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무 Dec 24. 2019

"나는 우리를 사랑해"

휴직일기(15) 어쩌면 처음으로 산타가 되고 싶은 크리스마스




"나는 우릴 사랑해"



예전에 봤던 영화 <툴리>에 나온 대사. 육아와 각종 스트레스에 지친 여주인공 툴리가 남편에게 이런 자신에게서 도망치고 싶냐고 물었을 때 남편이 했던 대사다. 보통은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하지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한 게 생소했는데, 요상스러운 이 말이 어째 두고두고 생각이 난다. 그렇게 곱씹어 볼 때마다 참 맞는 말이지 싶다.


누군가와 연인이 되는 건 '나'와 '너' 두 사람이 함께하는 일이다. '나'와 '너'가 함께 대화하고 시간을 보내며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러다 보면 서로를 닮아가고 둘만의 방식 같은 것도 생긴다. 그렇게 둘은 자연스럽게 '우리'가 된다.


그러나 모든 연인이 '우리'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을 하지는 않는다.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내가 힘들어도 참고 견디는 사람들도 많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질 수밖에 없다는 말로 자신의 고통을 외면하면서 아픈 사랑을 하는 사람들. 그 사람은 언제나 자신 있게 말할 것이다.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반면 의문이 들 것이다. "그 사랑을 하는 '나'를 사랑한다고도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느냐"는 물음엔.


'너'를 사랑하지만 그런 너의 곁에 있는 '나'를 사랑할 수 없을 때, '나'는 행복하지 않을 때. 그때는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런 사랑을 하고 있다면 도망칠 용기도 필요하다. 너를 사랑하지만 우리를 사랑할 수 없다는 건, 내가 소외된 사랑을 하고 있다는 뜻일 테니. 그러니 사랑을 할 때는 틈틈이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나는 우리를 사랑해"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는 관계인지.


-예전에 써둔 글







어쩌면, 나는 처음으로 "나는 우리를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는 상태인지도 모르겠다

머리도 일상도 꼬여서 회사도 못 다니겠다고 내팽개치고 있는 이 마당에 말이다



비록 지금 나는 '나'를 충분히 사랑하고 있진 못하지만, '우리'는 사랑한다

내 옆에 있는 사람과 나의 관계에서 다른 점을 통해 배우고, 닮은 점 덕분에 즐거울 수 있으니까



그래서인가? 여태까지의 나와는 조금씩 달라지는 느낌이다

그중 한 가지는 이번 크리스마스엔 누군가에게 산타가 되어주고 싶어 열심히 노력했다는 것

그가 전부터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지만 상황상 갖지 못하게 된 어떤 물건을,

그가 나처럼 이기적인 욕심쟁이었다면 진작에 손에 넣었을 어떤 물건을,

나랑 볼 영화표는 밤새서라도 취소표를 구해오는 그 사람의 능력으론 절대 구하지 못했을 리 없는 물건을,

내가 대신 구해주려고 안 하던 짓을 열심히 해본 것이다



참 부끄럽기도 하고 마음이 따뜻하기도 한 점은

내가 그 사람에게 뭔가를 해준다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보답한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이 생각만큼 내가 얼마나 많은 마음을 받고 있는지 증명해주는 것이 있을까



그제 잠들기 전 통화에서 "산타는 이제 없잖아"라는 내 말에 "아니야, 아직도 있어"라고 그는 말했다

돌려 말하기를 좋아하는 내가 그 말을 "아니야, 내가 선물을 준비하고 있어"라는 의미로 홀랑 해석해버렸다는 걸 그는 알까?

예전 같으면 '안 주기만 해봐라 흥흥' 이러면서 미리 섭섭해하면서 벼르고 있거나 '갖고 싶은 거 떠보지도 않는 걸 보니 나한테 관심이 없나'라며 나를 괴롭혔을 불안감이 '우리' 안에서는 들지 않는다

오히려 '내일 내 산타 노릇을 해주지 않으면 잔뜩 놀려줘야지! 그래서 당황하는 얼굴 보고 웃어야지!'라는 즐거운 기대감만 가득하다



지난번 상담에서 다른 사람이 내 말에 부정적인 반응만 할 거 같다는 고민을 터 놓았을 때, 그 중심에 있던 사람은 남자친구였다

그러자 선생님은 "그 사람이 OO씨를 좋아하는 정도를 1에서 100까지라고 하면 어느 정도인 것 같아요?"라고 물었고,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100이요......"라고 답했다

내 고민과 참으로 맞지 않는 나의 답, 나는 100의 마음을 받고도 불안해하는 게 우선인 참으로 피곤하고 어린 사람이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창피하다ㅠㅠ)



그렇지만 내가 '우리'에 속할 때는 그냥 우리로 있는 그 자체가 즐겁고 좋고 따뜻하다

그래서 늘 내가 사랑하는 '우리'의 모습을 '나'의 모습으로 닮아갈 수 있게 열심히 노력하는 중이다



큰 밝음이라는 뜻을 가진 그의 이름이 나는 너무 좋다

그 밝음이 우리 안에 스며들 때마다 한 번도 빠짐없이 고맙다

동시에, 은혜를 알라는 뜻의 내 이름이 힘 빠지게 딱 맞아서 부끄럽기도 하고



내일 이 모자란 산타가 준비한 선물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안 들어도 어쩔 수 없다! '우리' 사이에서는 내가 짱이니까!



내가 창피하다고 해놓고 짱이라고 마무리하는 바보 같은 끝이어도 상관없다

나는 그냥 오늘도 내일도 우리를 사랑해



히히


이전 18화 나를 너를 닮고 싶은데, 네가 내게 옮을까봐 걱정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