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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월급은 단돈 50만 원

by 이피디

누구에게나 입사 첫날은 설렘과 기대가 가득하다. 이제 본격적인 사회인이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레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출근시간은 10시였지만 나는 한 시간 일찍 도착했다. 4호선 혜화역에서 내려 마로니에 공원을 지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이곳이 내 나와바리군.”


그 시절의 마로니에 공원은 지금처럼 깔끔하게 조경이 정리되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모든 풍경이 반짝였다. “앞으로 내 인생은 이곳에서 펼쳐지겠구나.” 출근길은 가볍고,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그러나 사무실 문 앞에서 그 설렘은 첫 고비를 맞는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이상했다. 그제야 계단을 오르던 실장님이 나타났고, 나는 그날 회사에서 가장 먼저 출근한 직원이 되었다.


내 자리는 창가 쪽 텅 빈 책상이었다. 컴퓨터도 없고, 책꽂이도 없었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자리였다. 낯설고 어색한 공기 속에서 멀뚱히 앉아 있는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그때 나를 반겨준 사람은 세 살 어린 직원이었다. 나보다 한 달 먼저 입사한 '공채 1기' 선배. 사무실 대부분이 인맥으로 구성된 가운데, 그녀와 나는 소위 '공개 채용'으로 뽑힌 드문 케이스였다. 그녀는 내가 놓쳤던 작은 숨결들을 챙겨주었다. “아직 분위기가 좀 그렇죠? 조만간 정리될 거예요.” 말 한마디가 그렇게 따뜻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오후가 되어 겨우 공연 관련 자료 몇 개를 받았다. 내게 일을 인수인계할 사람도 없었고, 시킬 일도 뚜렷하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있는 것보단 낫겠지. 나는 파일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천천히 읽었다. 조금 뒤, 실장님이 계약서를 들고 오셨다. 휴일은 주 1회, 공연이 없는 월요일이었다. 주일에 교회를 가야 했기에 고민이 됐지만, 오후 출근이면 예배 참석은 가능하겠다 싶었다.

그리고 급여. 월 100만 원도 되지 않았다. 각오는 했지만, 마음이 무너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정직원인데도 인턴 때보다 적은 급여. 게다가 수습 기간 3개월 동안은 월 50만 원. 그 50만 원은 교통비와 점심, 휴대폰 요금으로 사라졌다. 다행히 식사는 회사에서 제공해줬다. 실장님도 눈치가 보였는지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하지만 협상의 여지는 없었다. 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돈이 목적이었다면, 애초에 이 바닥에 마음을 두지 않았겠지.”

“그래, 일단은 경험이다. 기회다. 돈은 나중 문제다.”

그땐 정말 그렇게 믿었다. 집에서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기에, 내 용돈이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몰랐다. 그 무렵 아빠 회사가 부도 위기였다는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가족은 집도 절도 잃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건, 그 수습 기간 50만 원조차 두 번째 달부터는 제때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 첫 달 급여는 ‘처음이라 챙겨준 것’이었고, 이후로는 한 달, 두 달 밀리기 시작했다. 회사엔 진짜로 돈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계획에도 없이 적금을 붓듯 회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만기일은 알 수 없었다. 그때의 나는 몰랐다. 그 월급이 내가 세상에 넣은 가장 값진 적금이었다는 것을. 적금처럼 조금씩 쌓여간 나의 경험은, 마치 한 푼 한 푼 모으는 것처럼 매일 작은 변화와 성장을 가져다주었다. 그 적금이 만기가 되어 돌려받을 날이 언제 올지 모르지만, 나는 그때마다 나를 돌아보며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한 달에 한 번도 챙겨지지 않는 급여가 결국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지 몰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는 그 50만 원이 단순한 돈이 아니라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당시 그 힘든 상황에서 나를 지탱해 준 건 ‘경험’이라는 은은한 빛이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다가와도, 그것을 견뎌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웠다. 월급이 늦어지고, 내 마음도 자주 흔들리곤 했지만, 그 경험 하나하나가 나에게 소중한 교훈으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내가 쌓아온 적금이 어느 정도 자라나,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냈다.

그 후, 여러 해가 지나면서 나는 결국 그 어려운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그때 그 적금이 단순한 돈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절실히 느꼈다. 내 미래를 위한 밑거름이 되어 준 시간들. 그 시간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적금을 붓듯, 매일매일 작은 경험과 배움을 쌓아가고 있다.


이제, 돌아보면 알 수 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쌓여가는 경험들이 결국 나를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적금이 만기일이 없다는 것은, 그 어떤 기회도 언제 올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과 같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때 쌓은 모든 것이 내 삶을 이끌어주는 중요한 자산이 되어, 결국 나를 진정한 성장으로 이끌어낸다. 그것은 단순히 물질적인 보상에 그치지 않고, 내가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한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때의 경험들은 내 삶을 깊고 풍요롭게 만든 소중한 자산이자, 오늘날 내가 가진 가장 큰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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