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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생활자KAI Aug 13. 2019

독일에서 살아남기의 필수 조건, 참을 인(忍)

성격 급한 사람들을 위한 마음 사관학교

오늘 아주 반가운 소식(gute Nachricht)이란 제목의 이메일을 받았다. 내용인즉슨 내가 주문한 상품의 배송일이 2주 후였는데 1주일 후로 앞당겨졌다는 것이었다. 보통 하루면 오는 한국의 배송 시스템에 빗대어보면, 헉; 소리가 나지만 어느새 독일의 느린 배송에 익숙해진 터라 내용 자체가 귀엽게 느껴졌다.


피식. 웃음이 났다.

독일에 살다보면 배송 기간 일주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얼마 전 주문한 책은 한 달 후에 온단다. (새로 인쇄라도 하는 걸까.) 간혹 운이 좋으면 이틀 만에 오는 경우도 있지만( 이틀 만에 보내주는 회사들은 굉장히 빠른 배송을 자신들의 강점으로 소개한다. ) 대체적으로 3~4일 이상은 기본으로 기다려야 하는 것이 독일 배송 시스템이다.


가구는 거의 경악을 금할 수 없을 정도로 시간과의 싸움을 벌여야 하는데.. 침대 배송이 12주가 걸린다는 답변을 받은 적도 있다. 결국 한 친구는 남편이 자동차 위에 침대를 실은 뒤 밧줄로 묶어서 가져온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만들기도 했다


배송 자체도 느릴 뿐만 아니라, 배송된 물건을 받는 것도 한국과는 달라서 처음 독일에 살게 된 한국인은 혼돈을 느낄 때가 많다. 누구나 한 번쯤은 택배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을 것이다.


보통 배송 전 전화를 주고, 부재 시 경비실에 맡겨주는 한국과 달리 일단 독일 택배는 개인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지 않는다. 맡겨 둔 장소의 사진까지 찍어서 문자메시지로 보내주는 쿠팡맨이 간절해 지는 순간이다. 쿠팡맨은 독일로 배송이 안되냐고 건의하고 싶다.


독일의 택배 시스템은 먼저 집에 와서 벨을 누르고, 사람이 없으면 우편함에 배달원이 다녀갔다는 혹은 이웃집에 맡겨 놓았다는 편지를 남긴다. 한국처럼 호수가 아닌 이름으로 수령자를 확인하기 때문에 만약 갓 이사 와서 집 문에 내 이름이 없다면 그냥 가버린다.

이웃집에 택배를 맡겼다는 DHL 편지



간혹 날라리 기사님은 내가 집에 있는데도 이웃집에 맡겨버리고 가기도 한다;

이웃집에 택배를 맡겼다는 편지가 우편함에 있다면 이름이 적혀있으니 그 집을 찾아가면 된다. 반대로 나 역시도 택배를 맡겨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한다.  

기사님이 다녀 갔다는 편지를 남겨놓은 경우 다시 한 번 더 방문하거나 내가 직접 DHL 혹은 지정 택배 업체로 찾으러 가야 한다. .


처음엔 택배를 받으러 갈 자신도 없어서.. 택배가 오는 날이면 하루 종일 집에서 택배를 기다렸다. 택배 하나로 하루가 다 날아간 기분이랄까. 어쩌다 약속한 다음날 택배가 오면 분노로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거의 택배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그나마 대안이라면  PAKET SHOP이 있어서 우리 집 근처에 있는 파킷샵으로 지정하면 그곳에 가서 찾을 수 있다. 이마저도 영업일이 오후 6시 정도까지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개인 사생활 차원에서 보자면 전화를 걸지 않는 게 좋을 수도 있지만.. 빠르고 신속한 한국 택배 시스템에 길들여져 있는 한국인으로선 이 시스템이 생소하고 불편하다. 한국에서 책은 오전에 주문하면 오후에 받을 수 있다고 하니, 독일 사람들은 엄청나게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어떤 시스템을 구축했길래 그렇게 빠른 배송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나는 도리어 되묻고 싶다. 대체 뭘 하시길래 배송이 한 달이나 걸리냐고.


독일의 대표적인 배달업체 푸도라. 세상에 자전거로 배달을 하다니..


독일에서의 느림은 거의 모든 생활
전반 부분을 차지한다.


빠름이 전제조건인? 배달음식도 기다려야 한다. 배달음식을 주문하면 30분에서 정말 길면 1시간 이내에 배달이 가능한 한국이지만 독일에서는 2시간까지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배달 업체 자체가 다양하지 않을뿐더러, 오토바이가 아닌 자전거로 배달을 하기 때문에 빠를 수가 없다. 자전거로 배달을 하다니.. 처음에 나는 문화충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빠른 배달 시스템이라고 광고를 한다; 더군다나 음식도 햄버거, 피자, 베트남 음식, 일식 정도가 전부다. 삼겹살까지 배달되는 한국과는 비교가 안된다. 그렇다 보니 배달보다는 그냥 내 한 몸 희생하자며 만들어 먹게 된다. 최근들어 도미노 등 일부 대기업에서 자동차 배달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는 추세이긴 하지만 여전히 자전거가 압도적이기에 빠른 배달은 요원해 보인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시간


집에 문제가 생겼을 때도 나는 기다려야 한다. 관리실에 전화 한 통이면 당일에 바로 손을 봐 주시는 한국과 달리, 독일은 하우스 마이스터와 우선 약속을 잡는다. 최근에도 화장실 세면대에 문제가 있었는데 목요일에 연락을 했으나 월요일에 방문을 했고 심지어 약속시간보다 1시간 늦게 왔다.  1시간 늦은 건 넓은 아량으로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어쨌든 약속한 날짜에 왔으니 말이다.


시간을 잘 지키기로 유명했던 철학자 칸트 때문인지 몰라도 독일 사람들은 칼같이 약속을 지키고 빠르게 일처리를 해줄 것 같지만 절대 아니다.


국가의 이미지란 이토록 중요한 것이었다. 독일 사람들이 시간을 잘 지킨다는 것은 막연한 선입견일 뿐이었다. 그냥 다 비슷한 갑남을녀다. 시간을 잘 안지키는 이들도 많고.. 매번 약속을 바꾸는 친구도 있고.. 학원 수업때도 늘 지각하는 학생이 있다. 국민성이라기보다는 그냥 이 지구촌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가 맞을 것 같다.


행정처리를 할 때는 더 오래 기다려야 한다. 특히  정착기에는 행정처리할 일이 많은데 제일 많이 들은 이야기가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병원, 집 계약, 보험 등 뭐든 예약이 필수고, 한 번에 되는 경우가 잘 없다. 일단은 "기다리라"는 말이 돌아온다.  


여기서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기다리라고 했다고 무조건 기다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박준 시인의 시집을 빌어..
"운다고 달라질 일은 없겠지만.."이 아니라
울어야 달라진다.
확인하고 묻고 재차 또 물어야 한다.


그래야 혹시 일이 어그러져도 내가 할 말이 있고, 컴플레인도 할 수 있다. 행여나 본인들 실수로 서류가 잘못되도 미안하단 말도 잘 안 한다.

미안하다는 Tut mir leid 보다는 Entschudigung을 많이 쓴다. 미안하다고 말하면 자신이 모든 걸 책임져야 하는 걸로 간주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가끔은 이 콧대 높음에 한없이 내가 작아질 때도 있다.


독일 사람들 역시 서비스 부분에 있어서는 많은 불편을 느낀다고는 말한다. 그렇다고 개선이 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운이 좋으면 빨리 되는 거고 아니면 어쩔 수 없고.. 말 그대로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답답하기 짝이 없는 느림에도 장점은 있다.
 

한국에서는 직업적인 특성 탓도 있었겠지만 나야말로 한 성격급함이었다. 그런데 여기 있다보니 나도 모르게 성격이 느긋해져 있었다. 이제 웬만해서는 화도 잘 안 난다. 나보다 더 성미 급한 남편도 어느새 제법 온순한 양이 되었다. 독일의 답답한 느림이 준 보상 아닌 보상이랄까. 1년 정도 독일에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간 친구는 남편이 다시 성격이 급해졌다며 독일에 한 반년만 보내고 싶다는 농담 아닌 농담을 전해왔다.


그렇다.

독일은 성격 급한 사람들을 위한 “마음사관학교”였다. 이곳에 있다 보면 저절로 도를 닦게 된다. 언젠가는 될지니.. 마음에 주문을 건다.

경험 상 안되지는 않는다. 기다리다 보면 답이 오고 해결도 된다. 단 한국에서보다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릴 뿐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 인생이 기다림이다.


빨리 어른이 되기를 기다리고,

합격 소식을 기다리고,

인연을 기다리고,

전역 날짜를 기다리고,

버스를 기다리고,

물이 끓기를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린다.


소설 <연금술사> 속 파티마는 하염없이 사막을 바라보며 연인 산티아고를 기다렸고, <어린왕자>의 비행사는 우주를 바라보며 어린왕자가 돌아올 날을 기다린다.


견디기 힘들지만 할 수 밖에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기다림이다.

기다림과의 싸움이 가능한 건 어떤 목표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목표지점을 도달하기 위해 기다리고 또 걸어간다.

어느새 “기다림의 낭만” 비슷한 것도 생긴다.

본의아니게 모국의 편리함에 감사한 마음도 든다.


그러니 조급해 할 필요도 없다.

늦는다고 속끓이다보면 내 속만 탄다.

그럴바야 노선을 바꿔 마음의 수행을 닦는 편이 낫다.내려놓고 보면 한결 너그러워진 내가 문득 보인다. 좀 더 숙련이 되어 기다림의 고수가 된다면 이 여인처럼 우아하게 기다림을 받아들이게 되는 날도 분명 올 것이다.  


                                                                                                                                                                        

<Expectations>, Lawrence Alma-Tade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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