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T.모리슨, 르웬 팜, <곰이 강을 따라갔을 때>
그동안 여러 친구들은 저마다 따로따로 살아왔어.
여기 이렇게 함께 있게 될 줄 몰랐단다.
오랫동안 꾸준히 내성적으로 살았다.
학원에 가면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 몸을 숨겼고, 돌아가며 발표할 때는 차례가 다가올수록 떨었다. 떨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몸에 힘을 주면 목소리는 더 갈라지고 쪼그라들어 내 것이 아닌 소리가 입에서 새어 나왔다. 누가 말을 걸거나 같이 밥 먹자고 하면 안도하면서도 불편해했고, 같이 먹자는 친구가 없는 날에는 혼자 밥을 먹었다. 그게 편했다. 모르는 문제가 있어도 절대로 질문하지 않았으며 답을 알고 있을 때조차 선생님과 눈이 마주칠까 애꿎은 여백에 지우개질을 해대는, 머리로 얼굴을 다 가리고 다니는 키 크고 음침한 여자애. 고개를 숙인 채 머리카락 사이로 힐끔거리던 세상은 좁고 어두웠다. 흑백의 숲속이었다. 자의식 과잉이었던 십 대를 지나 한쪽 다리를 집에 걸친 채 바깥을 향해 코만 킁킁거리던 어정쩡한 이십 대를 보내고, 삼십 대가 되어서야 조금 고개를 들고 다니게 되었다. 머리카락을 걷고 보니 세상은 생각보다 더 선명하고 넓었다.
2주 전쯤 금요일에 책방 일정표를 보고 글방 친구 두 명이 오전에 거기 있을 거라는 걸 알았다. 전 같았으면 그냥 그런가 보다 했을 텐데 그 날따라 왜 그렇게 보고 싶던지. ‘이따 슬슬 걸어가면 얼굴 뵐 수 있나요?’ 하고 메시지를 보내놓고 나는 온갖 소심한 생각으로 조금 괴로웠다. 방해되면 어떡하지, 에이 내가 눈치도 없이 괜히 그랬어, 메시지 보내지 말걸, 하며 어찌나 속으로 동동거렸는지. 머리카락 뒤에 숨어 눈치 보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30분 후 휴대폰이 울렸다. ‘여기로 오세요' 답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휘리릭 짐을 챙겨 나섰다. 책방에서 마시던 커피를 머그잔째로 들고 공원을 가로질러 저쪽 작업실로 걸어가는 길, 찰랑찰랑 커피가 손등으로 흘러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함께 조용히 글을 쓰고, 밥을 먹고 글방 친구 집에 가서 커피도 마시고 오는데 히죽히죽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그저 궁금해서 강을 따라가 본 곰이 강물에 빠져 떠내려간 것처럼, 혼자 조용히 지내던 나도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강물에 손을 담가 본 것이다. 떠내려가며 만나게 된 것이다. 개구리를, 너구리를, 오리와 거북이를. 폭포를 만나 떨어질 때 서로를 꽉 붙들어줄 친구들을. 굴속에서, 풀 틈에서, 물속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던 동물들이 함께 강을 따라 간 자리마다 흑백이었던 숲이 색색으로 물든다. 나는 여전히 내성적이고 온갖 망설임을 달고 살지만 이제 강물 맛을 좀 본 곰이다.
그리고 그건 아주 신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