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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Dec 16. 2019

뭐든 잘한다는 남자와 뭐든 못한다고 하는 여자의 만남

휴직일기(7) 나를 그대로 드러내면 사랑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 대하여



내겐 나와 닮은 남자친구가 있다

친구들이 처음 보자마자 '완전 남자 OO이(내 이름)'라고 탄성을 내질렀을 정도로 닮았다


어쩐지 만만해 보이는 인상

나이에 맞지 않는 어린 목소리

강원도와 충청도를 섞어놓은 듯한 말투(고향은 둘다 수도권. 심지어 그는 서울남자다)

이상한 생각하는 걸 좋아하는 것

그리고, 눈을 잘 내리깐다는 점이 닮았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다

눈을 내리까는 방법이 다르다


그는 평소엔 드러나지 않는 옅은 속쌍꺼풀을 드러내며 눈을 내리깐다

턱을 켜올린 채로 우쭐해하며, "짱이지?"라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나는 시선을 아래로 향하며 고개를 숙인다

자신 없는 말투로 "나 이거 잘은 못해", "안 될 것 같은데.."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렇다

내 남자친구는 뭐든 잘한다고 말하고 보는 타입이고

나는 뭐든 잘 못한다고, 모른다고 빼고 보는 타입니다


웃기게도 그와 뭔가 내기를 했을 때는 승률은 내가 월등하게 높지만 (그는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무엇이든 자신 있다 말하고, 졌다고 기죽지도 않는다


그런 근자감이 처음에는 생소했고, 조금 지나서는 이상하고 바보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에게서 닮고 싶은 특징 중 하나가 됐다


잘해도 불안하고 걱정 가득한 나보다

못해도 언제나 자신 있는 그가 훨씬 행복하기 때문에

심지어 그 행복이 나까지도 웃게 해주기 때문에










이제는 아득해져버린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의 나는 그의 지금과 비슷했다

언제나 자신 있게 손을 들고 발표하는 애였다

발표를 안 시켜줘서 투덜댔다고 혼난 적도 있을 정도로 "저 이거 알아요!"를 티내고 싶어하는 애였다


4학년 때부터였을까, 나는 더이상 손을 들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을 마칠 때까지, 수행평가에 발표점수가 들어간다고 할 때에만 생존을 위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들기만 했을 뿐 절대 먼저 손을 들지 않았다


갑자기 바보가 되어서가 아니었다

알아도 안다고 말할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그 시작은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언젠가부터 '나서면, 내가 아는 티를 내며 애들이 나를 미워할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소심한 성격 탓에 친구를 쉽게 사귀지 못했기에

있는 친구들을 지키는 것, 최소한 안 친한 애들이 나를 미워하지 않게 하는 것이 내겐 중요했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면, 그래서 잘하는 것을 잘한다고 티내면
-> 선생님은 나를 예뻐했고, 그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쌓여 나를 편애했다
-> 그럼 친구들은 나를 미워하거나 (재미없는 모범생 같은 존재로 생각하고) 무시했다


잘해야 하지만, 눈에 띄게 잘하면 안 되는 이상한 메커니즘에서

나는 내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사랑받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미움받지 않기 위해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 버릇은 내게 피부처럼 달라붙어서 어른이 되고 회사원이 되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회사에서 아이디어 회의를 하면 나는 언제나 자신 없어했다

정말 자신이 없는 때도 있지만, 좋은 아이디어를 준비했다고 생각할 때에도 티를 내지 못했다

회의에서 나온 아이디어 중 내 아이디어가 가능성 있다고 생각해도 어필하지 못했다


이제는 업무적인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나를 드러낼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다

누군가 나를 경계할까봐, 그렇게 나를 미워해서 회사라는 사회에서 고립시킬까봐,

나는 적당히 바보인 척 행동하며 눈을 내리깔고 또 내리깐다


일을 못해도 불안하고, 일을 잘해도 불안하고

나를 드러내면 사랑받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내 불안은 가실 날이 없다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적당히 바보가 되며 살아온 나

최근엔 남자친구의 근자감을 배우려 노력하고 있다



그를 보면서 잘하는 걸 잘한다고 해도, 심지어 못하는 걸 잘한다고 해도

미움받지 않는다는 걸 조금씩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잘한다고 나섰지만 못하면, 그냥 좀 머쓱해하며 주변에 웃음 좀 주면 그만이고

그게 아니면 다음엔 연습해서 더 잘해봐야겠다고 으쌰으쌰하면 그만이더라


잘한다고 했는데 진짜 잘하면 자신감 있는 사람이 되고

배우고 싶고, 그 일을 할 때 같이 하고 싶은 사람이 되더라


뭐 이런저런 영향을 끼치지 않아도 그냥 '원래 그렇게 근자감 있는 사람'이 되더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냥 그런 사람으로 인식되고 받아들여지더라




소외와 미움에 대한 공포에 바로 굴복해버리지 말고

진작 나도 한번 내 모습을 주변 사람들에게 그대로 들이밀어 볼 걸 그랬다

어쩌면 알면 안다고, 잘하면 잘한다고 드러내는 내 모습이 당연한 모습이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다행인 것은,

어리석은 생존방법으로 사회적인 무인도에서 탈출했던 어린아이 곁에

이제는 "짱이지?"를 연발하는 건방지면서도 사랑스러운 선생님이 곁에 있다는 것


가끔은 골 때리는 그 근자감을 보고 배우면 나는 조금 덜 불안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모습을 보이는 그를 내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있음이

그 역시도,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도 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나와 닮은 내 남자친구를 더 많이 닮아가고 싶다

이 말을 전하면 그는 또 눈을 내리깔며 말하겠지

"짱이지?"





며칠 전 꿈을 꿨다
졸업 후 찾아간 고등학교에서 우연히 동창들을 만났다
학창시절 친해지지 못했던 아이들이었는데, 나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이따가 자기네 집에 놀러오라고 했다
원래 성격 같았으면 가고 싶어도 거절했을 텐데 꿈속의 나는 용기가 났는지 그러겠다고 했다
그 대화를 마치도 나는 안도했다
저 친구들은 날 미워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쩌면 나를 드러내면 미움받을 거라는 건 내 착각이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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