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숨님 Mar 07. 2023

2023.3.7

230307 #일일일그림


전부터 가고싶었지만 거리가 애매해서 엄두를 내지 못하던 전시였다. 일주일 중 아이들이 가장 늦게 하교하는 날, 큰맘먹고 운동화를 챙기는데 남편이 따라나섰다. 출근 시간을 살짝 넘긴 시간에도 경의선 안에는 설 자리도 겨우 찾을 만큼 사람이 많았다. 우리는 선채로 각자 가방에 있는 책을 꺼내 읽었다. 나는 말랑말랑한 에세이를, 남편은 지각심리학 관련 책을.


일년에 한두 번 정도 그림을 보러 함께 가곤 했지만 남편이 그림 앞에서 열성을 보인 적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빠른 둘째 손에 이끌려 아이의 속도에 맞춰 후루룩 보고 나와 소파에 앉아 있거나, 아이들 잠바를 들고 서성이다 먼저 나가서 통화를 하거나. 어쨌든 내게 그림 앞에 가만히 머무는 남편의 뒷모습은 기억 저편을 뒤집고 젖히기를 수십 번 반복한대도 희미하게나마 떠오를까 말까 한 장면이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림 앞에 선 남편은 심상한 표정이었다. 텍스트 페인팅을 보고 남편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80년대 반공포스터 같네요.” 저렇게 관심이 없는데 왜 따라온 걸까? 그러고보니 결혼한 첫 해, 남편은 내가 참석해야 하는 학회 모임에도 따라왔었다. 입구에 놓인 쌀과자를 집어먹고, 팜플렛에 필기까지 하며 자기 일인 듯 경청하는 남편과 끝나고 김치찌개를 먹었던가.


별 생각없이 나의 외출에 동행하는 사람. 시험 볼 일이 평생 없을텐데도 토플 교재를 공부하는 사람. 관심사가 생기면 일일이 손으로 쓰며 공부하고 설명하기 좋아하는 사람. 귓등으로 흘려듣는 나를 보면서도 굴하지 않는 사람. 아이들 내복을 손으로 빨고 새벽마다 깨어 옆에 있어준 사람. 퇴근하면 집부터 돌보는 사람. 나의 주변인들을 기억하고 친근하게 불러주는 사람.


전시장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남편에게 한마디 할까 하다 참았다. 저 사람은 십 년 넘게 한결같았으니 이제는 내 차례인 것 같았다. 그림을 보든 말든, 관심이 있든 없든, 물구나무를 서서 걷는대도 저 사람은 그냥 저렇게 생긴 것이다. 이유가 있어 같이 왔겠지. 어쩌면 혼잡한 지하철에서 내가 기댈 수 있게 하려고 나섰는지도 모른다. 방향치인 내가 전시장까지 무사히 잘 찾아갈 수 있게 하려고 그랬는지도 모르고. “이제 가요. 배고프다.”며 문을 나서는 내게, 앞장선 남편이  말했다. “저쪽으로 가면 당신 좋아하는 거 있을 것 같은데. 내가 아까 검색을 좀 해봤어요.”



매거진의 이전글 2023.3.6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