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우, 마리아 덱, <나의 씨앗 할아버지>
집이 아파트 1층인 건 꽤 즐거워요. 초등학생 손바닥만 한 땅이지만, 언제라도 흙을 만질 수 있는 땅은 단단한 안정감을 줍니다. 매년 벚꽃이 만발하기 전, 겨우내 꽝꽝 굳었던 땅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싶으면 아이들과 땅을 파 뒤집곤 합니다. 작년 겨울 끝자락에는 지나가던 아이 친구들도 들어와 모두 함께 땅을 팠어요. 모종삽으로 바닥을 헤집던 아이들은 금세 산발이 되고, 더운 입김을 내고, 얼굴을 드니 너나 할 것 없이 마스크 끝에 흙이 묻어있었죠. 아직 이르다는 어른들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은 무엇이든 심으려고 했어요. 갈색이 된 산수유 열매, 누가 먹고 던진 듯한 복숭아씨 같은 것들을 잔뜩 주워왔지요. 가을에 떨어져 아직 굴러다니던 은행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은행은 이미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어 껍데기가 없었다면 원래의 크기를 짐작할 수도 없었을 거예요.
몇 번의 비가 오고, 가지마다 흐드러지던 벚꽃이 슬며시 부는 바람에도 푸시시 웃으며 잎을 떨굴 때쯤 마당에 나가 다시 땅을 살펴봅니다. 작년에 심은 꽃 풀들 사이로 삐죽이 솟아있는 줄기가 군데군데 보여요. 삐죽한 줄기들은 주로 벽돌 바로 옆이나 잡동사니 더미 같은 뜬금없는 곳에서 고개를 쑥 빼고 있습니다. 줄기 끝에 난 한 두 개의 잎은 가운데가 살짝 갈라진 초록의 부채꼴. 영락없는 은행잎이었어요. 쪼그라든 은행 한 알에서 어른 팔뚝만큼 긴 줄기가 자라다니, 마당 여기저기 은행알을 심어둔 아이들은 그날 오후, 보물찾기 하듯 은행 줄기를 찾으러 다녔어요.
어릴 때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자주 생각했어요. 조금 더 커서는 어떤 직업을 가지면 좋을지 고민했고요. 요즘은 어떤 어른이 되면 좋을까 종종 생각해 봅니다. 내 앞의 어른들이 심어 둔 씨앗과 나무들이 무럭무럭 자라 지금의 내가 그 열매를 먹으며 살고 생각하고 움직이듯이, 나의 세대가 심는 씨앗이 언젠가 우리 아이들이 따 먹을 열매가 되리라 생각하면 잠시 멈춰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어요. 나는 지금 어떤 씨앗을 모으고 있을까요?
내가 아닌 다른 생명의 입장을 헤아리고 다정한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
쉽게 폭발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
씨앗이 움터서 나무로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없을지라도,
그 나무에서 어떤 열매가 열릴지 영영 알 수 없을지라도
씨앗을 모으는 사람
그것을 잊지 않고 심는 사람
기다리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