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무슨 일 하세요?

실패탐구 2. 일과 실패

by 하루



"그래서, 요즘 무슨 일 하세요?"

오랜만에 나간 모임 자리에서 으레 듣게 되는 질문입니다. 마치 "오늘 날씨 참 좋죠?"라고 묻는 것처럼 가볍고 일상적인 이 한 마디가, 때로는 목에 걸린 가시처럼 묘하게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그 짧은 순간, 우리 사이엔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흐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압니다. 이 질문이 단순히 "평소에 어떤 활동을 하며 시간을 보내나요?"를 묻는 게 아니라는 것을요. 그것은 아주 정중한 방식의 '탐색'입니다. "당신의 사회적 위치는 어디쯤입니까?", "당신은 어느 정도 성공한 사람입니까?"를 묻는, 우리 시대의 가장 은밀한 인사법이지요. 우리가 얘기했던 '잘못된 잣대'가, 안부 인사의 탈을 쓰고 불쑥 나타난 셈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곧 나의 정체성이 되어버리는 세상. 그래서 우리는 번듯한 명함이나 남들이 알만한 타이틀을 내밀지 못할 때, 죄지은 사람도 아닌데 괜히 움츠러들게 됩니다.


도대체 '일'이란 무엇이길래, 이렇게 우리를 신경 쓰이게 하는 걸까요?

인류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지성인들도 이 문제를 두고 오랜 시간 고민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동을 "자유인이 해서는 안 될, 노예들의 고단한 필요악"이라는 시선으로 낮추기도 했지만, “우리 삶에서 진정한 일은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일”이라며 그 의미를 구분하기도 했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칼 마르크스도 이상적인 일이란 “인간성을 정의하는 활동이며,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는 인간의 욕구”라고 인간 중심의 생각을 펼칩니다. 하지만 카뮈는 “쓸모없고 헛된 노동보다 더 무시무시한 벌은 없다”는 생각에 동의하기도 하죠.


저주이자 축복, 형벌이자 구원.

이 모순된 정의들 사이에서, 오늘 아침 힘겹게 몸을 일으켜 집을 나선 우리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일터로 향했을까요?


단순히 통장에 찍힐 숫자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만약 돈만이 우리가 일하는 유일한 목적이라면, 이미 충분한 부를 쌓은 사람들은 일을 멈췄어야겠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치열하게 현장을 지키는 걸 보면 분명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하는 이유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존재감의 확인(Identity)”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명함 한 장으로 답할 수 있는 간편함. 우리는 사회 속에서 '나의 자리', 정체성을 확인하고 자존감을 얻고 싶어 합니다.

둘째, “소유, 안정감(Income & Stability)”

이것은 속물적인 욕심이 아닙니다. 돈을 번다는 것, 소유할 수 있다는 마음은 거친 세상의 풍파로부터 나와 내 가족을 지킬 수 있다는 삶의 ‘안정감’과 내가 원하는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함'를 얻기 위한 정당한 이유라고 믿게 됩니다.

셋째는, “욕구의 충족, 만족감(Satisfaction)”을 얻기 위함입니다. 어려운 과제를 해결했을 때 느껴지는 그 짜릿한 성취감, 어제의 나보다 한 뼘 더 자랐다는 만족감을 맛보고 싶은 본능이겠죠.

넷째, 가장 중요한 보편적 이유는, “삶의 의미(Meaning), 행복”일 것입니다. 나의 작은 수고가 누군가의 삶에 도움이 되고 있다는 믿음, 그 소박하지만 숭고한 보람을 느끼는 것 말입니다.


"당신은 지금 왜,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나요?"


우리는 이렇게 꽤 괜찮은 이유들을 품고 일을 대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게 낭만적이지는 않습니다. 앞에서 말한 그 아름다운 가치들을 매일 느끼며 가슴 벅차게 일하는 날이 과연 일 년에 며칠이나 될까요?


솔직히, 대부분의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일합니다. 일은 고상한 자아실현이 아니라, 영혼을 갉아먹는 고역처럼 느껴집니다. 매일 똑같은 쳇바퀴를 도는 기분이지만, 당장 날아올 이번 달 청구서와 가족의 생계, 그리고 불안한 노후 때문에 묵묵히 버텨냅니다. 출근길의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겁고, 퇴근길의 어깨는 물 먹은 솜처럼 축 처져 있기 일쑤입니다. 꿈을 실현하는 무대여야 할 일터가, 어쩌다 생존을 위한 전쟁터가 되어버렸습니다.


어쩌면 '일을 잘한다'는 것의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는지도 모릅니다. 처음에 품었던 일에 대한 그 순수한 기대들은 까맣게 잊은 채, 목적과 수단을 혼돈하면서 스스로의 속도를 잃어버리고 세상을 좇아 허튼 애만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19세기의 사상가이자 예술가인 윌리엄 모리스는 이런 생각을 남겼습니다.


"일은 삶의 빛이 될 수도, 삶의 짐이 될 수도 있다. 그 일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희망'이다."


희망을 잃어버린 일, 오직 생존만을 위해 꾸역꾸역 삼키는 노동은 삶의 짐이 될 뿐입니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보내는 일터가 지옥 같다면, 우리 삶의 절반 이상이 매일 실패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무거운 짐을 어떻게 내려놓을 수 있을까요? 당장 사표를 던지고 꿈을 찾아 떠날 수 없는 평범한 우리들에게 '라이프 이노베이션'은 그림의 떡일까요?


환경을 바꿀 수 없다면 ‘태도’를 바꾸면 돼요!

힌트를 찾기 위해, 미국 시애틀의 항구로 가보겠습니다. 그곳엔 '파이크 플레이스(Pike Place)'라는 오래된 어시장이 있습니다.


냉정하게 말해, 이곳은 일하기에 썩 좋은 환경이 아닙니다. 비린내가 진동하고, 한겨울에도 살을 에이는 얼음물에 온종일 손을 담가야 합니다. 무거운 생선 상자를 쉴 새 없이 날라야 하는 고된 노동의 현장이지요. '어쩔 수 없이 일하는 사람'이 되기에 이보다 더 완벽한 핑계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곳 상인들의 표정에서 권태를 찾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피곤에 찌들어 생선을 팔지 않는 것으로 이미 유명하죠. 마치 그들이 파는 펄떡이는 물고기처럼 생기가 넘칩니다. 주문이 들어오면 "연어 한 마리 날아갑니다!" 하는 우렁찬 환호성과 함께, 커다란 생선을 공중으로 던지며 유쾌한 퍼포먼스를 벌입니다.

그들은 특별한 사람들일까요? 아니면 비린내가 향기롭게 느껴지는 걸까요? 아닐 겁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춥고, 힘들고, 고단합니다.


다만 그들은 일의 '목적'을 바꿨을 뿐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 생선을 파는 노동자'에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선물하는 사람'이 되기로 말입니다. 환경을 바꿀 수 없다면, 그 환경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 선택 하나가, 지루한 생선가게를 전 세계 사람들이 찾아오는 멋진 일터로 만들었습니다.


이번엔 성경으로 가봅니다.

성경 창세기를 보면, 태초의 인간 아담에게 주어진 첫 번째 일이 나옵니다. 신은 아담에게 땅을 파거나 집을 짓는 노동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대신 창조한 각종 동물과 식물들의 '이름을 짓게' 했습니다.

누군가에게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존재를 인식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비로소 그와 눈을 맞추는 행위입니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는 것. 나의 꽃이 된다는 특별함.


인류 최초의 일이자, 일의 본질적 정의는 노동이 아니라 '관계함'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가 잃어버렸지만 다시 회복해야 할 “일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오늘, 우리의 일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터에서 만나는 수많은 존재들에게 이름을 불러주고 관계를 맺습니다. 나의 상품을 구매하는 고객과, 함께 땀 흘리는 동료와, 심지어 내가 작성하는 보고서, 내가 조립하는 부품과도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결국 '일을 잘한다'는 것은, 연봉킹이 되거나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일과 연결된 수많은 대상들과 '건강하고 좋은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자존감도, 자유함도, 만족감도, 행복도... 사실은 거창한 성취의 트로피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진심 어린 서비스에 감동한 고객의 미소 속에서, 힘든 프로젝트를 끝내고 동료와 나누는 따뜻한 격려 속에서, 그리고 내 손길이 닿은 상품이 누군가의 삶에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 속에서 자연스럽게 맺히는 열매들입니다. 그렇게 그들에게 내 마음을 전하는 것이 바로 내 “일”입니다.


일터를 치열한 '전쟁터'가 아닌 따뜻한 '관계의 터전'으로 바라보는 시선의 전환, 그것이 내 삶을 위한 혁신의 시작입니다. 이제 당신에게 어렵지 않은, 하지만 어려운 결단의 문제만 남았네요.


우리는 살면서 내가 '어떤 일(What)'을 할지 완벽하게 선택하기는 어렵습니다. 원치 않는 부서로 발령이 날 수도 있고, 생계를 위해 궂은일을 해야 할 때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내가 그 일을 '어떻게(How)' 할지는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나 100% 내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상황에 끌려다니는 '노동의 노예'가 될 것인가, 아니면 관계를 주도하는 '삶의 주인'이 될 것인가. 그 선택권은 오직 당신에게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할지 선택하는 것은 어렵지만
어떻게 일할지는 항상 선택할 수 있습니다!


ps.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는 AJ 크로닌의 소설 “천국의 열쇠”에 있는 프랜시스 피첨 신부의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노동함으로써 얻는 행복보다 더한 기쁨이란 세상에 다시없을 것 같다. 머리보다는 손으로, 마음을 다 쏟아 일할 때 느끼는 기쁨, 대지의 상쾌한 숨결에 호흡을 맞춰가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천국의 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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