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감, 흔적
바둑판 위에는 참으로 얄궂은 수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자충수(自充手)'입니다. 상대가 나를 가두기 전에, 내가 먼저 나의 활로(活路)를 메워 스스로를 곤란하게 만드는 수이지요. 이기고 싶은 조급함이나 자기 꾀에 빠져, 정작 자신이 숨 쉴 구멍을 제 손으로 막아버리는 이 비극적인 선택은 바둑판 밖 우리 삶에서도 빈번하게 만납니다.
우리가 '실패'라고 부르며 괴로워하는 순간들을 가만히 복기해 보면, 의외로 상대의 공격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둔 자충수 때문일 때가 많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이토록 정성스럽게 자신을 가두는 수를 두게 되는 걸까요?
그 시작은 대개 '자신감'이라는 달콤한 덫에서 비롯됩니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예전에도 이런 식으로 해결했었어"라는 좁은 경험의 부적절한 확신이 우리 눈을 가리는 안대가 됩니다. 한때 나를 승리로 이끌었던 그 화려한 전술이, 오늘이라는 새로운 국면 앞에서는 나를 옥죄는 올가미로 변하는 줄도 모른 채 말입니다.
그 확신은 이내 교만이 되고, 주변의 조언을 외면한 채 오직 '자신만의 수'를 고집하게 만듭니다. 이기고 싶은 욕구,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은 목표의 층고를 한없이 높여놓지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높이까지 욕심이라는 건물을 세우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그 육중한 무게에 눌려 숨 가빠하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결국 실패의 첫 단추는 남이 아닌, 내가 스스로 둔 어리석은 수에서 시작되는 셈입니다.
하지만 실패라는 것이 과연 실재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흔히 눈앞의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그 지점에 서둘러 '실패'라는 마침표를 찍곤 합니다. 마치 그 한 장면이 내 인생이라는 긴 이야기의 결말인 것처럼 서둘러 단정 짓곤 하죠. 하지만 삶은 어느 한순간에 박제된 명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다음 문장으로 묵묵히 넘어가는 과정 그 자체에 가깝습니다.
원하는 대학의 문턱을 넘지 못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실이 인생이라는 큰 흐름을 막아설 수는 없습니다. 물길이 바위를 만나 잠시 돌아간다고 해서 바다로 가는 길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듯, 그 굴곡진 지점이 우리 삶의 종착역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바둑판 위에 여전히 돌을 놓을 여백이 남아 있는 한, 승부는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결코 '실패'를 만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은 언제나 '과정'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주하는 순간의 실체는 실패라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 중에 겪는 '실패감(Sense of Failure)'일뿐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그것은 실재하는 '실패' 때문이 아니라, 내가 세운 높은 목표와 현실 사이의 괴리가 만들어낸 허상입니다.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미리 절망하며 바둑판을 쓸어버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 인생에서 가장 치명적인 자충수가 아닐까요?
사실, 우리 삶의 진실은 결과가 아니라 견뎌온 시간 속에 새겨진 '흔적'에 있습니다. 나무를 보면 알 수 있지요. 적도 부근 따뜻한 나라에서 자라는 나무들에게는 나이테가 없다고 합니다. 일 년 내내 따뜻한 태양 아래서 고통 없이 자랐기 때문입니다. 반면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의 나무들은 혹독한 겨울을 지나며 자신만의 나이테를 새깁니다.
나이테는 차가운 바람을 견디며 성장을 멈춘 듯 보였던 그 고단한 겨울이, 따뜻한 봄을 만나 다시 밀어 올리는 성장의 기록입니다. 겨울의 견뎌냄이 뚜렷한 선으로 나타나는 것, 그것이 바로 나이테인 것이지요.
사람에게도 나이테가 있습니다. 제게도 선명한 나이테가 새겨져 있습니다. 사회 초년병 시절, 정답도 모른 채 온몸으로 부딪히며 살아가던 그 시린 계절과 최고의 성공을 누리고 있다고 믿었지만, 실은 가장 큰 위기 앞에 서 있었던 그 화려하고도 위험했던 시절의 나이테도 분명합니다. 돌아보니 알 수 있는 그 뚜렷한 시간의 선들 덕분에 저는 비로소 오늘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제 '실패'라고 느끼는 그 시간의 육중한 무게를 조금 덜어내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지금 느끼는 그 고단한 '실패감'은 사실 당신의 삶이 멈췄다는 신호가 아니라, 당신만의 선명하고 굵은 나이테가 새겨지고 있는 중일 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요.
당신의 삶이라는 바둑 한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겨울 또한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겪어내는 힘겨운 오늘들은 분명히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증명할 나이테로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