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의무투성이라면, 결혼도 의무일까?

by 여행생활자KAI

20대 때 명절은 여행의 적기였다. 비교적 긴 연휴와 보장된 시간, 남편이나 시댁을 챙기지 않아도 되는 걸릴 것 없는 솔로에게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친인척들의 결혼 잔소리에서 벗어나, 일상을 떠나, 낯선 곳으로 향한다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결혼을 했더니 당연히 명절 여행은 사라졌다. 역시나 낯선 장소에 있긴 했다. 흔히들 ‘시월드’라 명명하는 그 장소에 덩그러니 놓여졌다. 사실 나는 시집살이에 대해 말할 처지가 못 된다. 고부갈등이랄 게 없었고, 결혼 후 첫 명절에만 시댁에 갔을 뿐 그 이후로는 못 갔다. 방송기자였던 남편은 명절에 더 바빴고, 결혼 2년 차 때 독일을 와 버렸으니.. 명절 고부갈등의 경험이 전후무후하다.


그래도 어쨌든 나는 결혼을 했고 며느리로서 의무를 다 해야 했다.

이번 여행 중 설날이 끼어 있었다. 부랴부랴 배송 가능 날짜에 맞춰 시댁에 보낼 굴비를 주문했다. 인터넷도 잘 안 되는 핀란드 시골 마을에서 안테나가 잡히는 곳을 여기저기 찾아다니면서 말이다. 한국 연휴 시간에 맞춰 시차를 계산해 안부 전화를 드리는 것도 필수다. 결혼을 하진 않았지만 미나의 상황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녀의 당시 남자친구 어머니는 본인 건강에 대한 염려 때문에 시시때때로 전화를 하셨고 시차 상관없이 문자 폭탄을 보내셨다. 의무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어른이 전화를 하신 거니 거절할 수는 없었고 자상하게 응해 드려야만 했다. 각자 전화를 끊고 동시에 말했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이런 우리가 어색했다. 마냥 자유로운 영혼 운운하며 몽상가처럼 살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몽상’이었다. 결혼 이후 이따금씩 내가 강한 생활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바로 이런 순간에 말이다.

혼자 일 때는 불안했다. 삶에서 한 1cm 정도 붕 떠있던 내가 싫어서 결혼이란 관문에 입장했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어서 정서적 안정감은 다양한 이름의 책임감과 의무를 요구했다. 아내로서의 의무, 며느리로서의 의무, 올케로서의 의무, 결혼을 하고 나서 내게 붙여진 이름과 의무들이다.



<위기의 주부들>에서 르넷은 “인생이란 의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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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하고나서야 그녀의 대사가 무척이나 공감이 됐다. 그렇다. 정말이지 인생은 의무투성이다. 나이가 들수록 의무를 다해서 행해야 할 일들이 더 많아진다. 여행 중 시댁에 명절 선물을 보내는, 예비 시어머니의 질문에 일일이 답변해드리는 우리가 될 줄은 몰랐다. 그래서인지 결혼 3년 차와 결혼을 고민하는 30대 중반의 여자는 이번 여행에서 결혼 이야기를 참 많이 했다.


투르크 시내에서 조우한 웨딩 샵. 이곳에서 우린 ‘결혼’이란 무엇인지를 한참동안 얘기했다.



“내가 왜 결혼을 한 건지.. 미나는 앞으로 결혼을 할지..
대체 결혼이란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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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혼을 통해 한 사람을 사랑으로서 신뢰하고 그 믿음을 근거로 서로에게 의무라는 족쇄를 채운다. 때때로 이 족쇄가 버겁기도 해서 나는 미나에게 결혼이 인생의 의무는 아니라고 했다. 해본 자의 여유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꼭 결혼을 할 필요는 없다는 게 20대부터 가져온 나의 견해다. 굳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궤도와 꼭 궤를 같이하라는 법은 없다. 남들 해서 하는 결혼은 아니 하는 만 못하다. 그러니 인생에 걸쳐 의무를 다하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그때 결혼을 생각해봐도 늦지 않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혼자 살아도 지켜야 할 의무가 너무 많은 피곤한 세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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