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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ve Me A Chance!

by 이피디

인턴을 거쳐 배우로 참여했던 작품의 막이 내릴 무렵, 내 마음속에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계속 배우라는 이름으로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는 욕심, 아니 어쩌면 미련. 그러려면 제대로 연기를 배워야 할 텐데... 대학로 작은 극단에서 청소부터 시작할까? 미래에 대한 걱정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하지만 또다시 부모님의 반대와 싸워야 할 걸 생각하니 망설여졌다. 그래서 결국, 이제는 계약직이 아닌 정규직—조금 더 안정적인 길을 찾기로 결심했다.


그때 내 나이 스물여덟. 세상은 스물여덟의 여자에게 그리 관대하지 않았다. 빠른 생일 덕분에 동기들보다 학교를 1년 일찍 들어갔지만, 정작 그들보다 먼저 사회에 던져진 느낌이었다.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조차 신입으로 간신히 턱걸이하는 나이. 하물며 전공자도 아닌 내가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 나이도, 전공도 내게 불리한 조건이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그때 나는 또 한 번 무언가를 결단해야 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길로 나아가는 게 맞을까, 아니면 내가 정말 원하는 일을 위해 한 번 더 도전할까? 고민이 깊어질 때쯤, 우연히 채용 공고를 발견했다. "엇, OO에서 사람을 뽑네?" 얼마 전 채용이 끝난 줄 알았는데, 또 공고가 났다. 마치 나를 기다려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는 공연팀 계약으로 지원조차 못 했지만,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 참여 중인 공연은 9월 말이면 끝나고, 10월부터 출근이라면 문제없었다. 그들이 나를 선택해주기만 한다면.

더욱이 채용 부서는 제작팀. 프로덕션과 배우 관리가 주 업무라니, 괜히 좋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문제는 나이 제한이었다. 자격 요건에 ‘만 26세 이하’라는 조건이 명시되어 있었다. 나는 이미 두 살이나 초과했다. 아, 또 막히는구나 싶어 며칠을 고민하다 결국 원서를 쓰기로 결심했다.


Give Me A Chance! 자기소개서 맨 위에 이렇게 제목을 붙였다. "저에게도 기회를 줘요. 나이 제한은 왜 두는 건가요? 공연에 대한 열정이 있고, 배울 자세도 되어 있는데 시작조차 못 하게 하는 이 기준이 너무 야속합니다. 저는 당신들이 만든 공연 덕분에 다시 무대를 꿈꾸게 됐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당돌한 자기소개서였다. ‘해외 진출 꿈꾸죠? 저 영어 좀 해요. 배우로도 일해봐서 배우들 마음도 잘 알아요. 그러니 저에게도 기회를 주세요. 나이 같은 건 무시하고 저라는 사람 자체를 봐주세요.’ 솔직히 좀 무모했지만, 간절함만큼은 진심이었다. 온라인 접수였지만 마음은 계속 불안했다. 혹시 메일이 누락되진 않았을까, 서류에서 탈락하면 어쩌나. 마감일이 다가올수록 초조해졌다. 급기야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OO입니다.”
“안녕하세요, 채용 공고 보고 지원한 OOO입니다. 혹시 제가 보낸 서류 도착했는지 확인 가능할까요?”
“음… 지금으로선 없는 것 같은데요?”
“혹시 몰라 메일로도 보냈는데 확인 부탁드려요. 제 이름은 OOO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확인해볼게요.”


사실, 우편으로 서류를 보낸 적은 없었다. 그저 내 존재를 각인시키고 싶었을 뿐이었다. 입사하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마음을 내려놓기 시작했을 무렵, 연락이 왔다. 면접을 보러 오라는 통보. 나이 제한을 넘긴 나였지만, 서류를 통과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눈물이 날 만큼 기뻤다. 혹시 나 혼자 지원한 건가? 아니면 왜 나를 뽑았지? 의심이 들기도 했지만, 곧 ‘뭔들 어때! 면접이나 잘 보자!’며 마음을 다잡았다.


면접 당일, 대학로 사무실을 찾아갔다. 예상은 했지만 너무 정리되지 않은 사무실 환경에 순간 당황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일단은 붙고 봐야 했다. "둥글둥글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은 신입사원 이미지와 안 어울릴 수도 있겠지." 그래서 최대한 또렷하고 야무진 인상으로 보이려 애썼다. 내가 생각한 이상적인 신입사원의 이미지—딱 부러지고, 믿음 가는 사람.

면접장에는 나 외에도 한 명의 지원자가 있었다. 나와 다른 점은 음악대학 출신이라는 것. 석사 과정까지 마쳤다고 했다. 어떤 질문이 오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그저 내 진심을 보여주려 애썼다. 열정과 진심, 그 하나만 믿고. 그리고, 합격 통지를 받았다.


2004년 10월 4일. 내 첫 출근일. 정확히 1년 전, 아무 생각 없이 예약해 봤던 넌버벌 퍼포먼스 공연을 본 그날이기도 했다. 그 공연이 내 가슴을 다시 뛰게 했고, 나는 공연기획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딱 1년이 지난 그날, 나는 진짜 대학로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대학 입시에서 나를 거절했던 대학로 인근 학교들. 하지만 결국 나는 그 무대 위에서, 무대 뒤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었다. “정말 꿈이 이루어졌네.” 그저 대학로에서 일하고 싶다는, 너무나도 단순했던 꿈이 현실이 되던 날이었다.

몇 해 전, 당시 채용 공고를 냈던 B와 다시 연락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입사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인데, 그 채용 공고는 자신보다 어린 어시스턴트를 뽑기 위해 B가 직접 올린 거였다고 한다. 나는 물었다. “그때 왜 저를 뽑으셨어요? 혹시 지원자가 부족했나요?” B는 웃으며 답했다. “그때 내가 좀 밀어붙인 것도 있었고, 지원자는 더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대표님도 좋아하셨고요. 그 자기소개서, ‘당당당당!’ 뭐 그런 도전의식이 눈에 확 들어왔어요.”


그때서야 알았다. 왜 내가 뽑혔는지. “사실 우리 회사에 공연 전문가가 없었어요. 대표님 포함해서 전부 다 처음이었죠. 시행착오도 많고, 그래서 더 간절했던 것 같아요. 열정, 경험, 도전의식—그게 절실했거든요.” 입사 후 얼마 안 되어, 함께 면접을 봤던 지원자도 합류했다. 서로 다른 장점을 가진 우리 둘의 조합이 시너지를 낼 거라 기대했단다. 그 말이 얼마나 진심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시절 우리가 꽤 괜찮은 ‘합’을 만들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나를 그렇게 뽑아준 그는, 이듬해 여름 바로 회사를 떠났다. 정확히는, 내가 입사한 지 10개월쯤 지났을 때였다. 갑작스러운 퇴사 통보였다. 어안이 벙벙했다. 당연히 많은 걸 배우고 싶은 입장에서 그는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선배이자 사수였고, 무엇보다도 내가 이곳에 올 수 있도록 ‘기회를 준 사람’이었기에 실망감과 불안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그가 떠나고 난 후, 그의 빈자리는 곧 나의 자리가 되었다. 아직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상태였지만, 현실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급히 업무를 익혀야 했고, 나는 어느새 주도적으로 프로젝트를 이끌어야 하는 입장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묘하게 이상한 일이었다. 막상 내가 직접 해보니,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무섭고 막막했지만, 또 그만큼 성취감도 컸다. 이전보다 더 집중하게 되었고,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싶었는지 다시 떠올리게 됐다. 돌이켜보면 그 모든 과정은 나에게 주어진 ‘기회’였다.

지금도 후배들이 내게 묻는다. "그때 진짜로 나이 제한이 있었어요?" "서류에서 떨어질까 봐 걱정되진 않으셨어요?" "왜 그렇게까지 간절하셨던 거예요?" 나는 그때마다 말한다. “그냥, 한 번쯤은 누가 내게도 기회를 줬으면 했어. 그게 전부였어.” 그리고 꼭 덧붙인다. “기회는 스스로에게 주는 거야. 남이 열어주기만 기다리면 평생 문 앞에서 서성이다 끝날지도 몰라.” 그 첫 기회가 내겐 전환점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수많은 문 앞에서 망설였지만, 나는 그때 그 경험을 떠올리며 계속 손잡이를 돌려왔다. 누가 그 문을 열어주지 않더라도, 두드리고, 또 돌리고, 열릴 때까지 버텼다.


그때 누군가 내게 기회를 줬듯, 이제는 내가 누군가의 문이 되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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