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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있을재수 Oct 09. 2023

뭡니까, 그날의 지금입니다.

(2부)  '자비로움'과 만나다. 



"또 어딜 가는데? 잠깐만 이야기 좀 해." 


A 일터에서 B 일터로 이동하려는데 문밖에서 남성이 기다리고 있었는지 붙잡는다. 관심도 없지만 어디서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도 모르겠다. 매섭게 뿌리치고 갈 길 가는 내 뒤에 대고 남성이 소리쳤다. 


"왜? 돈 안 벌어도 너희 집 잘 살잖아! 부모님한테 돈 달라고 해!"


저 버러지가 예(禮)도 없이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말하는 것도 귀찮아 따라오든 말든 뒀더니 무엇을 안다고 지껄이는지 모르겠다. 멈춰 섰다가 상대하기도 귀찮아 갈 길 가는데 어느새 내 앞을 막아선 이 남성은 선(線)도 없었다. 


"아니면 나 유학 갈 때 우리 부모님께 말해서 같이 간다고 하자!"


"비켜"  


힘이 어디서 샘솟아서 그렇게 힘차게 밀었을까. 남성은 뒤로 넘어졌고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그렇게 걷고 또 걸으면서 생각했다.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겠다고.





이미 학원에 나오지 않은 지 며칠이 지났고 그 사이 일자리를 다시 알아보고 다니는 중이다. 학원에 들러 마지막 정리를 하고자 찾았더니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안 될까. 선생님도 아무한테 제안하는 거 아니야. 가능성 있으니 해보자는 거지."


"다시 준비되면 올게요.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부분 어렵지, 쉽게 공부하는 사람 어딨어. 생각 다시 해보고 꼭 연락해."



학원에 있는 모든 물품을 빼서 걷고 또 걸었다. 이 물품을 둘 곳도 마땅히 없어서 이고 지어서 걷고 또 걸어 지구 끝까지 걸을 모양새로 또 그렇게 계속 걸었다. 화구통과 이젤, 화구박스, 작은 스케치북, 내 몸만 한 스케치북, 각종 도서, 뭐가 이렇게 많은지 무겁다. 그래도 걷고 걸었다. 



'왜! 돈을 왜 줬어? 왜! 그랬어!' 

'왜 없는 건데, 대체 널 위해 주는 부모는 왜 없는 건데! 왜!'

'어떻게 만든 기회인데 미친 거야!'

'정말 힘들었단 말이야.. 돌아가..'

'가서 도와달라고 해, 선생님이 도와준다잖아!

'제발.. 지금이라도 다시 가!'

'기회가 또 없으면 어떻게 할 건데!'

'다시.. 제발! 돌아가! 가란 말이야!'



이 아우성이 좀처럼 잦아들지 않아 걷고 또 걸었다. 쉬지 않고 소리치는 아우성에 단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걷고 또 걸었다. 아우성은 끝내 절규했고 모질게 외면했다. 한마디라도 말을 섞으면 당장이라도 학원으로 뛰어갈 것만 같았으니까. 그렇게 걷고 또 걷다 몸만 한 스케치북을 버리고 또 걷다 책을 버리고 화구박스를 버리고 또 걷다 이젤을 버리고 마지막으로 화구통까지 내 몸을 떠나면서 좀처럼 웃지 않는 사람으로 되돌아 와 있었다. 모질고 모질었던, 괜찮다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스스로 세뇌하던 그날의 지금이다. 





그래, 그날의 '지금'을 만났다. 


나 자신의 정직과 상대방과 얽힌 이율배반적인 상황이 맞닿을 때 자비보다 분노가 빠르다 했던가. 분노에 휩싸인 채 슬픔과 외로움, 절망을 겪고 욕구를 충족하지 못했던 그날의 지금,


극한 분노 속에서도 자비로워질 수 있다는 건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인내하거나 통달한 지혜가 자비와 더 어울리지 않나 생각했지만, 아니다. 


상대에 대한 분노의 소용돌이 속으로 깊이깊이 숨어 들어간 자신의 정직을 찾는 용기야말로 스스로를 도와서 자비롭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그날의 지금에 필요했던 건 정직으로 나아가는 용기일 테지. 맞다, 필요했다. 그 필요는 사랑으로부터 피어올라 필요를 대변할 테니.


자비로움에서 멀어지던 그 순간과 지금을 연결하기로 했다. 


모질게 굴어서 미안했다고. 단 한마디를 들어주지 않아 미안했다고. 그럼에 웃음이 없이 살게 해서 미안했다고. 그래야 무너지지 않고 걸어갈 힘이 있을 것만 같아서 그랬다고. 


정직함에 눈 감고 용기 내지 못함에 용서를 구했다. 







그렇게 바닥에 가만히 누워 온 세상 소리에 집중하려 했다. 그러면 태평양 너머의 소리까지도 들리는 듯했던 나날들이었다. 그럼 어느새 공간감이 사라지고 홀로 고요해진다. 그날도 그러했다. 스친들이 모두 출근했던 그 어느 날의 오전, 공감력을 잊고 소리에 귀 기울여 보니 



이내, 고요에서 만나 하고 읊조렸다. 

고요에서 만나, 너와 나는 우리가 될까. 또 우리가 되어 무엇으로 남을까. 



무엇을 또 놓쳤고 무엇을 그저 흐르게 두며 무엇을 반드시 들쳐 봐야 하는지, 기억의 끝맺음은 있는가 하는 의문까지 모두, 그 모두 '필요'로 가는 발걸음이길 바라면서 고요롭지 않은 고독(孤獨)으로 걸었다. 








우주 만물의 운영 법칙, 삼중(三重) 안에서 평안을 되찾으리라.









일단 독서를 한번 해보겠습니다'는 '일단 산책을 한번 해보겠습니다'의 2편입니다.

이어지는 글이니 혹시라도 산책 시리즈, 1편을 읽지 못하셨다면 먼저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iteuljaesu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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