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책방지기

‘너의 작업실’ 라떼 이야기

by 숨님

그를 처음 만난 건 바람이 매섭던 2019년 11월 어느 목요일이었다. 모임 장소는 한 동네 책방. 버스를 타기에도 애매한 거리라 걷기로 마음먹고 집을 나섰는데, 세 번째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 정면에서 눈을 뜰 수 없는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을 피해 등을 돌렸다가 그대로 걸어 집으로 돌아가 버릴까 잠깐 망설였던 기억이 난다. 삼십 년 넘게 낯을 가려왔는데 아직 가릴 낯이 남았던 모양이다. 낯선 사람들을 만나 즉석에서 글을 쓰고 합평을 하겠다니. 미쳤나 봐, 내가 이걸 왜 한다고 했을까. 후회를 오십 번쯤 했을 때, 불빛이 보였다. 불 꺼진 상가 1층, 유일하게 불을 밝히고 있던 작은 동네 책방. 그 안에 그가 있었다.


두 달 가까이 만나 함께 쓴 글을 엮어낼 책의 윤곽이 잡힐 무렵, 그는 공간을 열 거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언젠가’ 가 생략된 말인 줄 알았지. 그로부터 두어 달이나 지났나? 그가 적당한 곳을 알아보고 있다고 하더니, 사진을 몇 장 찍어 올렸다. 원래 꽃집이었던 작은 공간이고, 마음에 든다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고, 책상과 의자, 조명을 들였고, 냉장고와 커피 머신을 샀다. 그리고 2020년 4월, ‘너의 작업실’이라고 이름 짓고 문을 열었다. 이때 알아봤어야 했다. 그는 상대의 눈을 피하지 않는 사람, 헤헤 웃으면서 할 말은 하는 사람, 일단 결심하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 저돌적인 사람이었다.


작은 공간은 그럭저럭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가까운 데 사는 이들이 와서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고, 지나던 사람들이 들어와 책장을 구경했다. 몇 가지 클래스도 진행했다. 다행이다. 생각보다 더 잘 자리 잡아 가네. 대단해. 그로부터 석 달 뒤, 다시 그는 선언했다. “작업실 이전해요! 지금 공간은 너무 작아!” 아… 상상 이상이었다. 절대적으로 클래스가 다른 사람. 나와는 생각과 운신의 스케일부터가 달랐다. 그는 더 큰물에서 놀아야 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너의 작업실> 처음 자리에서 보이던 창밖


며칠 전, 북토크가 끝나고 쉬이 발을 떼지 못하고 서성이다 책 포장 작업을 돕게 되었다. 한켠에서 종이봉투를 세던 홍님(그의 남편)이 말했다. “책은 20권이라며? 봉투가 20장이 안 되는 것 같은데?”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응. 그냥 가져가려고. 쇼핑백에 안 담아 가는 분들도 있을 거야.” 돌다리도 수십 번 두들겨 보고 겨우 한 발짝 떼는 사람으로서, 나는 다시 한번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봉투가 모자라는데 저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니. 책이 20권이면 ‘혹시 모르니’ 봉투를 30장은 가져가야 하는 거 아닌가? 인생에 단 하루만이라도 저런 배포로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를 생각하면 한 글자 단어들이 줄줄이 따라 온다. 꿈, 품, 곁, 힘 같은 단어들. 그가 열어둔 품, 내어둔 곁으로 자연스레 사람들이 모인다. 꿈을 이야기한다. 힘을 얻어 간다. 가끔 그는 자신을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눈치지만, 난 그것도 좋다. 괜히 옆에 좀 얼쩡거리고 싶다. 그가 쓴 글을 더 많이 읽고 싶고, 함께 나이 들어가고 싶다. 바지런히 움직이는가 싶으면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고, 머무르는가 싶으면 저만치 앞서가고 있는 사람. 아마도 동네 제일의 오지라퍼로, 여기저기 인사만 해도 하루 24시간이 모자란 할머니가 되어 있을 그 옆에서 괜히 어정거리며 옷자락 끝이라도 슬쩍 잡아보고 싶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