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아 Aug 28. 2021

하고 싶은 일만 해도 될까

글 쓰는 마케터의 고민과 고집

가끔 내가 밥벌이를 하는 게 신기하다.

구체적으로는 '경영지원'이라는 단어를 발견할 때다. 취준생 때 대기업 경영지원 파트에 지원하면서 '경영에 도움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겠습니다' 따위를 써낸 게 그때마다 떠오른다.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경영지원이 무슨 일인지 전혀 몰랐던 시절이다.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경영학을 전공하지 않은 대학생이 자소서를 낼 수 있던 몇 안 되는 파트라 그냥 넣어본 거다. 당연히 떨어졌다. 그때 넣었던 대기업 서류 모조리.


다음 분기에 다시 도전해보자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과외로 생활비를 넉넉히 벌고 있었기에 '지금보다 많이 버는 회사를 가야지' 생각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돈보다도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볼까 싶었다. 몇 년째 취미로 에세이와 서평을 쓰던 시절이었다. 글 쓰는 일을 할 데가 없을까~ 두리번거리다 찾은 곳이 내가 처음으로 다닌 스타트업이었다. 장래에 대한 깊은 고민은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을 시켜준다기에 입사했다. 월급은 정말로 코딱지만 했다. 주말에 몰래 과외를 병행할 정도였다. 그러면서 대기업에 들어간 친구들과는 하나둘 자연스레 멀어졌다.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벽이 생겨서 아니었을까. 친구들은 부업으로 생활비를 보태야 하는 회사에 다니는 걸 이해하지 못했을 거고, 나는 매일 아침 출근하는 게 지옥 같다면서도 계속 다니는 친구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일이 싫어서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던 적은 없다. 운좋게 많은 배려를 받았다. 모르는 사람 대하는 게 힘들다, 숫자 보는 건 잘하지 못한다, 하기 싫은 일들은 다 잘라내고 콘텐츠 만들며 글만 썼다. 회사 이름을 걸고 나가는 모든 글에 내가 관여하는 게 재밌었다. 항상 사람이 부족한 회사를 다녔으니 일은 차고 넘쳤다. 혼자 일하는 마케터가 응당 해야 할 일들도 있었지만, 글을 쓰고 다듬는 것 이외의 일을 더 시킬 낌새가 보이면 미련없이 이직했다. 그건 내가 잘하는 일이 아닌데다 잘하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다섯 번째 회사에 자리잡은 지 벌써 반년이 지났다. 여기서는 정말로 글만 쓴다. 웹페이지부터 리플릿까지, 잘 차려진 기획에 글이 슬쩍 숟가락 얹는 형태라 힘들 게 없다. 업무 만족도가 최상이다. 그런데 이대로 괜찮은 걸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다. 내가 하는 일이 별것 아닌가 싶어서다. 마케팅이 중요한 조직에서 일하는 것, 실력 있는 마케터들이 이끄는 프로젝트에 함께하는 것 모두 여기가 처음이다. 전략을 세우고 실행하는 동료들이 멋져 보였다. 저렇게 큰 그림을 그리고 프로젝트 기획을 하는 것이야말로 회사에 필요한 일이 아닐까. 내가 하는 일은 그에 비하면 작아서 성과를 인정받기 어렵지 않을까. 더 성장하기에는 내 업무 자체의 한계가 있는 걸까. 그렇다고 기획까지 함께 하고 싶다는 건 절대 아닌데.


이런 고민을 하던 중에 동욱님이 커피 한 잔 하자고 일정을 잡으셨다. 내가 요즘 일을 잘 못했나, 혼자 걱정할 뻔했는데 아젠다는 없고 편하게 보자기에 안심했다.


비싼 커피를 얻어마시는데 동욱님이 물어봤다. 면접 본 이후로 이렇게 이야기 나누는 건 처음인데, 요즘 어떤 생각을 하며 지내고 있냐고. 잠깐 고민했다. 지금 하는 생각을 그대로 전하는 건 나에게 도움될 것이 없을 텐데. 좀 더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는 모습을 보여야 프로답지 않을까. 하지만 이 조직에 있는 동안 계속할 고민 같아서 그냥 털어놨다. 회사랑 핏이 잘 안 맞는 분이시네요, 라는 이야기를 들을 각오도 했다.


일단 동욱님의 첫마디는 '글을 쓰는 일도 기획하는 일과 동등하게 중요하다'였다. 여기저기서 듣던 익숙한 위로인가 싶었는데 그다음부터 내가 생각지 못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윤아님 면접을 봤을  함께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스스로 어떤 일을 좋아하고 잘하는지  알고 계셔서였어요. 글을 쓰는  전문성을 가지고 계신데 저희 회사에서도  역량이 필요하니까요. 그런데 만약에, 물론 나가시라고 드리는 말씀은 절대 아니고요, 윤아님이 지금 회사에 필요하다거나 해서 다양한 일을 이것저것 하시면 나중에 이직을 고려하실 때 그 장점이 사라질  같아요. 이력서를 살피는 입장에서는 '전문성 있게 일을 하시다가 길을 잃으셨네' 싶을  같고요."


전문성을 가지고 성장할수록 범위를 좁혀 잘하는 일에 집중하게 된다며, 넷플릭스 이야기를 해 주셨다. 넷플릭스에는 타이포그래피만 담당하는 디자이너가 있다고.


그 말을 듣고 짚이는 데가 있었다. 내가 글쓰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건 마케터가 나 혼자뿐인 회사에 오래 있어서였다. 다방면으로 쳐내야 할 마케팅 업무가 많은데 그깟 글이 뭐라고. 아 다르고 어 다른 걸 고민하는 게 뭐가 중요하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인데도 자조하곤 했다. 그럼에도 '글 쓰는 마케터'라며 프로필에 꼬박꼬박 써넣어온 건 내 고집이었다.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는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구매 전환을 일으킬 마케팅이 중요한 건 나도 알지만, 아 다르고 어 다른 섬세한 메시지로 고객의 마음을 잡을 사람이 필요하다면 그게 내가 되겠다고.


글 쓰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니까 주위에서 물어본다. 그럼 나중에 작가가 되고 싶은 거냐고. 일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땐 그랬던 것 같기도 한데, 이젠 확실히 아니다. 나는 전업 작가가 될 만큼 많은 이야기를 품은 사람이 아니다. 그보다는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좀 더 잘 읽히게 쓰고 다듬는 게 재밌다. 그 재밌는 것들이 너무 소소해 보여 그런 일만 해도 월급을 받을 수 있을까 의문이었지만.


내가 스타트업에 들어왔던 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서였다. 그럼 하고 싶은 일만 해도 충분한 곳에서 일하면 되는 거였다. 마케팅 규모가 작은 데만 다녀서 몰랐지, 그런 일들이 중요해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필요한 곳도 제법 있다는 걸.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데서 일하면 지금처럼 고집 부리며 월급 받을 수 있단 걸 알게 되니 내가 갈 길이 보였다.


쓰고 싶은 글을 더 잘 써야겠다. 회사로 돌아가는 길, 동욱님께 이런저런 프로젝트에 나를 끼워달라고 말씀드렸다. 마이크로카피에 대한 책을 주문했고, 집에 있는 UX/UI 책을 빨리 읽어봐야지 마음먹었다. 좋은 기회가 생겼을 때 놓치지 않도록 준비해둬야겠다. 좀 더 뻔뻔하게 하고 싶은 일만 할 거다. 대신 잘하면 되겠지.


커서 뭐 하지, 다 커서 고민하는 게 민망했는데.

그 덕에 좀 더 클 수 있을 것 같다. 오랜만에 설렌다.



* 제 글을 메일로 편하게 받고 싶으시다면? > https://bit.ly/yoona-work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