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것의 전문가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도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큼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드라마 <눈이 부시게>가 남긴 긴 여운의 끝에는, 우리 모두의 마음을 토닥이는 마지막 내레이션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눈이 부시게 오늘을 살아가라'는 간절한 당부였습니다. 그리고 이 드라마 속 당부의 말은 백상예술대상을 수상한 배우 김혜자 님의 수상소감으로 현실의 사람들에게 다시 건네어졌습니다. 드라마만큼이나 특별했던 그날의 소감은 배우의 진심이 담겼기에 길고 선명한 여운을 남겼습니다. 드라마를 볼 때도, 수상소감을 들으면서도 사람들과 관객은 눈물을 닦아내며 미소 지었습니다. 어떤 의미의 눈물이고 미소였을까요? 시처럼 아름다운 대사에 대한 감동이었을까요? 아니면 ‘지금 삶이 힘든’이라는 말에 공감을 느끼고 그럼에도 당신은 눈이 부시게 살아갈 자격이 있다는 이야기에 위로를 받아서 일까요?
살아가는 것은 모든 사람이 지금 해내고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쉽지 않은가 봅니다. 그래서 드라마에서도, 현실에서의 대사도 가슴을 울리나 봅니다. 살아가는 것에 대한 위로가 필요한 세상에서 드라마를 보다가, 음악을 듣다가 혹은 책을 읽다가 문득 애를 쓰며 살고 있는 자기 모습이 마음에 훅 치고 들어오면, 슬픔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먹먹함과 연민의 감정이 터져버리는 것일 테지요. 누구에게나 살아가는 것은 몹시도 무겁고 버겁게 느껴지는 것이 분명한 사실인가 봅니다.
살아가는 것에도 전문가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사람이라면 누구나 살아감의 전문가가 될 자격이 있을 겁니다. 말콤 그래드웰의 <아웃라이어>에 소개된 1만 시간의 법칙(스웨덴 출신 심리학자 안데르스 에릭슨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합니다), 이 유명한 성공의 법칙으로 전문가의 자격을 빗대어 본다면, 적어도 1만 시간을 살아본 사람들은 살아감에 있어서는 전문가입니다. 좀 더 나가보면 결국 1만 시간을 살아본 사람, 기껏해야 417일 정도를 산 어린아이도 살아감의 전문가가 될 자격은 있습니다. 비약이겠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돌을 갓 넘긴 유아도 이제 충분히 혼자 숨 쉬고,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 어느 의미로는 살아감의 전문가가 된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이 연구의 당사자인 에릭슨 박사는 직접 1만 시간의 법칙의 오류를 지적하는 <1만 시간의 재발견>이라는 책으로 ‘얼마나 오래’가 아니라 ‘얼마나 올바른 방법으로’ 시간을 보냈는가가 중요하다고 얘기합니다. 의식적이고, 목적이 있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엄마의 절대적인 보호를 받는 유아시절을 제외하고, 잠을 자는 시간을 제하더라도 초등학생 정도라면 누구든지 ‘살아감’에 있어서는 전문가의 자격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살아감’의 어느 분야 전문가인지는 다르더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살아감의 전문가가 되는 순간, 사람들은 실패라는 새로운 경험을 겪게 됩니다. 호흡을 하는 것, 심장이 뛰는 것은 실패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실패라는 것의 의미를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의 감정이 점점 쌓여가며 스스로 느끼게 됩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까지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피하지 못하는, 살아감의 전문가가 느끼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감’에 ‘실패’가 담기면서 ‘살아감’은 ‘삶(LIFE)'이라는 철학적 의미로 변화합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 것은 한순간에 사라지지만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고야 말리니
알렉산드르 푸슈킨(Aleksandr Sergeevich Pushkin)은 그의 시에서 “삶”이 우리들을 속일 것이라고 합니다. ‘삶이 그대를 속이는 것’은 어쩌면 우리들이 때마다 겪는 실패들 일 수도 있겠네요. 언제나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주고, 믿음을 주다가도 여지없이 반대의 결과에 부딪혀 버리는 일이 모두 ‘삶이 그대를 속인’ 결과라면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삶은 최고의 사기꾼 기질을 가지고 있나 봅니다. 정말 그런 걸까요? 도대체 삶은 무엇 이길래 이처럼 무거움으로 다가오는 걸까요?
삶[삼:]
1. (기본의미) 태어나서 죽기에 이르는 동안 사는 일. 또는 살아 존재하는 현상. 유기체의 고유한 특성으로서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기도 하다.
2. 흔히 사회적 조건 따위가 규정하는, 사람이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나 형편.
3. 태어나서 죽기에 이르는 동안 하나의 객체가 행하거나 겪는 의미 있는 일들의 전체.
삶(LIFE)을 사전에서 찾으면 ‘사는 일’이라고 합니다. 살아 숨 쉬는 것이 삶이 아니라 숨 쉬며 하는 일, 그 순간 아니면 숨 쉬는 모든 시간에 있었던 일들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삶’은 ‘일’이 됩니다. 그런데 삶이 일이 되어버리는 순간 살아감의 전문가들은 잘해야 한다는 부담을 갖게 됩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느낌, 이 부담감 때문에 사람들은 나를 위해 일하는 건지 일을 위해 내가 사는 건지 혼돈해 버립니다. 사실 대부분의 우리가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것일까 아니면 살아져가고 있을까를 한번 생각해 보죠. 생각하면 할수록 나의 삶이 내 것인지 조차 확실히 판단하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건지, 아니면 살아져 가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건, 당신의 삶이 이미 일이 돼 버렸다는 얘기입니다. 그것도 아주 힘든 일이 돼 버린 거죠. 그리고 일이라는 건 반드시 잘 해내야 한다고 생각되는 것이기에 우리는 잘 살아 내야만 합니다. 여기서 또 벽에 부딪힙니다. 도대체 잘 산다는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으니까요.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엄마, 오늘 내 친구네 집에 놀러 갈 거야. 걔네 진짜 잘 살아” 하는 말은 참 자연스럽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초등학생만 돼도 이렇게 얘기하니까요. 여기서 잘 산다는 말은 아마도 돈이 많다는 얘기일 겁니다. 너무 오랫동안 잘 산다는 것은 돈이 많다는 의미로 우리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아 왔습니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우리는 결국은 그렇게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데 돈이 많으면 진짜 잘 사는 것일까요? 물론 사람마다 잘 사는 것에 대한 기준이 다를 겁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많다는 것이 정말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에게 잘 산다는 것은 여러 조건들이 결합돼야 달성할 수 있는 복잡한 미션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잘 산다는 것이 이렇게 달성하기 힘든 것이라면 너무 슬퍼질 것 같네요. 그래서 아마도 꽤 사람들이 잘 산다는 것을 애초에 포기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잘 사는 건 바라지도 않고 그냥 평범하게 사는 것이 목표라고 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평범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렇다면 잘 산다는 것의 반대말이 무엇일까요? 못 산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가난하게 사는 것일까요? 아니면 평범하게 사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모두 잘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대부분 앞으로 잘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잘 사는 것이 워낙 막연한 것이라서, 대부분은 바라기는 하지만 지금 내게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잘 살게 되는 것은 미래의 희망사항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물론 지금 자신이 잘 살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부분 자신이 세운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이들 대부분은 열정이 있고 삶의 목표도 있고 또 어느 정도 그 목표를 달성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자신이 잘 살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의 특징은 지금도 잘 살고 있다고 느끼고 앞으로도 잘 살아갈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렇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현실은 그것과는 너무나 멀기만 합니다.
이 안타까운 모든 상황은 삶이 일이 되면서 생겨납니다. 사실 삶이 사는 일이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하지만, 잘 살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은 “일”이라는 개념에 대한 오해 때문에 갖게 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일을 먹고살기 위해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한 사람들은 결코 잘 살아갈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일은 먹고살기 위해 하는 것은 아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이라는 것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될 때 삶도 조금 다르게 느껴지게 되고 잘 사는 것에 대해서도 다른 시선을 갖게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삶(Life)은 무엇을 해내는 것이 아닙니다. 일이 무엇을 해내는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삶도 무엇인가 결과를 만들어야 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삶이란 무엇인가를 위해 살아내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이루어 내야 할 골(Goal)이 있는 것도 아니며 잘 살게 되는 것이라는 목표를 갖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삶은 일과 같은 행위의 개념이 아니라 시간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미래에 달성해야 하는 어떤 행위나 상태가 아니라 지금 살아가는 이 순간을 삶의 진정한 의미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잘 사는 것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잘 살아가는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자신이 잘 살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이 목표를 이루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을지라도 그들의 관심은 지금에 있습니다. 지금을 잘 살아가는 것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미래의 결과에 대한 큰 열망으로라도 지금 그들의 삶에 열정을 쏟습니다. 그들이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목표를 달성하는 결과가 아니라 지금을 어떻게 살아갈까에 집중하고 있기에 잘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은 누구나 잘 살 수 있습니다. 잘 살아간다는 것은 목표의 달성 여부와는 전혀 다른 것이고 돈의 많고 적음과도 전혀 관계없는 것이기에 어떤 상황과 형편이라도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반드시 잘 살아야만 합니다.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든 사람은 ‘눈이 부시게’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가로막는 것은 사람들 각자의 마음일 뿐입니다.
요즘의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를 당하고, 상처받고 작아진 자존감으로 실패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실패의 정체도 모른 채 매일매일 부딪히는 작은 벽들을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벽에 부딪혀 쓰러지지 않으려고 모진 애를 씁니다. 무너질 것 같은 마음에 힘을 잔뜩 써가며 견뎌내려고 하지만 그때마다 더 큰 힘이 필요합니다. 기댈 곳이 있어 보이는 다른 사람들이 점점 더 부러워지기만 합니다. 누구나 느끼는 현실의 감정입니다. 그렇기에 잘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이런 실패들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겨내기 위해서는 실패의 정체를 알아야 합니다. 알아야만 이겨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