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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Jan 22. 2020

나를 너를 닮고 싶은데, 네가 내게 옮을까봐 걱정돼

휴직일기(22)읽히고 싶은 마음, 잃고 싶지 않은 마음


"여행 다녀오고 나서 나는 집에 한번도 못 갔단 말이야.."



남자친구가 퇴근하고 본가에 간다고 해서 나랑 놀자고 땡깡을 피워봤다

이미 집에 간다고 말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집에 가는 것이 당연히 선약이었다

최근에 남자친구와 여행을 다녀온 뒤 나는 일이 있어 본가를 몇 번 드나들었으니 상대방을 못 가게 하는 것은 분명 반칙이었다

원래 같았으면 그냥 그러려니 했을 텐데 기분이 좋지 않아 생각이 많아진 날이라 그랬나, 갑자기 궁금해졌다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은 뭐지?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을 나도 가져본 적은 있다

회사 다니며 자취할 때 집에 가서 할머니랑 있으면 좋기도 좋고 편하기도 편했다

그렇지만 점점 할머니 나이가 들면서는 일종의 의무감과 두려움 같은 게 생겼다

할머니가 언제까지나 내 곁에 계신 게 아니니까 되도록 많이 가야지, 안 가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테니까 가야지..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집으로 갈 때마다 기쁜 마음보다는 아릿한 마음이 더 커져만 갔다

진짜로 집에 가고 싶은 날도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집에 가야해서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해서 가는 날이 훨씬 더 많다



우리집을 떠올리면 막연히 답답하고 부담스러운 분위기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왜 자꾸 과거를 회상하면 안 좋은 기억들만 떠오르는지 모르겠는데, 어릴적부터 우리집 분위기가 밝은 적은 잘 없었다

돈돈하는 소리, 교회를 가네 마네, 어쩌고 저쩌고 듣기 싫어도 자꾸만 들리는 엄마아빠 목소리..

지난 심리검사 때 '가족이 무언가를 하는 모습'을 선뜻 그리지 못했던 건 당연한 것이었나 싶기도 하다

무의식중에 모든 집이 다 화목하지는 않나보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그 질문에 싸우는 모습을 그릴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문득 궁금해진 것이다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은 무엇인지


쉬는 날만 되면 2시간 거리나 되는 집으로 가고 싶은 건 왜인지

심부름을 시키고 귀찮은 일을 시켜도 투덜대면서도 기분좋게 할 수 있는 건 왜인지

그냥 가족에 대해 말하는 얼굴에 웃음이 묻어나는 건 왜인지

겉으로만 봐도 나와 다른 5살을, 11살을, 16살을, 22살을 거쳐왔을 이 사람네 집의 하루하루는 어땠길래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지 나는 너무 궁금했다



너도 나처럼 집을 생각하면 답답한 마음이 들 때가 있냐고

집에 안 가도 마음 편하고 싶은 날들이 더 많으냐고

집에 가고 싶은 네가, 집이 너무 버거운 나를 이해할 수 있냐고

가끔은 물어보고 싶지만 물어볼 수가 없다





제가 나쁜 영향을 미치지는 않나요?



직장인이 돼서 취업걱정이 끝나자마자 이제 가족들은 결혼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좋은 놈, 착한 놈, 괜찮은 놈을 데려와야 할 텐데 걱정을 가득가득 하다가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말에 그 애는 어느 대학 나왔니, 직업이 뭐니, 어쩌고저쩌고 궁금해하고 속으로 평가하는 듯했다

그런 조건을 따지는 모습이 이해는 됐지만 (당연히 내가 잘 살기를 바랄 테니) 마음이 많이 찔렸다

나는? 내가 뭐 그렇게 잘났다고 따지고 있어? 이런 생각이 들어서



쌩뚱맞지만 회사 사람들의 이야기에 솔깃해서 신점을 본 적이 있다

이름과 생년만 말하면 술술술 온갖 것을 말해주던 신기한 출장 신점아저씨

어리버리하게 질문하다 이제 그만 가보겠다는 신점아저씨를 순순히 보내주고, 회사 사람들에게 너무 짧게 봐준다고 하니 원래 그런다며 붙잡고 늘어졌어야 했다고 했다

망설이다가 꼭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 전화 A/S라는 기회를 사용했다 (3일 내에 전화를 하면 질문에 답을 해주는 것이었다)



"제 남자친구에 대해서 궁금한데요 000, 0000생이에요, 제가 그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지는 않나요?"

"괜찮을 것 같은데요, 나쁘지 않아요"



너무 다행이었다

그때는 진단도 안 받았고, 그냥 회사 열심히 다녀보자고 마음 먹을 때였는데도 나는 저게 제일 궁금했다

뭔진 몰라도 그때부터 나랑 너무 다른 사람이라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신점이라는 게 진짜 맞는지 아닌지도 모르지만 저 말 때문에 나는 그 아저씨 말을 다 믿고 싶다

나는 밝고 맑게 자라온 사람에게 티를 남기고 싶지는 않다





나한테 궁금한 거 없어?



남자친구는 내가 제발 뭐 물어보라고 하기 전까지는 함부로 질문도 안 한다

괜히 질문했다가 내 기분이 상할까봐 못 물어보겠다고 한다

사귀기 전에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미리 알려주었는데 그 이유도 묻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바로 물어보던데..

나중에 왜 안 물어봤냐니까 그냥 내가 더 잘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는 말만 하고 결국 또 안 물어봤다



여행에서 간신히 질문거리를 캐내니 가장 먼저 한 질문이 자기 첫인상, 두 번째가 언제가 제일 재밌었어?였다

사실 나는 '네가 먼저 물어봤음'이라는 핑계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결국 하지 못했다

방구석에서 갑자기 나를 엉엉 울게 만드는 일들을 말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이상한 죄책감이 든다

꼭 커다란 과일상자 밑에 무른 과일들을 숨겨놓곤 위에 보이는 과일들로 잘 가려서 좋은 과일로 속여판 것처럼



어제는 기뻤다가, 오늘은 무기력하고, 내일은 모든 게 허무한 날이 된다고

불안으로 가득했다가, 한동안 좀 괜찮아진듯 보냈는데, 요며칠은 이상하게 너무 우울하고 슬프기만 하다고


신나게 전화를 하고, 카톡을 한 다음 갑자기 너무 슬퍼서 울다가 자는 날도 있다고

은연중에 함께할 미래를 이야기하고 돌아온 다음 침대에서는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 때도 있다고


너는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집에서 자랐으니 당연히 미래에도 그런 집을 만들어가겠지만

나는 집이 뭔지도 모르겠고, 내가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지조차도 몰라서 짐만 될 거 같다고



말하고 싶었다가

말을 안 해도 읽어주면 좋겠다 싶었다가

그랬다간 영영 잃어버릴 것 같아서 오늘도 그냥 가만히만 있었다







나는 남자친구의 착하고 밝은 모습을 닮고 싶은데

남자친구가 내 골치아픈 생각에 옮을까봐 걱정이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결국 빨리 건강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는 것밖에 없어서 오늘도 약을 먹고 잠에 들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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