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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토록 Sep 14. 2022

Give Me A Chance!플리즈-

인턴을 거쳐 배우로 참여한 작품의 폐막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음속에 많은 고민이 일었다. 계속해서 배우의 이름으로 새로운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욕심… 미련… 그러려면 본격적으로 연기를 배우기는 해야 할 텐데… 대학로 작은 극단에 들어가 청소부터 시작할까…

  

미래에 대한 걱정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나날이었다. 하지만 또다시 부모님의 뜻을 거슬러 싸워야 할 걸 생각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이제는 계약직이 아닌 장기적인 관점으로 안정적인 정규직 자리를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결론 내렸다.

  

당시 나이 스물여덟. 이 사회는 스물여덟이란 여자 나이에 그리 관대하지 않다. 게다가 빠른 생일로 다른 친구들보다 1년 학교에 일찍 들어가서 친구들은 스물아홉 살이었다. 군대에 다녀온 남자들도 이 나이면 신입으로서는 입사하는 자격 조건에 턱걸이하는 때다. 하물며 여자인 내게 기회가 올까 싶어 걱정이 많이 됐다. 적지 않은 나이… 비전공자… 휴… 가슴이 답답했다.


“엇, OO에서 사람을 뽑네?”


바로 얼마 전 채용 공고가 끝난 걸로 아는데 사람을 또 뽑는 다니. 나를 위한 기회 같았다. 어차피 이전 공고에는 당시 공연팀에 계약으로 묶여 있어 지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합격한다고 해도 출근할 수 없는 상황이니 내가 욕심낼 것이 아니었다 생각했다. 하지만 또 한 번의 기회는 우리 사이에 보이지 않는 인연의 빨간 줄이 이어져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을 갖게 했다.


참여하던 공연은 9월 말이면 정리가 되니 10월부터 출근이라면 내 스케줄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들이 나만 받아준다면, 그들이 나를 선택해 주기만 한다면, 문제 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더욱이 채용을 원하는 곳은 제작부였고, 프로덕션과 배우 관리가 주 업무라니 왠지 좋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응시 자격에 걸리고 말았다. 나보다 두 살 어린 사람까지만 지원이 가능했다. 결국 내 길이 아닌가. 며칠의 고민 끝에 원서를 쓰기로 결심했다.


Give Me A Chance! 자기소개서 맨 위에 이렇게 제목을 붙였다.


“나에게도 기회를 줘라! 이런 나이 제한은 왜 두는 것이냐. 모두에게 똑같이 기회를 줘라. 나이가 적던 많던 공연에 대한 열정만 있다면, 선배들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배울 자세가 되어있는데 이렇게 나이 제한을 둔다면 나 같은 사람에게는 아예 시작할 수 있는 기회마저 없는 것이 아니냐. 나는 너희들이 만든 작품으로 다시 무대에 대한 꿈을 갖게 됐다.”


뭐 대충 이런 이야기였다. 뭐 믿고 그렇게 얘기할 수 있었는지 당시의 나는 분명 ‘평소의 나’는 아니었다.


“너희들 해외 진출 꿈꾸고 있지? 나 영어 조금 해. 일하는 데 내가 분명 쓸모가 있을 거야. 그리고 나 배우로서도 조금 일해봐서 배우들 마음도 잘 헤아릴 수 있어. 그러니 내게도 꼭 기회를 줘. 그까짓 나이 같은 건 무시하고 그냥 나 자체로만 평가해 줘.”


참 막무가내로 나를 어필했다. 온라인 접수였지만 지원을 해놓고도 영 마음이 불안했다. 혹시라도 내 메일이 누락되지는 않을지, 1차 서류 평가에서 나를 거르지는 않을지. 지원 마감일이 다가올수록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회사로 찾아가 직접 서류를 전달할까도 싶었다. 하지만 낮에는 공연에 매여 있으니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무작정 그 회사에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OO입니다.”

“예, 이번 채용 공고에 지원했는데요. 우편으로 보낸 서류가 잘 도착했는지 궁금해서요. 확인 부탁드립니다.”

“아, 그럼 저희가 확인을 한 번 해봐야 할 것 같은데요. 지금까지는 없는 것 같기는 한데...”

“혹시 몰라 메일로도 서류를 보냈는데 확인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제 이름은 OOO입니다.”

“아, 예 알겠습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우편으로 서류를 보낸 적은 없다. 일종의 꼼수 아닌 꼼수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저 내 존재를 알리고 싶었을 뿐이다. 이름을 밝혀 나를 기억하게 하고 싶었다. 귀사에 입사하고 싶어서 이메일도 보내고, 우편으로도 서류를 접수했으니 나를 꼭 기억해 주시라. 이런 마음이었다.


마음을 어느 정도 내려놨을 때야 연락이 왔다. 면접을 보러 오라고. 나이 제한에 걸렸음에도 서류 심사를 무사히 통과한 것만으로도 마냥 기뻤다. 설마 지원한 사람이 나 혼자뿐인가? 아니 왜 나를 왜 뽑았지? 서류 심사에 통과한 게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나 자신을 의심했다. 이내 ‘뭔들 어떠하리, 면접! 그래 면접이나 잘 보자!’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잡았다.


면접일 아침. 안내받은 주소로 대학로 사무실을 찾아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도착해서는 약간의 실망감이 몰려왔다. 대학로 극단이나 기획사 사정을 조금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명색이 채용 관련 면접이 있는 날인데 사무실 정리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청소는 언제 했을까 싶은, 말 그대로 “너저분한” 상태. 이전에 아르바이트로 일했던 회사의 환경과도 너무 달라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일단 붙고 볼 일이다. 다니고 말고는 그다음. 최대한 명민하게 보여야지!


둥글둥글 사람 좋게 생긴 인상은 친구들 사귀기에는 좋지만 왠지 신입사원이 갖추어야 할 인상과는 맞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최대한 “샤프하고 똑순이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자고 마음먹었다. 딱 부러지는 성격에 칼같이 일하는 모습이 기대되는.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몰랐는데 면접자는 나 혼자가 아니었다. 다른 한 명이 더 있었다. 내 앞 대표님과 감독님, 그리고 내 사수가 될 사람을 포함해 세 분이 앉았다. 나와 다른 지원자에게 번갈아 질문을 했다. 그녀는 음악대학을 졸업했다고 했다. 대학원 석사까지 마쳤고. 어떤 질문을 받았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열심히 하겠다는 내 의지를 피력하며 열정 가득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합격 통지를 받았다.


2004년 10월 4일. 대학로 첫 출근일. 그날은 바로 1년 전 별생각 없이 예약한 넌버벌 퍼포먼스 공연을 보고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던 날이다. 공연기획자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지 정확히 1년이 되는 날. 대학로가 가깝다는 이유로 선택했던 두 개의 대학이 모두 나를 거절했지만, 결국 대학로를 무대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그 사실에 가슴이 벅차고 기뻤다. 그저 대학로에서 일하고 싶다는 소박한 나의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얼마 전 당시 채용 공고를 냈던 B에게 연락을 했다. 입사하고서야 알았지만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린 그는 자기 어시스턴트를 뽑고 싶어 나이 제한을 두었다고 한다. 거의 20년이 다 지나 기억도 나지 않을 시절이지만 내가 물었다. 그때 왜 나를 뽑았었냐고. 혹시 지원자가 미달됐었는지, 아니면 나를 포함해 지원자가 딱 2명이었는지.


“아, 그때 제가 좀 밀어붙인 것도 있고, 지원자는 더 있던 걸로 기억해요. OO 대표도 좋아했고요. 도전의식 터지  는 ‘당당당당!’ 뭐 그런 게 보였습니다.”


그랬구나. 이제야 알게 됐다. 왜 내가 뽑혔었는지.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사실 당시에 우리 회사에 공연전문가가 없었어요. 대표님 포함해서 전부 다... 그렇다 보니 시행착오도 많고. 그때는 정말 열정, 경험, 도전의식 그런 게 절실했던 것 같아요. 그때가 참 힘들면서도 어떻게든 서로 합을 맞춰 현실적인 상황들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던 때였죠…”


입사 얼마 뒤에는 함께 면접을 봤던 다른 지원자도 출근하기 시작했다. 나와는 조금 다른 스타일이라 둘이 함께 업무를 배우며 시너지가 나길 바랐다고 한다. 서로 다른 장점을 가진 2명을 뽑아서 성공한 케이스인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그 말에 얼마큼의 진지함이 담겼는지는 몰라도 당시에 우리의 합이 썩 괜찮게 보였던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그는 나를 그렇게 뽑아 놓고 이듬해 여름 바로 회사를 떠났다. 20대 중반 치기 어린 섣부를 결정이었다. 내가 의지하고 싶은 사수의 자리에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자리를 비웠다. 마음 기댈 곳을 잃은 나는 아쉬움이 컸다.

자신도 당시에 많이 어설펐다고 얘기한다. 그래도 나보다는 경험이 많고, 대형 뮤지컬 제작 환경을 경험해 본 그에게서 배우고 싶은 게 많았다. 갑자기 퇴사를 결정한 그를 많이 원망했다.


이후 그는 예매처 근무를 거쳐 공연계를 완전히 떠났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우리는 이따금 안부를 전하는 사이다. 그가 없었다면 내가 이 업계에 발을 못 붙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고마운 존재’로 남아 있다. 함께 일했던 시간은 길지 않지만 불 꺼진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에서 몇몇 배우들과 소주에 새우깡 하나 놓고도 즐거울 수 있던 옛 시절, 그때를 함께 한 전우애가 추억 속에 진하게 남아 우리의 인연을 여전히 이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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