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일기(8) 잊었던 일상의 한 조각을 복구했다
불안을 떨치고 싶어서 병가를 냈는데, 병가를 낸 뒤로 불안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주어진 시간 안에 내 문제를 알아내고 해결하고 싶어서 자꾸만 조급해진다
이런 생각에 자꾸만 남은 날을 계산하고, 지나간 시간에 점수를 매기게 된다
회사에 다닐 땐 퇴근 후에나 주말에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도 '난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어떤 행동이나 활동도 허투루 해서는 안 될 것 같아 자꾸 무언가를 찾아보고 시작하려 하게 됐다
그래서 수영도 다니고, 재봉틀도 배우고, 헬스도 하러 가고, 라인댄스도 하고, 요리도 하고, 브런치도 한다
어찌보면 하고, 하고, 하고, 하고, 하고, 하고 또 하던 챗바퀴에서 겨우 벗어나놓곤
또다시 하고, 하고, 하고, 하고, 하고, 또 하는 또다른 챗바퀴에 올라탄 셈이다
어제 한 일: 남자친구와 연극 보기, 저녁 먹고 와플도 먹고, 카페에 가서 수다 떨기
8년 연속 예매율 1위라는 연극은 타이틀값을 제대로 했다
웃긴 설정, 대사, 연기로 TV를 봐도 잘 웃지 않는 나를 참 많이도 웃겨줬다
카페에선 무슨 대화를 했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냥 빈틈없이 즐거운 시간이었다
오늘 한 일: 캐리비안베이에 가서 11시부터 5시까지 놀기, 서울로 돌아와 샤브샤브 배터지게 먹기
회사 출근할 때보다 더 일찍 일어나 지하철을 타고 약속장소로 가 남자친구를 만났다
어젯밤부터 카톡에서 난데없이 시작된 무전놀이를 오늘도 이어가며 '적에게 들키지 않고 접선에 성공'해
셔틀버스에서 사이좋게 김밥을 한 줄씩 까먹고 꿀잠을 자는 사이 캐리비안 베이에 도착했다
그리곤 오늘 남자친구가 평가한 대로 "처음 가본 사람 티 안 나게" 재밌게 놀았다
튜브 타고 둥둥 떠다니기만 하면 되는 유수풀에서 택배인 척 하며 옥천HUB에 갇힌 척 하기,
바디 슬라이드 탈 때 팔과 다리를 X자로 하고 타라는 말에 '와칸다 포에어' 백 번 말하면서 장난치기,
튜브 슬라이드 타면서 이상한 음으로 비명지르기,
야외 온천탕에서 마사지 하며 괴생명체에 잡힌 척 발연기 하기, 죠스 흉내 내며 영상 찍기 등등등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상황극을 했다가 과거 추억팔이를 했다가 그냥 말없이 있다가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각종 시설을 모두 섭렵하며 눈꼽만큼의 미련도 남지 않을 정도로 재밌게 놀고 나왔다
마지막에 미리 준비해 온 초코송이와 프링글스, 그리고 편의점에서 산 음료수를 먹으며 돌아온 뒤
도보 30분 거리에 있는 샤브샤브 뷔페에 부랴부랴 걸어서 마감 시간에 쫓기며 와구와구 먹기까지
오늘 갔다 오늘 돌아온 나들이였는데 집에 돌아오니 마치 1박2일 여행을 다녀온 듯한 기분이었다
하루종일 참 실없는 말만 잔뜩 하고, 의미 있다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약 0.1g 정도만 겨우 했는데도 정말 시간을 알차게 잘 보낸 느낌이다
체력이 아주 바닥나서 내일 아침에 예정된 수영 수업에 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는 상황인데도 후회되지 않고 마음이 충만하다
그냥 남들 흔히 하는 데이트를 했을 뿐인데
하루 잘 놀았을 뿐인데
마음이 참 좋다
이렇게도 써보고, 저렇게도 써보려고 했지만 결국 초등학생 일기처럼 오늘 한 일을 구구절절 적어낼 수밖에 없게 된 오늘의 글
오늘 했던 그 어떤 생각보다도 그냥 오늘의 일상 자체가 완전해서 이렇게 쓰는 게 최선인 것 같다
무언가를 배우고, 만드는 것도 물론 즐겁다
그러나 진짜 목적은 나 스스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함이다
미래의 내가 또다시 아프지 않게 도와줄 방법을 이번 기회에 어떻게든 알아내야 하니까.
즐거운 동시에 조금은 부담이 된다
그러나 어제, 오늘은 그냥 즐겁고 신났다
어제 그 극장에 있던 한 아주머니 즐거운 만큼, 오늘 워터파크에 있던 꼬맹이가 신나는 만큼 나도 즐겁고 신났다
그저 오늘의 즐거움을 위해서만 보내서, 미래의 내가 어쩌네 저쩌네 이런 걱정은 접어두고 헛소리만 실컷 할 수 있어서 그랬다
오늘의 이 기분 좋음을 글을 통해 되뇌이면서
챙기지 못하는 게 언젠가부터 당연해진 일상들을 하나둘씩 복구해나가는 것도 소홀히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오늘 하루 잘 보내서 다행이야
이런 평범함이 나에겐 필요했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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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친구를 사귀고 초반에 가장 많이 한 일은 카페에 가서 내 회의 준비를 하는 일
혹은 그러지 않기 위해 만나기 전날 새벽을 꼴딱 새서 회의를 준비하는 일이었어요
그 이후에는 만나기로 해놓고 일 터져서 혼자 기다리게 하기, 그리고 미안해하기였네요
그런 날들에 익숙해져서 이렇게 마음껏 놀기만 한 오늘이 참 기쁘고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