쭉 잘하자는 얘기다. 사랑하는 황 씨.
드라마를 보다가 순간 멈칫했다. 한 장면이라도 놓칠세라 TV 코앞에서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보고 있던 참이었다. “동백 씨, 동백 씨는유~ 동백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하구유, 훌륭한 사람이에유~” 엄지까지 치켜세우며 다른 가능성은 어림 반푼 어치도 없다는 듯 단호한 눈빛으로 말하는 황용식이. 몇 년 전에 했던 약속이 생각났다. 저런 말 잘하는 황 씨가 우리 집에도 하나 있는데.
육아에 전념한다는 이유로 하던 일들을 접고 집에 있은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나의 하루는 부엌에서 시작해서 부엌에서 마감되는 편이었다. 애들이 잠들면 전날 읽던 책을 읽었는데, 이미 여러 번 맥이 끊겨 다시 읽으려면 앞부분이 기억나지 않고 다시 읽기 시작하면 잠이 쏟아지곤 했다. 온종일 하는 일은 많은데 나의 노동에 대해 궁금해하거나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우리 애가 잘 먹는지, 말은 얼마나 하는지, 키는 큰지 같은 걸 궁금해하는 사람은 많았는데, 그런 질문은 대부분 내가 좋은 엄마 노릇을 하고 있는가로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그 무렵 나는 내가 ‘잘’하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거니와 뭘 하고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
“오빠, 내가 어디서 봤는데, 정해진 말을 매일 한 번 이상 해주면 좋대. 상대방이 듣고 싶어 하는 말로.”
이제 막 퇴근해 소파에 기대앉는 남편에게 말했다.
“백지, 어떤 말을 듣고 싶어요?”
수년째 내 말의 핵심과 행간을 파악하는 훈련을 해 온 남편 황 씨였다.
“음… 난 그냥 잘하고 있다고. 지금 잘하는 거라고 해줬으면 좋겠어.”
우리의 약속은 다음 날 아침부터 바로 이행되었다. ‘서로’라고 했지만 나에게 더 갈급한 일이었기에 주로 말을 하는 건 남편이었다. 무슨 다짐을 어떻게 한 건지 그는 마법의 주문에라도 걸린 것처럼 내가 듣고 싶다는 말을 시도 때도 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설거지하고 있으면 뒤에서 불쑥 “백지, 잘하고 있어요!” 했고, 출근하면서도 “백지, 잘하고 있어요!” 했다. 내가 책을 읽든 게임을 하든, 앉아있든 서 있든, 자고 있을 때도 화장실 문 앞에서도 “백지, 잘하고 있어요!”는 계속되었다. 심지어 카톡 프로필 문구도 [Baikji, good job!]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때도 잘하고 있다고 하는 건 뭐야, 놀리는 거예요?”
“아니? 아닌데. 진짜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는 건데.”
“뭐야… 자꾸 들으니까 비꼬는 것 같아.”
말은 그렇게 했어도 자꾸 듣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목적어 빠진 문장이었지만 꽤 응원받는 느낌이었다.
한 번은 엄정화 주연의 <댄싱퀸>이라는 영화를 보고 있었다. 그때 우리가 살던 집은 방 한 개짜리 작은 아파트로, 성인 세 명이 누우면 빠듯하게 들어갈까 말까 한 다섯 평쯤 되는 거실이 있었다. 서울시장 후보 황정민이 후보직 사퇴를 말하고자 단상에 올라 그 전날 아내에게 했던 온갖 망발을 후회하는 장면을 보고 있었다.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소 같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이어지는 황정민의 연설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났다. 아씨, 영화 보다가 훌쩍거리는 거 창피한데. 남편이 눈치채지 못하게 자세를 바꾸는 척하며 눈물을 닦고 뒤를 슬쩍 돌아보았는데… 남편은 이미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채 끅끅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주먹만 안 넣었지 표정은 거의 발리에서 우는 조인성의 그것이었다. 그렇게 우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놀라서 눈물이 쏙 들어갔다. 그 후로 약 7년 간 남편은 주먹을 입에 넣고 조인성급(이었던 황 씨의) 울음을 흉내 내는 나를 보게 된다…….
월 20회 정도 놀리기는 하지만 나는 그가 참 좋다. 블록버스터보다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 나의 작은 말도 기억하고 하루에 백 번씩 돌려주는 사람. 새벽 어느 때 옆에 가 누워도 싫은 기색 없이 매번 팔을 내어주는 사람. 당신이 있기에 내가 마음 놓고 움직일 수 있다. 당신을 안전 기지 삼아 나의 세계를 넓혀갈 용기를 낸다.
황용식이가 말로 동백이를 울리고 있을 때 아직 우리 집 황 씨가 귀가 전이라 다행이다. 같이 봤다면 그는 높은 확률로 매우 우쭐해했을 것이다. 나의 온갖 구박에도 늘 굳건한 그는 자기상(self-image)도 매우 긍정적이어서 어렵지 않게 용식이 대사에 자기를 이입할 수 있었으리라. “오빠, 사랑이 뭐예요?”라는 질문에 나의 안전 기지는 답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바쁜 중에도 이불을 개고 나가는 정성이죠!” … 오늘 아침, 출근 시간 임박했는데 이불 좀 개 달라고 했다고 저러는 거다. 연애할 때 자주 가던 카페 맞은편 백반집이 생각난다. 카페 창가 자리에 앉으면 창문 너머로 백반집 벽에 붙은 커다란 족자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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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 잘하자는 얘기다. 사랑하는 황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