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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토록 Sep 25. 2023

카드 회사에서 전화가 오면

신용카드 만들기가 정말 쉬웠던 시절이 있다. 2000년대 초반, 당시에는 직업이 없어도 학생들도 카드를 쉽게  발급받을 수 있었다. 나의 첫 신용카드도 정말 순식간에 나왔다.


카드사에서 먼저 전화가 왔다. 카드 하나 만들라고. 바로 뚝딱! 그전까지는 아빠가 주신 가족 카드가 있었지만, 어학연수 때 “너무 많이 긁어” 들어오자마자 뺏기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처음으로 내 명의의 카드를 하나 갖게 된 것이다.


더 이상 아르바이트생도 아닌, 계약직도 아닌 정직원으로 입사했다. 엄연한 사회생활이 시작됐지만 100만 원도 채 되지 않는 월급. 수습 기간엔 50만 원. 그것마저 제때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니 카드는 매우 유용했다. 하지만 월급 받아 갚을 생각으로 미리 긁었던 카드 값을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이 왔다. 급기야 나는 카드 회사로부터 독촉 전화를 받기 시작했다.


순진했던 난 카드사에서 전화가 오고, 통화가 몇 번이고 계속되면 경찰서에 끌려가는 줄 알았다. 독촉 전화는 나를 극심한 공포로 몰고 들어갔다.     

 

“저, 아직 월급이 안 나와서요. 조금만 더 있다 내면 안 될까요?”     

숙제 안 해 혼나는 학생 마냥 카드사 직원의 전화를 받을 때면 쩔쩔맸다. 가뜩이나 돈 못 번다고, 공연계 일을 반대하던 부모님께 월급이 얼마나 되는지는 당연히 얘기할 수 없었다. 제때 지급이 안 되어 카드값도 못 내고 있는 상황은 더더욱.


그렇게 나는 입사 초기 살얼음판을 걷듯이 카드사로부터의 전화를 두려워하면서도 카드 사용을 멈출 수 없었다. 지방 공연을 갈 때 현장 진행비를 1원도 받지 못한 채 내 개인 카드로 배우·스태프 이동 경비를 쓰고, 밥값을 해결해야 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급기야 또 하나의 카드를 만들어 ‘돌려 막기’ 하던 나는 집으로 날라온 최고장을 엄마에게 들키고 말았다. 온갖 잔소리를 다 듣고 서야 밀린 카드값을 갚을 수 있었다. 세상 한심하고 미련한 딸자식으로 찍히는 순간이었다. 공연 끝나고 자정이 다 되어서야 퇴근해 잠만 겨우 자고 나오던 시절이니, 집에 온 우편물을 숨기고 뭐 할 여력이 내겐 없었다. 매번 전화로 압박하고 있으니 집으로까지 따로 우편물을 보낼지 누가 알았을까.


월급이 매달 ‘따박따박’ 들어와도 여유가 없는 형편. 그마저도 제때 받을 수 없던 시절이었으니 엄마가 대신 갚아주신 카드 빚은 한참이 지나서야 돌려드릴 수 있었다. 카드사에서 걸려오는 전화는 큰 두려움이었지만, 그때 카드가 없었다면 나는 입사 초기를 버티지 못했을 거다. 아니, 어쩌면 아닐지도...! 당시 내 카드 사용처의 대부분이 어린 연습생들 또는 같이 일하는 아르바이트생들에게 사준 치킨과 술값이었다. 내게 허세가 있었나 보다. 그런 미련한 짓을 참 많이도 했다. 내 앞가림도 잘 못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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