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좋아하는 사람은 일단 체력이 좋습니다.
회사에서 울어본 적 있는지?
나는 5년 간 직장 생활을 하면서 네다섯번 정도 있었다. 사람 없는 화장실에서,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에서, 때로는 팀장님이 옆방에 있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회의실에서(...) 엉엉 울었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히 떠오른다.
최근에 울었던 건 약 1년 전.사유는 편집할 양이 너무 많아서였다. 한 달 내내 주말과 휴일을 반납하고 쉼없이 영상 편집을 했는데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새벽 2시의 사무실에 앉아 멍하니 모니터를 쳐다보다가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편집은 왜 끝나질 많나, 나는 왜 이렇게 손이 느리나… 다 그만두고 싶은데 이미 절반 이상 작업한 상태고 방영일은 당장 며칠 뒤.
불 꺼진 사무실에서 청승맞게 훌쩍거리다가 문득 나의 현재위치가 등산으로 치면 '깔딱고개' 앞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마치 드라마 '나인'에서 시간여행을 하듯 눈 앞에서 사무실 풍경이 지워지고 지난주 올랐던 한라산의 가파른 계단지옥이 눈 앞에 펼쳐졌다.
신기하게도 모든 산이 만들어질 때 규칙이라도 있었는지, 산 정상 가기 전엔 '깔딱고개'가 꼭 있다. “여기서부터가 깔딱고개야.” “이 깔딱고개만 넘으면 정상이야.” 라기에 처음엔 깔딱고개라는 지명이 있는 줄 알았다. 나중에 깔딱고개의 뜻을 물어보니 숨이 깔딱깔딱 넘어갈 정도로 힘든 구간이라 해서 ‘깔딱고개’라 부른다고 한다. 깔딱고개는 등산을 하는동안 가장 힘든 구간이다.
‘조금만 더 가면 끝이야’ 스스로를 다독이며 올라왔더니 끝은 무슨, 지금껏 올라온 것보다 더 힘든 길이 끝이 보이지 않게 이어져있다. 깔딱고개를 마주하면 너무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이 나온다. 이미 허벅지는 터질 것처럼 욱신거리고 가방엔 누가 몰래 10kg 덤벨이라도 넣어놓았는지 물과 도시락만 들었는데도 너무 무거워서 온몸이 땅으로 꺼질 것 같다.
자기합리화의 달인 및 나 자신과 아주 쉽게 타협하는게 특기인 평소의 나라면 “어우 저는 못해요.” 손사레를 치며 당장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슬픈 사실은 깔딱고개 구간을 지나면 정상이 있다는 걸 내가 안다는 사실. 여기서 포기하고 하산한다면 두고두고 아쉬워할 내 모습이 안 봐도 뻔하다. 그러니 하는 수 없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모든 산엔 깔딱고개가 있었고 몇십 번의 깔딱고개를 넘으면서 단 한번도 힘들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쓰는 팁은 짧게 숨을 후! 하고 몰아쉬고선 힘차게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일종의 기합같은거랄까. 평소 오르막길을 오를 땐 천천히 숨을 들이마쉬고 내쉬면서 습습후후, 호흡이 너무 가빠지지 않게 조절을 하지만, 깔딱고개에선 한번에 힘을 끌어모으는 호흡을 한다. 마치 “으이차!” 괴성을 지르며 무시무시한 크기의 바벨을 들어올리는 역도 선수들처럼. 실제로 기합을 넣으면 무거운 무게를 드는데 도움이 된다고 PT샘이 알려주었다(나도 중량을 들면서 종종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성을 지른다). 깔딱고개를 오르는 나의 몸은 심적 무게론 100kg짜리이니 짧게 숨을 몰아쉬든 괴성을 지르든,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이 몸을 이끌고 올라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애써 넣은 기합도 몇 계단 오르다보면 금세 효력이 사라진다. 잠깐 멈춰 숨을 고른다. 너는 알고 있다. 깔딱고개를 단숨에 넘을 필요도 없고 차근차근 한 발 한 발 오르다 보면 곧 이 고통도 끝이 난다는 사실을. 무리할 필요 없이 쉬면서, 그러나 너무 자주 쉬면 더 오르기 힘들어지니 이를 꽉 깨물고 묵묵히 다리를 옮기는 것이다. 속으로 알고 있는 모든 욕을 뇌까리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하고 한탄하다, 아무 생각없이 기계적으로 다리를 옮기는 시점이 올 때쯤이면 정상이 뿅!하고 나타난다.
‘거봐 조금만 버티면 끝난다고 했잖아’ 깔딱고개에서 포기하지 않은 스스로와 찐하게 하이파이브를 한다. 정상석과 찍은 인증샷엔 내적 하이파이브로 잔뜩 상기된 얼굴이 담겨 있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혀 주는 시원한 바람, 정상에서 먹으려 가져온 맛있는 도시락, 온전히 내 힘으로 걸어 올라온 발 밑의 풍경들. 정상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달콤한 짜릿함을 이제 나는 안다.
다시 홀로 남은 어두운 사무실 모니터 앞. 운다고 깔딱고개를 대신 올라줄 사람은 없다. 배 아래에서부터 숨을 끌어 모아서 후! 하고 짧게 기합을 넣는다. 힘을 내야하니 열량을 보충해줄 초콜릿도 입 안에 까 넣는다. 다시 마우스를 잡고 끝없이 이어진 할 일을 차근차근 해치워간다. 알고 있다. 이 깔딱고개를 쉽게 오르는 방법 같은 건 없다는 것. 그저 견디면서 묵묵히, 스스로를 다독여 가며 올라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 길이 끝이 얼마나 달콤할 지도.
그렇게 여러 번의 깔딱고개를 넘기며 결국 포기하지 않고 프로그램을 완성할 수 있었다. 처음 영상이 유튜브에 실시간 최초 공개될 때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해냈다는 성취감이 손발 끝에서부터 짜릿하게 밀려왔다. 빡센 산을 타고 정상에 올랐을 때 느끼는 감정과 꼭 같았다. 등산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시간을 넘길 수 있었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등산으로 얻은 물리적인 체력, 근력과 지구력도 몇 달 간 지리한 편집을 지속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종종 일을 하면서 모두 놓아 버리고 싶은 순간이 찾아올 때 내가 깔딱고개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에베레스트 등산을 하고 있는 엄홍길 대장이다.. 여긴 히말라야 정상 전 깔딱고개다..라고 세번쯤 중얼거려 보자. 신기하게도 일이 잘 된다. 5년 차 무슨 일이든 대충하는 법이 없는 직장인의 꿀팁이다. 그러니 등산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일을 해야겠어, 안 해야겠어? 채용 담당자 여러분, 취미에 ‘등산’이 씌어 있는 신입사원은 일단 믿고 뽑으시는 겁니다. 뭘 맡겨도 해낼 사람들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