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자비로움'과 만나다.
"또 어딜 가는데? 잠깐만 이야기 좀 해."
A 일터에서 B 일터로 이동하려는데 문밖에서 남성이 기다리고 있었는지 붙잡는다. 관심도 없지만 어디서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도 모르겠다. 매섭게 뿌리치고 갈 길 가는 내 뒤에 대고 남성이 소리쳤다.
"왜? 돈 안 벌어도 너희 집 잘 살잖아! 부모님한테 돈 달라고 해!"
저 버러지가 예(禮)도 없이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말하는 것도 귀찮아 따라오든 말든 뒀더니 무엇을 안다고 지껄이는지 모르겠다. 멈춰 섰다가 상대하기도 귀찮아 갈 길 가는데 어느새 내 앞을 막아선 이 남성은 선(線)도 없었다.
"아니면 나 유학 갈 때 우리 부모님께 말해서 같이 간다고 하자!"
"비켜"
힘이 어디서 샘솟아서 그렇게 힘차게 밀었을까. 남성은 뒤로 넘어졌고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그렇게 걷고 또 걸으면서 생각했다.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겠다고.
이미 학원에 나오지 않은 지 며칠이 지났고 그 사이 일자리를 다시 알아보고 다니는 중이다. 학원에 들러 마지막 정리를 하고자 찾았더니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안 될까. 선생님도 아무한테 제안하는 거 아니야. 가능성 있으니 해보자는 거지."
"다시 준비되면 올게요.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부분 어렵지, 쉽게 공부하는 사람 어딨어. 생각 다시 해보고 꼭 연락해."
학원에 있는 모든 물품을 빼서 걷고 또 걸었다. 이 물품을 둘 곳도 마땅히 없어서 이고 지어서 걷고 또 걸어 지구 끝까지 걸을 모양새로 또 그렇게 계속 걸었다. 화구통과 이젤, 화구박스, 작은 스케치북, 내 몸만 한 스케치북, 각종 도서, 뭐가 이렇게 많은지 무겁다. 그래도 걷고 걸었다.
'왜! 돈을 왜 줬어? 왜! 그랬어!'
'왜 없는 건데, 대체 널 위해 주는 부모는 왜 없는 건데! 왜!'
'어떻게 만든 기회인데 미친 거야!'
'정말 힘들었단 말이야.. 돌아가..'
'가서 도와달라고 해, 선생님이 도와준다잖아!
'제발.. 지금이라도 다시 가!'
'기회가 또 없으면 어떻게 할 건데!'
'다시.. 제발! 돌아가! 가란 말이야!'
이 아우성이 좀처럼 잦아들지 않아 걷고 또 걸었다. 쉬지 않고 소리치는 아우성에 단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걷고 또 걸었다. 아우성은 끝내 절규했고 모질게 외면했다. 한마디라도 말을 섞으면 당장이라도 학원으로 뛰어갈 것만 같았으니까. 그렇게 걷고 또 걷다 몸만 한 스케치북을 버리고 또 걷다 책을 버리고 화구박스를 버리고 또 걷다 이젤을 버리고 마지막으로 화구통까지 내 몸을 떠나면서 좀처럼 웃지 않는 사람으로 되돌아 와 있었다. 모질고 모질었던, 괜찮다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스스로 세뇌하던 그날의 지금이다.
그래, 그날의 '지금'을 만났다.
나 자신의 정직과 상대방과 얽힌 이율배반적인 상황이 맞닿을 때 자비보다 분노가 빠르다 했던가. 분노에 휩싸인 채 슬픔과 외로움, 절망을 겪고 욕구를 충족하지 못했던 그날의 지금,
극한 분노 속에서도 자비로워질 수 있다는 건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인내하거나 통달한 지혜가 자비와 더 어울리지 않나 생각했지만, 아니다.
상대에 대한 분노의 소용돌이 속으로 깊이깊이 숨어 들어간 자신의 정직을 찾는 용기야말로 스스로를 도와서 자비롭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그날의 지금에 필요했던 건 정직으로 나아가는 용기일 테지. 맞다, 필요했다. 그 필요는 사랑으로부터 피어올라 필요를 대변할 테니.
자비로움에서 멀어지던 그 순간과 지금을 연결하기로 했다.
모질게 굴어서 미안했다고. 단 한마디를 들어주지 않아 미안했다고. 그럼에 웃음이 없이 살게 해서 미안했다고. 그래야 무너지지 않고 걸어갈 힘이 있을 것만 같아서 그랬다고.
정직함에 눈 감고 용기 내지 못함에 용서를 구했다.
그렇게 바닥에 가만히 누워 온 세상 소리에 집중하려 했다. 그러면 태평양 너머의 소리까지도 들리는 듯했던 나날들이었다. 그럼 어느새 공간감이 사라지고 홀로 고요해진다. 그날도 그러했다. 스친들이 모두 출근했던 그 어느 날의 오전, 공감력을 잊고 소리에 귀 기울여 보니
이내, 고요에서 만나 하고 읊조렸다.
ㅡ
고요에서 만나, 너와 나는 우리가 될까. 또 우리가 되어 무엇으로 남을까.
무엇을 또 놓쳤고 무엇을 그저 흐르게 두며 무엇을 반드시 들쳐 봐야 하는지, 기억의 끝맺음은 있는가 하는 의문까지 모두, 그 모두 '필요'로 가는 발걸음이길 바라면서 고요롭지 않은 고독(孤獨)으로 걸었다.
일단 독서를 한번 해보겠습니다'는 '일단 산책을 한번 해보겠습니다'의 2편입니다.
이어지는 글이니 혹시라도 산책 시리즈, 1편을 읽지 못하셨다면 먼저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iteuljae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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