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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생활자KAI Oct 03. 2019

우리가 무관심할 때 괴물은 깨어난다

독일다크투어/부헨발트수용소(Buchenwald)

                                                                                                                                                                                                                                                                                                                                                                                                                                                                                                                         

독일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대명사 나치.. 그리고 수용소. 나치는 <건강한 사회>를 구축한다는 명분으로 유대인 뿐만 아니라 집시, 정치적 망명자 등 다양한 국가 및 인종의 사람들을 공공의 적으로 규정하고 수용소를 만들어 격리시켰다.

가장 대표적인 수용소는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이겠으나.. 독일 곳곳에 크고 작은 수용소들이 있다.

라이프치히에서는 차로 1시간 30분 정도 거리에 잔혹함에 있어 악명 높은 수용소가 있다.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


부헨발트는 바이마르에서 가깝기 때문에..보통 바이마르 여행 시 붙여서 일정을 짠다.

쉴러와 괴테가 활동했으며 바이마르 헌법이 공표된.. 독일의 대표적인 문화도시 인근에 극악무도한 수용소가 있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면서 믿기 어려운 일이다.


나치 수용소를 비롯한 일명 '다크투어' 로 불리는 곳은 대부분 입장료가 무료다.

독일 정부는 나치의 행동을 반성한다는 차원에서 무료로 운영하고 있으며, 대신 기부금을 받는다.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 (Buchenwald Concentration Camp)       

1937년 나치는 바이마르 교외에 강제 수용소를 세우고 매우 완곡한 '부헨발트'(너도밤나무 숲)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곳에는 정치범, 유태인, 집시는 물론 노르웨이 대학생들까지 수용되어 있었다. 거의 25만 명 가까운 죄수들이 이 수용소를 거쳐 갔으며, 그중에서 적어도 5만 6천 명은 갇힌 상태로 목숨을 잃었다.

부헨발트는 몰살 수용소는 아니었지만 이곳은 특별히 사악한 악명을 얻었다. 수용소의 첫 번째 책임자인 카를 코흐와 그의 아내 일세는 잔혹함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특히 충동적으로 죄수들을 죽이곤 했다. 일세 코흐는 희생자들의 가죽을 벗기는 취미가 있어, 그것으로 책 커버나 전등갓 같은 가정용품을 만들곤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죽음의 행렬

처음 수용소에 들어가자마자 직면하게 되는 철도..

2차 세계대전 패전이 예상되자.. 나치는 수용자들과 함께 퇴각하는데 이를 일컫어 “죽음의 행렬”이라 부른다.  아우슈비츠의 수감자들은 이곳 부헨발트로 옮겨진다. 그들은 물조차 공급되지 않는 완벽히 폐쇄된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가축취급을 당하며 이동 됐고, 도착했을 때 대부분은 죽어 있었다. 사망자에는 노약자, 여성, 어린아이들이 대다수였다.


인류애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를 통 들어 이토록 무자비하게 무시당하는 경우는
결코 볼 수 없었다.
-아이젠하워



수용소 밖으로 쳐져 있는 철조망.. 24시간 내내 고압의 전기가 흘러 사람이 닿으면 바로 죽는다.

나치 친위대(SS)들은 일부러 수감자들의 모자나 옷 등을 빼앗아서 이 철조망 근처에 던져 놓았다. 당시 복장 규정은 엄격했기 때문에 잃어버렸을 경우 처벌을 받게된다. 이에 수용자들이 모자를 찾으러 뛰어가면.. 탈출로 간주해 총으로 쏴 죽였다.

그리고 군인들은 포상휴가를 갔다.

SS는 수감자들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임무에 자신들의 안위에 집중했다.


수용소의 수용소, 생체실험의 대명사


부헨발트 수용소는 수많은 의학 생체실험이 자행되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곳은 검안실이다.

자세히 보면 이 실험대는 포물선 모양을 하고 있는데.. 피가 밑으로 흘러넘치지 않도록 고안된 것이다. 수용자들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데 있어 나치가 개발해 낸 각종 고도의 아이디어들은 몹시 거북했다. 심지어 그 중 일부는 현대 문명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는것은 유감이다.


인간 피부로 만든 전등 갓, 절단된 장기, 수축된 머리..

이 모든 것이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나왔다.

가슴 먹먹함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비통함이 있었다.




그 누구도 이 사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미군이 습격해오자 패망한 나치는 수용자들의 시체들을 이렇게 쌓아두고 도망갔다.

시체 무더기도 충격이지만 하나같이 뼈만 앙상한 수용자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얼마나 굶고 혹독한 처벌을 당했으면 인간의 몸이 저렇게 될까 싶었다.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물론 나치는 시체를 태우기도 했다.


죽음의 10번 방

이 10번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시체 처리실이 나온다. 

나치는 사람을 빠르게 화장시킬 수 있는 기계를 고안했다. 

빨리 처리하고 더 많은 사람을 수감시키는게 목표였고 이 기계는 그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소각장은 총 6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루에 400여 명의 사람을 소각했다. 더욱이 이 소각장 기술은 이후 아우슈비츠 등 다른 수용소에 설치됐다.

부헨발트는 다른 수용소의 모델링 역할을 했다. 

다른 수용소에 도입하기 전.. 테스트가 이루어졌던 곳. 그래서 부헨발트는 “수용소의 수용소”라 불렸다.

이들의 극악무도함은 혀를 내두르게 하는데, 나치는 수용자들을 태우고 뒤섞인 재를 나눠서 유족들에게 보낸 뒤 비용을 청구까지 청구했다.


마치 나무를 태우듯.. 사람을 소각했던 사람들.. 

인간이 자행할 수 있는 악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과연 무슨 권리로 같은 인간을 이토록 무차별적으로 죽였던 것일까.


소각장 아래.. 지하로 내려가면.. 쇠고리에 목을 매달아 죽이는 장소가 나온다.

여기서 사람이 죽으면 리프트를 통해 소각장으로 올라가 처리되는 방식이다.

이쯤 되면 보는 게 힘들어진다. 

다크투어는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바깥 곳곳에는 이렇게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는 비석과 꽃들이 즐비했다. 



부헨발트 수용소 박물관

수용소 관람의 마지막 코스는 박물관이다.

실제 장소들뿐만 아니라 박물관을 통해 당시 물건들을 전시해 놓고 있다.



그들은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주사위 놀이를 만들어 나치 사상을 선동했다. 미래의 주인공이 될 아이들에게 놀이를 통해 사상을 주입시키려 했다.





나치의 치밀함은 복장에서도 나온다.

정치범, 유대인, 유대인과 결혼한 독일인, 불법체류자 등을 표를 통해 분류했다.

수용자들의 옷에 신분 견장을 달아서 관리했다. 생존이 목표였던 그들 사이를 계급으로 나눴고,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집단 서열화는 관리에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이외에도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참혹한 나치의 악행을 대변하는 고문 기구들..

평화롭게 일상을 살아 어처구니없이 끌려온 많은 수용자들의 사연들이 담겨 있다.



믿기지 않는 혹은 믿고 싶지 않은 그들의 역사


박물관 마지막 부분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부헨발트를 방문한 독일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미군은 인근 바이마르 주민들의 부헨발트 방문을 의무화했다. 자신들이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 보고 반성하라는 취지였다.


명백한 증거 앞에서도 그들 중 일부는
오만함을 지켰다
-미, 전쟁 특파원


하지만 이 처참한 상황을 보고도..

어떤 주민들은 자신이 행여나 이곳에 갇힐까 봐 두려워했고.. 조작된 것일 거라며 사실을 부정했으며..

나는 몰랐다고 말했다. (한편으론 숨기고 싶은 치욕의 역사 단편마저 이렇게 박물관 기록으로 남긴 오늘날 현대 독일인의 역사관이 놀랍기도 했다.)



We didn't know



그들은 진짜 몰랐을까? 알고도 모른 척했을까?


아마도 알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와는 무관한 알고 싶지 않은 일이었기에..

당시 나치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증언을 보면.. 사상이나 정치적으로 신념이 있었다기보다 대부분 자신의 일에 충실했고 최선을 다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었고 그저 자신의 부,성공, 욕망에만 충실했다.

'이상'이란 것은 분명 존재했지만..

내 삶에 피해를 주면서까지 지키고 싶은 '이상'은 아니었다.


나쁜 사람은 없다. 나쁜 상황만 있을 뿐


나치와 그 당시 독일인이 잔인하다고 욕만 할 것은 아니었다.

나라면 이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

나 역시 내 통장 잔고를 위해 묵인했을까.. 일말의 주저함없이 반대 선상에 뛰어들었을까..


솔직히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나는 나 아닌 다른 것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며 살고 있을까..

개개인의 삶이 팍팍하다는 이유로..

타인, 나아가 인류애에 대한 무관심은 무한대적으로 확장하고 있는 시대..

우리가 무관심할 때 괴물은 깨어난다.

그럼에도..

무관심에 배겨날 수 있는 것은 진부하지만..



그래도, 사랑


이라고 써보고 싶다.


파란 하늘마저 야속했던 날



평범한 악은 타인을 생각하지 않는 태도에서 온다.
어느 순간 이것은 하면 안된다 하는 것을 안하는 용기
-한나 아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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