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갈수록 일찍 일어나게 된다.
하나도 노리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된다.
스무 살 중후반 때까지만 해도 이럴 수가 없었다.
본인의 멘탈이 강하지 못해서, 항상 잠을 못 자면 아쉬워했다. 조금이라도 더 자고 싶었다고 생각했던 날들, 대부분의 사람들한텐 당연한 생각들을 가졌었다.
열심히 바꿔봤다, 나를. 작년에 비공식적인 나의 슬로건은 ‘기계가 되자’였다. ‘Machine’이라는 말이 너무 멋있었고, 지금도 그 말을 머릿속에서 외우면서 정체를 분명하겐 알 수 없는 초능적인 에너지와 쾌감이 일시적으로 온몸을 돈다.
극 성장이라는 말도 너무 좋아한다. 자연은 발란스를 좋아한다. 그런데 이건 발란스를 무너뜨려서 나중에 자연에게 빚을 갚는 식의 무리한 성장이 아니다. 이건 자연이라는 아름다운 틀 안에서 최대치를 발휘하는 수준의 극 성장이다.
왜냐하면 난 요즘 늘 술을 먹는데 늘 일찍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도 일을 열심히 한다. 이건 누굴 누르려는 못난 마음에서 나오는 글이 아니다. 요즘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조심스럽고, 솔직히 어색하다. 미움을 받아야만 예술이라고 생각해서, 모든 행동에서 적당히 미움을 사는 용기를 전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바보가 나였다.
어쨌든 지금은 아니다. 그저 이 마음들을 나누고 싶을 뿐이고, 나보다 더 극 성장하는 사람들, 늘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더 찾고 싶을 뿐이다.
(아 참고로, 어느 출판사에서 같이 책을 내기로 했는데 문어체로 글 써 달라 부탁해서 이렇게 쓰는 중이니 이 뭐뭐 다 말투 이해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되게 어색하지만 동시에 한국의 옛날 스타일 군인 되는 기분이다. 절도 있고 시원하네 이.. semi 문어체 느낌의 투.. 말이다.)
잠을 덜 자는 것이 자동화됐다. 내 무의식 안에서 나를 무언가가 계속해서 깨우고 있다.
‘넌 더 커야 해, 그리고 넌 경쟁하는 게 아니야. 신이 존재한다는 걸 삶으로 보여줘야 해. 그게 다야. 이건 너의 운명이고 넌 그 운명을 사랑하잖아’
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적당한 비판을 받을 때 쾌감을 느끼기 시작하면,
그건 성장을 사랑한다는 증거라 생각한다.
요즘엔 욕먹으면 기분이 좋을 때가 많다.
예전에도 그랬는데 차이를 설명하자면 예전엔 욕하는 상대를 이기기 위해 많이 싸웠다. 그리고 이기면
거기서 쾌감을 얻었다.
뭐 나름의 낭만이 있는 사고였었다.
지금은 이기기 위해 이러는 것이 아니다.
고쳐먹는데 제일 좋은 게 상대방의 진심이 담긴 욕이다.
‘너는 이러이러한 게 별로야, ㅂㅅ아’
그들의 솔직함을 감정적으로만 해석하면 내 안의 도마뱀이 같이 싸우려고만 한다, 혹은 도망가려고 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안에 있는 깨어있는 영혼은 그 말의 사실 여부를 판단하고, 거를 것은 거르되, 그 안에 사실을 가지고 혼란을 정리해준다.
그러면 눈 안에 더 투명해지고 더 선명해진다.
시야 안의 모든 화질이 올라간다.
세상에서 나는 소리들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된다.
상대방의 마음을 더 잘 헤아린다.
감사할 것이 온누리에 더미처럼 쌓여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 식구들이 나의 성공의 가장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을 느끼며 그들에게 더 잘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 안에 새긴다.
지켜주고 싶게 된다.
눈물이 나게 된다.
참 어리구나, 참 성장해야 하는구나를 또 느끼게 되고, 멋있는 사람으로 더 거듭나서 내 짐을 들고 가야 한다는 것을 또 느낀다.
그런데 또 공포가 밀려온다.
이 직업은, 이 인지도와 유명세는 크나큰 나무와 같다. 무너질 때 소리가 크다. 그림자가 잔디보다 길다. 나는 완벽하지 않아. 난 인간일 뿐이다. 하지만 언제나 날 무너뜨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슬프지만 건강을 의식하고 사는 나이가 됐다. 그리고 얻은 것이 많아지면 참 얄밉게도 잃을 것도 많아지게 되어, 성격이 점점 보수적으로 변한다.
그리고 다시 용기를 낸다. 이 반복이다.
늘 이런 반복. 반복은 길게 생각하면 참 지루한 것이다.
좋은 노래를 두, 세 번 듣는다 생각했을 땐 너무 좋지만, 영원히 듣는다는 것으로 생각하고 들으면 가장 잔인한 소음이 될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이게 내 안의 답이다.
내일 바뀌어도, 인간의 가변성에 대해서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단순함을 갖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