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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주연 Apr 10. 2021

산이 깝치지 말라고 말했다

계룡산 정복하러 갔다가 밤새 끙끙 앓은 썰

산과 사랑에 빠진지 두 달 차, 관악산, 인왕산, 청계산, 북한산... 매주 주말이면 서울에 유명하다는 산을 도장깨기하듯 돌아다녔다. 나의 등산 체력도 나날이 업그레이드되고 있었다. 등산 초반과 비교해 같은 거리를 올랐는데도 힘이 남았고 산 타는 속도 역시 웬만한 남자의 속도에 맞출만큼 빨라졌다.


 그때의 나는 체력을 곧 등산 실력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어느 산이든 다 데려와 봐! 내가 정복해 줄게! 라는 태도로 블랙야크 100대 명산, 국립공원 산 리스트 등 더 높은 산, 더 힘든 산을 찾았다(쓰면서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한마디로 성취감에 취해있던 것이다. 이제 서울 산은 시시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공주에 사는 친구가 계룡산에 가보자고 제안했다.



계룡산은 충남 공주에 있는 국립공원으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천황봉이 846.5m다. 계룡산은 주봉인 천황봉, 연천봉, 삼불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닭 볏을 쓴 용의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출처는 만능 네이버 지식백과)


계룡산은 하도 얘기를 많이 들어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계룡산 도사’라는 말이 있듯이 계룡산은 음기가 센 산이라 박수무당들이 계룡산 밑에 많이 산다고, 풍수지리적으로도 좋아서 조선 도읍지 후보지 중 하나였다는 등 요지는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산 중 하나라는 얘기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우리나라 4대 명산으로 꼽히는 이름난 명산인만큼 빡센 산이라는 후기를 읽었던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아무런 준비 없이 산을 올랐을까? 자만에 눈이 멀어, 어려우면 얼마나 어렵겠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계룡산의 주봉인 천황봉은 군사지역으로 현재 접근불가능하고 접근가능한 코스 중 가장 높은 곳은 766m인 관음봉이었다. 검색해보니 대부분 관음봉을 정상으로 잡고 코스를 안내하고 있었다. 신원사, 동학사, 갑사 등 관음봉까지 오르는 코스도 다양했는데, 초보에게 추천하는 갑사 코스로 오르기로 했다. 갑사에서 출발해 연천봉으로 올랐다가 금잔디고개로 하산해 원점회귀하는 코스였다.



11월 말의 계룡산은 겨울의 초입에 들어서고 있었다. 바닥엔 울긋불긋한 낙엽이 푹신하게 쌓여 있었다. 계룡산의 가을이 얼마나 화려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겨울이 다가오며 해도 짧아져 어느새 해가 느슨하고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계곡 길을 따라 걷는 속도를 높였다.


그런데 몸뚱이가 오늘따라 유난히 무거웠다. 너무 힘들어서 시간을 봤더니 고작 10분 지나있었다. 마음이 급했다. 이럴 때가 아니라고! 뛰어서 정상까지 가도 모자랄 판에 지치다니!


이유는 간단했다. 먹은 게 없으니 에너지가 있을리가. 다이어트를 하겠답시고 공복 상태에서 등산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등산화조차 없어서 겁없이 바닥이 매끈한 러닝화를 신고 갔으니 당연히 힘들 수 밖에.


진짜 길이 이랬다;


분명 초보코스라고 했는데 체감 난이도는 극상이었다. 등산로 안내도가 나올 때마다 다시 한번 코스를 확인했다. 내가 검정색 코스로 잘못 든 건 아니겠지? 그러나 확인할 때마다 현 위치는 의심할 일 없이 주황색 코스였다. (등산 안내도에 코스별 난이도를 색으로 표현하는데, 주황색은 보통, 빨간색은 힘듦, 검정색은 아주 힘든 코스를 뜻한다)


돌은 또 왜이렇게 많고 경사가 급한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사족보행으로 돌계단을 기다시피올랐다. 올라온 길을 돌아보니 돌들이 까마득하게 놓여있어서 함께 온 친구에게 "여기로 내려가는건 아니지? 올라오는 건 했어도 절대 못 내려가" 재차 확인했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그 계단은 다시 오를 수 있을까 싶다.


동행이 뒤에서 밀어주다시피해서 겨우 정상 근처에 도착했다. 시간은 계획했던 것보다 지체되어 있었지만 배가 너무 고파서 우선 싸온 김밥을 먹기로 했다. 김밥을 까먹고 나서야 알았다. 내게 필요한 건 탄수화물이었구나! 먹자마자 차에 기름을 넣은 것처럼 몸에 시동이 걸리고 피가 돌기 시작하는게 느껴졌다.



기세를 몰아 관음봉으로 내달렸다. 밥을 먹고 오르니 훨씬 수월했다. 금세 관음봉 비석이 보였다. 700미터에서 둘러보니 산자락이 360도로 눈에 들어왔다. 산자락이 겹겹이 포개어져 한 폭의 산수화를 그려내고 저 멀리선 오후의 햇살을 받아 금강이 반짝이고 있었다.



정상석 앞에서 인증샷을 찍고 발걸음을 옮겨 계룡산의 유명한 세 봉우리, 연천봉과 삼봉으로 향했다. 봉우리들은 좁다란 길로 능선을 따라 걸을 수 있게 길이 나 있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재미가 있어서 이 코스로 올라왔어도 재밌었겠다 싶었다. 봉우리를 따라 걷다보니 발 아래로 멋진 풍경이 계속 펼쳐졌다. 하늘도 엷은 분홍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세상에 정상에서 보는 노을이라니! 이건 찍어야해!!



아니 잠깐만, 정상에서 노을이라고? 하산 길만 해도 두시간이 더 걸리는데? 눈앞에 놓인 풍경은 파스텔톤 청춘 영화였지만 현실은 재난 영화였다. 분홍빛, 주황빛, 보랏빛으로 춤을 추던 하늘이 급속도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산길엔 가로등도 없었다. 처음엔 앞 사람이, 점차 내 손, 내 발조차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나싶어 내려가는 길마다 조난 번호를 체크했다. 등산화도 없는데 헤드랜턴이라고 있었을까. 휴대폰 랜턴을 켜고 한발한발 조심히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은 왜 그렇게 길던지.


그렇게 어둠속에서 한 시간을 넘게 걸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기어갔다. 한 발 한 발 미끄러질 새라 조심조심 옮겼다. 아스팔트 길이 보일 때 '살았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서야 긴장이 풀리고 허기와 함께 한기가 패딩을 뚫고 들어왔다.


따뜻한 한정식으로 배를 채우고 숙소에 들어가 욕조에 몸을 담갔다. 누군가에게 잘근잘근 밟힌 것처럼 온 몸이 아팠다. 근육통과 몸살이 함께 찾아왔던  것이다.독주를 마시면 근육통이 풀린다는 말을 듣고 화요를 사와 세 잔 정도 마시고서야(정말로 그러니까 괜찮아졌다)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밤새 열이 나고 몸살로 끙끙 앓았다.



계룡산에게 후들겨 맞고난 이후로 생긴 나만의 철칙 하나. 무슨 일이 있어도 공복으로 산에 가지 않을 것. 최상의 컨디션으로 산을 오르는 것이 등산을 즐기는데 훨씬 중요하고 남들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걸 온몸으로 경험했다. 계룡산 등산 이후론 등산을 하기 1~2시간 전에 탄수화물 위주의 식사를 충분히 하고 간다. 긴 산행이 예정되어 있다면 당이 떨어질 때마다 보충해 줄 탄수화물(=행동식)도 넉넉히 챙긴다.


또 하나, 자연 앞에서 자만하지 말 것. “산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다." "산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 어릴 때부터 아빠가 했던 말들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산에서는 자만하는 순간 다친다. 부상을 당하면 곧바로 응급처치가 불가능하니 아주 위험한 상황에 놓일 수 있다. 올 여름에도 낙뢰로 북한산에서 50대 한 분이 돌아가셨다는 뉴스를 보았다. 동네 뒷산처럼 오르는 산에서 누군가는 죽는다. 산은 겉보기엔 고요하고 아름답지만 아주 위험하고도 흉폭한 곳이기도 한 것이다.


대자연 앞에서 인간은 너무나 작고도 무력한 존재다. 이런 귀한 교훈을 다치지 않고도 피부로 깨달을 수 있어서 오히려 잘된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 정복하겠다는 오만 따윈 버리고 매 순간 산이 받아들여주는 것에 감사하고 오를 것. 산이시여 등린이를 오래오래 잘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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