 모여 한 그룹을 만들었는데 '남녀노소'에 오합지졸이고 서로가 너무 잘나서 무서울 지경이다. 집에 갈까를 수없이 생각하며 첫 수업이 끝났다. 그때 키 큰 여자 A와 키 작은 여자 B가 다가왔다. 


"다다음 수업 때 시놉시스 제출해야 한다는데 언니 쓴 거 있어요?" A가 말했다.


아, 내가 언니구나 생각할 때 B가 말했다. "난 쓴 거 있긴 한데 엉망이야. 언니는 써놓은 거 있어?" 


아, B에도 내가 언니구나 생각할 때 둘이 같이 말했다.  "써 놓은 거 있냐고?"


시놉시스가 뭐냐고 묻고 싶은데 틈을 주지 않는다. 


"없어?"란 질문에 재빨리 대답했다. "응. 없어요"


그렇다. 난 시놉시스가 뭔지도 모르는 그저 주변 추천으로 한번 해보라 해서 적당한 학원 찾아서 그냥 온 건데 다들 뭔가를 잔뜩 써놓고는 무엇을 제출할지 고르고 있었다. 기초반 이랬는데 억울하다. 



시간이 흘러 시놉시스를 제출해야 하는 타이밍이 오고야 말았다. 고심했으나 고심의 흔적은 별로 보이지 않는 그저 그런 종이 쪼가리를 제출했고 시간이 흘러 피드백 시간이 왔다. 여러모로 다들 공모전에도 제출하고 써 놓은 것도 많아 이게 아니면 저걸 들이밀어 피드백을 받았다. H선생님으로 피드백이 굉장히 깔끔하고 직설적이며 관통적이다. 근데 그것이 나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릴 줄 알지 못했다. 


나의 피드백은 다음 시간으로 차례가 밀렸고 학원에 다니면서 그 무리 안에서 스토커가 생기는 바람에 불편한 생활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처음 글을 써 제출했는데 피드백이 궁금하다. 오늘은 내 피드백 순서다. 맨 뒷자리에서 숨죽이며 두근두근하고 있었는데 H선생님이 호통쳤다. 


"이거 누구 거야!? 이게 뭐야. 주인공만 있고 관계가 없잖아! 가져가."


H선생님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찰나가 영원이 되어 서로 흠칫했다. 

사람과 관계하지 않는 건 나의 깊은 속 나만이 아는 아킬레스건인데 '그 짧은 시놉으로 그걸 어떻게 안단 말인가'에 대한 H선생님의 눈은 투명했다. '잘 못 건드렸네' 그렇게 둘만 아는 그 영원에서 나왔을 땐 수업은 끝났고 그 후로 H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수업 외 어떠한 것도 따로 시간을 내어주지 않으셨다. 




"아니, 다른 반 사람들은 선생님이랑 수업 이후에도 시간을 갖는데 H선생님은 왜 그래?" A가 잔뜩 불만이다. 

"이번 워크숍에는 그래도 오시겠지?" B가 말했다. 


왜인지 난 알 것 같은 불편이 시작되었지만, 근거 없는 이야기로 중심이 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스토커로 인해 학원 생활은 불편 그 자체였으니. 


"난 안 갈래. 1박도 그렇고 스토커도 가고 선생님도 안 오시면 좀 그럴 것 같아" 내가 말했다. 

"안돼! 스토커는 최대한 막아줄게, 가자!" A, B가 동시에 말했다. 



그렇게 선생님도 오시지 않는 불편한 워크숍에 갔고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풀기도 전, 일은 벌어졌다. 

스토커가 바다로 직진해 들어가기 시작했고 한참을 들어가더니 자길 받아주지 않으면 죽겠다고 협박하기 시작했다. '그래, 빠져 죽어라' 하기에 날씨도 안 좋고 매우 많이 들어가 있어 이미 휘청이고 있는 거 같아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몇몇 사람들은 신고하고 있는 거 같고 별로 가깝지 않은 사람은 어서 나가보라 성화고 A와 B는 육두문자를 날리고 있어 정신이 없다. 그러는 와중에 창문을 통해 내다보니 H선생님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나 모습을 드러내셨다.


"이 XX야! 안 나와!?"


그래도 선생님은 무서웠던 건지 죽기는 싫었던 건지 스토커는 휘청휘청하면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H선생님은 스토커를 어떻게 처리하셨는지 알지 못하지만(쳐다보지 않음, 알려 하지 않음) 스토커를 제외 한 모든 학생을 불러 워크숍 해산을 알렸고 각자 헤어졌다. 그리고 H선생님은 자신의 차 앞좌석을 열고 내게 말했다.


"타"


그렇게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 정적을 깬 것은 H선생님이셨다. 


"관계가 있으면 이렇게 도움을 받기도 해" 그 말에 말이 없으니 이어서 말씀하셨다.


"타인이 때론 전부일 수도 있는 거야, 유의미하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지만, 표정으로 말한 것 같고 H선생님도 굳이 대답을 듣고자 하시는 말씀도 아닌 것 같았다. 아마도 이것이 학원의 마지막인 걸 알고 계신 듯하다. 


서울에 와서 내려주시면서 따라 내리시곤 차에 기대어 나에게 말씀하셨다.


"까발려진다 해도 어때? 세상이 맑아지겠지. 행운을 빌어"






글 앞에서 작가가 숨을 수 있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걸 알고 학원은 다니지 않게 되었으며 나의 글쓰기란 없어졌다. 다시는 생각조차 못 하게. 나만 살짝 보이는 곳으로 깊이깊이 숨겼다. 


그때 그 시놉시스 다음으로, 글쓰기를 해서 어제 브런치 스토리에 작가 신청을 했다. 학원 앞에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자니 걷고 싶어져 다시 공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언제 비가 왔었냐는 듯 맑게 갠 오후가 따사롭다. 한참을 걷고 걸으며 H선생님을 생각했다.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글에 담아 브런치에 신청했다며 살며시 마음속으로 알림을 보냈다. 그에 응답이 왔나 보다. 


'브런치 작가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로써 하늘과의 거래는 성사되었고 나의 필요가 시작되었다.







산책 8일 만에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라이킷 & 댓글 남겨주시면 기운이 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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