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쯤은 자신의 발자취인 지난 선택들을 리뷰해 보자
살아가는 것은 선택의 연속이다.
우리는 살아가며 끊임없이 크고 작은 의사결정과 선택을 하고 있다.
그중에는 스스로 하는 선택도 있고, 강요에 의한 선택도 있고,
강요는 아니더라도 어쩔 수 없는 선택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유형의 선택이든 선택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나의 선택과 무관한 것은, 내가 태어난 것 밖에 없다.
수명마저도, 삶의 연장은 선택의 대상이 될 수 없으나, 단축은 선택이 가능하다. 방법도 선택할 수 있다.
중고교 시절, 사지선다형 시험문제의 정답이 이거 같기도 하고 저거 같기도 한 아리송한 상태에서,
둘 중 하나가 확실할 때 어느 것을 고를까 답답한 마음에 연필을 굴려보기도 한다.
이런 선택의 갈등은 누구나가 한 번쯤은 다 겪어 보았을 것이다.
오늘 점심은 누구와, 어디서, 무엇을 먹을까? 등의 사소한 기본적 선택에서부터,
모든 용품 구매 시마다 어떤 디자인을 살까? 어떤 칼라가 좋을까? 하는 생활 속 일상적 선택.
장래 진로문제라든지, 결혼과 같이 신중해야 할 선택.
또는, 국제적인 협상에서 어떤 카드를 제시할지.. 하는 중요한 선택들도 많다.
모든 행동은 선택에서 나온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는 것도 이 시간에 해야 할 많은 일 중에 글쓰기를 택한 것이고,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많은 일들 중 글 읽기, 그리고, 이 글을 선택하신 것이다.
이러한 수많은 선택을 위해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의사결정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항상 이런 자기만의 노하우를 통해 그때그때의 상황에서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선택을 한다.
스스로 최선의 방법을 두고 차선의 방법을 택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에 대해 만족감을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후회를 하기도 한다.
또 선택을 잘 하면 합리적인 사람이 되지만, 잘 못하면 우유부단한 사람이 된다.
2001년 어느 날, 문득 이런 궁금증이 들었다.
'과연 나는 지금의 내 생활에 대해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는가?'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대답은 '썩...' 은 아니었다.
그러자, 다시 의문점이 생긴다.
산다는 것이 나 자신에 의한 선택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면, 사회생활 20여 년 동안,
나 역시 매 순간 나름대로 늘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 최선의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20여 년 동안 결정해온 최선이라 생각했던 선택의 결과에 대해 스스로 '썩' 만족스럽지 못 하다면,
전체적인 삶의 골격을 바꿔야 하는 게 아닌가?
축구감독이 전반전을 마친 후 경기가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고 생각되면, 후반전에 선수나 전술을 바꾸듯,
나 역시 내 인생의 전반전에 스스로 만족을 못 한다면, 내가 살아온 틀과 방법을 바꿔 후반전을 대비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내가 20여 년을 열정적으로 몸 담았던, 남들이 부러워하는 안정된 직장생활을 그만둔 이유였다.
지난 세월에 부분 부분 아쉬움은 있으나 현재 생활에 큰 불만은 없으니, 이 선택이 '썩'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던 거 같다.
삶의 과정은 선택의 연속이고, 삶이란 연속된 선택의 조합이다.
그리고, 선택은 의사결정의 산물이다.
의사결정 과정이나 방법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하지만, 좋은 의사결정을 내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있다.
스스로 지식과 지혜를 갖추거나, 그런 사람을 곁에 많이 두는 것이다.
아울러 자신의 발자취인 지난 선택들을 리뷰해 보는 것.
본인이 어떤 노력을 하느냐... 어떤 사람을 곁에 두느냐...
결국 이것도 선택이다.
특히, 다양성의 시대를 살며 선택의 종류는 점점 많아지고 의사결정 과정도 그만큼 복잡해진다.
그래서인지 스스로 결정장애라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때문에 곁에 있는 사람의 안목이 더욱 중요해진다.
선택은 누구에게나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고뇌와 갈등의 반복이다.
그래서 400여 년이나 지난 오늘날에도 햄릿의 대사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 더 깊히 자리 잡는 모양이다.
[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