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정체
실패의 정체
10여 년 전 유난히 피곤함을 느끼는 날이 며칠 계속됐습니다. 업무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던 터라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었죠. 그렇게 한 달 정도가 지났을까, 어느 날 입고 있던 옷들이 너무 많이 헐렁해졌다는 걸 뒤늦게 알아채고 거울 앞에 섰습니다. 불과 한 달여 사이에 10Kg 가까이 살이 빠져버렸습니다.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운동도 식이조절도 하지 않고 이렇게 살이 빠져버리다니요. 좋기도 했지만 불안감이 더 컸습니다. 갑자기 살이 빠진 저를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요즘 운동 열심히 하는가 봐’라는 반응이었지만, 사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병원에 가 봐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왠지 그때는 그 쉬운 결정도 내리기 어려웠습니다.
결과는 당뇨병. 검사를 하고 일주일이 지나 검사결과를 들으려고 갔을 때 담당의의 말씀은 지난 주간에 별일 없었냐는 질문이었습니다. 혈당수치와 당화혈색소 수치와 췌장 관련한 수치가 지나치게 높게 나왔고 이 정도 상태면 거의 쇼크가 올 가능성이 높았다는 이야기. 그 담당 선생님께 단단히 혼이 나고서야 제게는 돌이킬 수 없는 당뇨인의 삶이 시작됐습니다.
의도하지 않았던 제 다이어트 이야기입니다. 다이어트에 성공한 것이 아니라 건강관리에 실패한 거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건강관리는 아예 시도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실패해 버렸습니다. 그제야 운동에 빠지기도 하고, 음식조절에 신경을 쓰기도 하면서 당뇨와 친구로 지낸 것이 벌써 십수 년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정말 다행스럽게도 빠져버린 체중을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 되면 실패담이라고 해야 하나 성공담이라고 해야 하나 좀 애매해집니다. 제게는 당뇨가 다이어트 성공의 1등 공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공과 실패가 뒤섞여 있는 경우는 정말 흔하게 찾을 수 있습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는 에디슨의 말은 정말 초등학교 때부터 무수하게 들어왔습니다. 성공과 실패가 연관돼 있는 일을 찾는 것은 그만큼 흔하고 쉽습니다. 정확하게 따져볼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명언들을 주제별로 정리해 볼 수 있다면 아마도 가장 많은 것이 ‘성공’과 ‘실패’에 대한 것일 겁니다. 성공은 사람들이 제일 바라는 것이고, 실패는 가장 피하고 싶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이 둘, 성공과 실패가 가장 가까운 사이인 것은 단순한 빅데이터 검색으로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빅데이터 분석결과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공과 실패를 상호적인 감정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성공이라는 단어가 훨씬 큰 긍정적 감정을 나타내지만 언제나 그 옆에는 실패의 감정이 따라붙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성공과 실패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인 것은 분명한데 둘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성공의 반대말은 실패가 아니라 도전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은 정말 흔하고, 그 말에 대한 반박으로 “성공의 반대말은 명백히 실패다 “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도대체 성공과 실패가 서로 함께 공존하고 있다면 이들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실패의 반대말이 성공이 아닌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명사들의 얘기처럼 실패를 통해 성공에 이르게 된다는 말에 공감하기도 하고, 실패하지 않았다고 해서 꼭 사람들이 원하는 성공을 할 것이라고 얘기하기도 어렵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실패하지 않은 것‘ 정도겠지요.
그렇다면 성공의 반대말이 실패일까요?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만약 성공의 반대말이 실패라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패자로 전락하고 말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공과 실패는 서로 마주 보고 서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만약 이 둘을 함께 태어나서 나란히 함께 살아가는 ’ 쌍둥이 형제“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한 부모에게서 태어나고 서로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고받으며 자라 갑니다. 늘 자라나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순간에 성장을 멈추지는 않습니다. 자라나는 때마다 서로 조금씩 앞서기도 하고 뒤서기도 합니다. 이렇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이들 중 형은 실패인 것 같습니다. 둘 중에 더 많이 앞장을 서는 것 같아서입니다.
물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실패하면서 태어나는 건 아닙니다. 그래도 첫 호흡을 때기 위해 애를 쓰는 갓 태어난 아기의 첫소리가 울음인 것은 안락한 엄마 태중에서 갑작스럽게 독립된 개체가 된 것에 대한 두려움의 외침일 수도 있을 겁니다. 억측이라 하더라도 어쨌든 실패가 성공의 형님쯤 될 거라는 생각의 근거는 더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실패는 성공보다 늘 앞서서 나타나고 성공보다 더 큰 책임감을 요구받습니다. 성공의 모습 속에는 왠지 막내 동생의 어리광 같은 귀엽고 즐거운 느낌이 있지만, 실패의 모습은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장자의 무게감마저 느끼게 합니다. 또 실패는 꽤 많고 영리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조금 꾀를 낸다고 해서 잘 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영리함과는 거리가 있어 보여서 그저 묵직하게 제 길만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느 면에서는 무식하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실패하고 실패해도 또 그 길을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패는 삶이라는 전쟁터에서는 장군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정말 용감무쌍한 보병이거나 어쩌면 작은 분대장 같은 이미지입니다. 하지만 장군 같아 보이는 꾀 많고 영리한 전략가인 성공에게는 가장 필요한 전우입니다. 그래서 동생인 성공을 위해서는 형인 실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실패의 정체가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실패 덕분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실패 덕분에 숨 쉬는 법을 배웠고, 실패 덕분에 여러 가지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실패가 혼자서 묵묵히 버텨준 덕분에 가끔은 뭔가에 실패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잘 된 성공만 즐기기도 합니다.
어쩌다 보니 실패예찬론이 되고 있네요. 하지만, 실패가 우리들에게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히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기왕에 실패를 경험하고 있다면 이 기회에 실패를 잘 배워보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차라리 실패하는 것에 성공해 보는 것 말입니다.
2018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아주 특별한 박람회가 열렸습니다. 바로 ‘실패박람회’입니다. 2018년 광화문광장에서 시작된 실패박람회는 2019년에는 강원도를 시작으로 대전, 전주, 대구, 서울로 이어지는 실패의 대장정으로 열렸습니다. 실패의 과정을 보고, 응원을 듣고, 경험을 말하고, 마음을 먹는 다양한 체험과 전시, 문화프로그램으로 구성됐다고 합니다. 실패박람회가 오프라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온라인에서도 실패의 바람이 크게 불고 있습니다. 유튜브에 실패담을 검색하면 수많은 사람들의 실패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유명인과 일반인의 구별 없이 대중에게 자신의 실패담을 담담히 털어놓습니다. 변호사 시험에 다섯 번 탈락한 어느 변호사의 이야기, 어느 50대의 이혼에 대한 이야기, 갖가지 수능 실패담, 투자 실패담들이 넘쳐납니다. 이들 영상은 수만에서 수십만 회까지 사람들에게 보였습니다. 실패의 대유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한 신문기사에 따르면 이 흐름은 오프라인으로 이어져서 자신의 실패이야기를 이야기하는 모임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실패담을 공유하세요”라는 슬로건으로 2012년 멕시코에서 시작된 "퍽업나이츠(Fuck Up Nights)"라는 모임은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약 86개국 318개 도시에서 열리는 글로벌 운동으로 확산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한 "페일 페스트(Fail Festival)"은 스타트업 실패를 축제로 즐기고 있습니다. 워크숍과 전시는 물론 빅테크와 프로젝트들의 실패담을 나누며 토론의 장이 리더십과 혁신의 관점에서 실패를 분석합니다. 실패를 주제로 하는 월간지가 출간되기도 했고, 관련 책들은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지금 이 순간 실패의 대유행이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아무 관심도 받지 못하고 있던 한국의 문화가 K-Culture라는 이름으로 온 세상에 퍼져가고 있는 것처럼 실패도 어두운 과거에서 벗어나 새롭게 세상 속으로 나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성공에 사람들의 모든 관심이 집중된 듯하더니 이제는 실패로 그 관심이 옮겨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단순히 관심만이 아닙니다. 눈길을 주는 것을 넘어서 ‘배우기’ 열풍입니다. 실패를 배우다니요? 도대체 왜?
실패를 배우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성공하고 싶어서입니다. 최고의 “성공학”이 바로 “실패학”이라는 생각이 대중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실패박람회를 찾아가고 실패담에 귀를 기울입니다. 실패 안에 있을 성공의 비결을 찾아내려고 촉을 세웁니다. 성공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실패에 대한 관심도 커집니다. 그러니 요즘의 실패 대유행은 결국 성공에 대한 열망의 다른 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실패가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어쩌면 실패는 성공의 도우미 일지도 모른다는 것은 이미 다들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패를 배우면서까지 성공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생각처럼, 실패는 반드시 필요한 성공의 도구일까요? 글쎄요, 실패가 성공의 필수 도구 인지 아닌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성공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실패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공을 위해 실패를 알아야 한다는 말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가 실패에 성공해 보자고 주장하는 건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성공을 바라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다만, 자기가 바라고 있는 성공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실패를 꼼꼼히 알아가다 보면 분명히 자기가 바라고 있는 성공의 실체를 찾아갈 수 있습니다. 무엇이 성공한 삶인지 알게 되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으로 가는 길을 찾아낼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성공하기 위해서 실패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성공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실패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패에 성공하기 위해서 무엇부터 해야 할까요?
“실패학”이 있을 정도이니 실패를 배우는 것은 어려운 일 아닐까 생각하는 분이 분명 있을 겁니다. 우리에게 늘 있는 시작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것이지요. 실패를 배우는 일의 첫 번째는 제대로 실패해 보는 일입니다. 사실 아주 간단합니다. 그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그 어느 것도 성공할 수 없을 것이고, 어느 것도 성공할 수 없다면 제대로 실패하는 것이겠지요. 농담 같지만 분명한 사실입니다. 아무것도 이뤄낼 수 없는 것만큼 완벽한 실패는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 지금 실패에 빠져있다고 느끼는 분들은 잠시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되는 일은 하나도 없는데 무엇인가 해야 할 것만 같아서 머리를 쓰고, 사람들을 만나 봐도 도무지 탈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스스로 애쓰는 모습이 처량하다고 느껴지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 무력하고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답답한 마음에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누구한테 전화를 걸어봐야 할까 하는 마음에서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실마리는 핸드폰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때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 때,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더 좋을 때.
“잠시 핸드폰은 꺼 두셔도 좋습니다.”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든,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음이든 뭐든 괜찮습니다. 잠시만 머리를 채우는 수많은 생각들의 전원을 꺼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지금 그 시간과 공간을 느껴보세요. 가만히 순간의 흐름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시간도 흐르는 것이라서 순간순간마다 시간의 흐름으로 생겨나는 바람이 불어옵니다. 정말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시간의 바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것인지 우리는 잘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삶은 지나쳐가는 순간들이 모여 있는 것이라는 사실도, 실패나 성공의 순간들이 이렇게 시간의 바람에 흘러가 버린다는 사실도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그저 꿈꾸며 희망하는 언제일지도 모를 미래의 순간이 뭐가 그리도 중요한지 그것만 바라보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성공하려고 하는 걸까요? 왜 실패하지 않기를 바라는 걸까요? 모두들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하겠죠.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는 지금의 어려움도 견뎌내고 더 노력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젖 먹던 힘까지 내라 응원하면서요. 그런데, 그 힘 좀 빼보면 어떨까요? 힘을 써라 얘기하지 말고, 힘 빼라고 응원하면 안 될까요?
“If you want to be happy, be.(행복해지기 원하세요? 그렇게 하세요.)"
톨스토이가 말한 행복하게 사는 방법입니다. 이 거장의 말처럼 행복은 우리 모두에게 이미 주어진,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 행복한 존재라는 거죠. 성공도 실패도 행복과 같은 종류입니다. 무엇을 이루거나 이루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매 순간마다 지나쳐가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그러니 실패를 이겨내는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