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을 찾기 힘든 인간의 필멸에 대하여
이마무라 쇼헤이는 타협하지 않는다. 오줌으로 손에 묻은 피를 닦는, 생 날것의 인간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는 시작부터 관습을 거부한다.
주인공 에노키즈가 5건의 살인을 저지른 직후 체포되는 오프닝 씬은, 곧장 플래쉬백 되어 첫 번째 살인 장면으로 넘어간다. 관성적 직법을 벗어나는 이 전개 속에 중간중간 아버지와의 과거 회상 장면도 삽입되어, 관객은 사건의 인과관계를 더더욱 파악하기 힘들다. 범죄 장르라면 형사가 증거를 바탕으로 날카롭게 수사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방식이 일반적일 터. 하지만 카메라는 오히려 에노키즈만을 졸졸 따라다니며, 그의 무자비한 범죄행각을 나열할 뿐이다.
왜 이런 구성을 택했을까? 오히려 이 복잡한 플롯을 통해 관객은 사건의 시간 순서를 재구성하게 되고, 그 인과관계 속 동기를 자발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이 범죄 일대기의 근원을 찾아 나서게 되는 것이다.
어린 시절 에노키즈가 바라본 아버지 시즈오는 종교에 매달리며 숭고해지려 애쓰지만 매번 현실 앞에서 무너지는 존재다. 천주교도로서의 본분을 유지하지 못한 채 번번이 천황의 정부에 굴복한다. 생존을 위한 선택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에노키즈는 아버지를 겁쟁이라고 단언하며 반항심과 함께 성장한다. 종교에 대한 인간의 위선 또한 느낀다. 이후 그는 배를 타고 자살한 척, 가족을 떠나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서기도 하지만 사기행각 끝에 수감되고 만다.
그런 에노키즈의 부인 카즈코는 어떤가. 남편은 사기나 치고 다니다가 감방에 가버렸다. 자식들 데리고 혼자 살림살이하는 와중에 유일하게 자신을 챙겨주는 시아버지가 남자로 보이기 시작한다.
시아버지 시즈오는 동정하던 며느리가 다가오자 연민과 동시에 욕망을 느낀다. 종교적 체통을 지키려 발버둥 치며, 외간 남자를 며느리에게 이어 주지만 위선일 뿐. 결국 이 둘의 관계를 눈치챈 에노키즈는 출소 뒤 무차별한 살인마로 폭주한다.
반대편의 하루 가족을 살펴보자. 하루의 엄마 히사노는 전쟁 통에 배가 고파 살인을 저지르고 15년을 복역한다. 하루는 살인마의 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산다. 엄마가 자신의 인생을 망쳤다는 증오와 동시에 첩으로서의 삶에도 환멸을 느낀다. 그녀에게 관심을 주는 에노키즈가 살인마임을 알지만 자신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자를 그녀는 신고할 수 없다.
모든 상황을 정리해 놓고 관조적으로 바라보면, 이 비극의 원인을 규명하기 힘들다는 특징이 있다. 전쟁 직후라는 사회적 배경이 진득하게 깔려 있지만 그것이 잔혹한 살인 행위의 원천이라고 단정 짓기는 힘들다. 모든 사건들은 악의 상호 고리로부터 독립적이지 않다.
과연 이 영화가 에노키즈라는 단순한 사이코패스 살인마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영화일까?
감독의 대답은 하드보일드 리얼리즘에 균열을 일으키는 비현실적 편집에 숨어 있다.
에노키즈가 마지막 히사노를 살해하러 가는 장면은 가히 기이하다. 에노키즈와 같은 공간에 난데없이 그의 친모가 등장한다. 자연스럽게 포커스는 옮겨지고 장소는 카즈코와 시즈오의 공간으로 바뀌어 있다. 냉철한 살인과 정신적 근친상간 장면을 병치시킴으로써 죄악의 굴레와 인물에 대한 경멸감은 그들에게까지 확대된다. 얽힌 죄악의 사슬 속에서 당당할 수 있는 인간은 이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다. 돌맹이던 바위던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며느리가 흑심을 품지 않았다면? 그 이전에 에노키즈가 수감되지 않았다면? 더 이전에 그가 반항심을 가질 만한 부끄러운 모습을 아버지가 보여주지 않았다면? 무엇보다, 아버지가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사회가 정의로웠다면?
온전히 사회 탓을 할 수도 없고 한 개인의 탓을 할 수도 없다. 에노키즈라는 무시무시한 살인마는 단순히 원래부터 존재하는 사이코패스가 아닌, 시대와 인간 본능이 서사적으로 얽혀 창조된 짐승인 것이다.
난 인간이 아니야. 짐승이야.
각본은 짐승이라는 단어를 자주 활용함으로써 ‘짐승’이라는 단어가 가진 프레임을 관객의 뇌에서 활성화시킨다. 무차별한 살육과 인정사정 볼 것 없는 날것의 그것은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인간상과 다르지 않다. 왜 에노키즈는 뿜어 나오는 붉은 피를 보는 와중에도 수도 없이 송곳질을 해대는 것일까?
‘모르는 사이인데 했네. 짐승처럼.’
비인간적 살인과 시도 때도 없는 교미 장면을 보여주는 감독에게서 그 어떤 망설임도 찾아볼 수 없다. 인간은 법과 규범의 테두리 내에서 살육과 성적 본능을 가둬 놓고 산다. 내면에 불이 붙기 시작했을 때 나타나는 비극은, 그에 걸맞는 무자비한 연출로 날 것 그대로 드러난다.
나아가 인간이 만들어낸 통념마저 날카롭게 바라보는 시각은, 관객으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
가족이란 통념적으로 인간이 의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집단, 그 무엇을 뜻하는 게 아니던가? 이마무라 쇼헤이는 그 최소한의 방어선마저 근친상간과 패륜으로 박살 내 버리면서 인간이라는 탈을 쓴 짐승의 모습에 집중한다. 이 비극 속에서 나머지 가족 구성원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에노키즈의 엄마는 남편과 며느리의 관계를 창 밖을 통해 바라보기만 한다. 마찬가지로 히사노는 딸이 윤간당할 때 방관으로 일관한다.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인물들의 태도를 통해 감독은 여성을 소외시키는 시대상을, 동시에 인간이 만들어 낸 가족이라는 통념의 위선을 벌거벗긴다.
인간과 짐승의 차이는 이성의 유무다. 인간이 이성을 잃으면 짐승과 다를 것이 없다.
영화의 엔딩에서 시즈오가 혐오스러운 아들을 떨쳐 버리기 위해 뼛조각을 힘껏 던지는 순간, 화면은 정지되고 뼈는 그대로 공중에 떠 있다. 이 논란의 마무리에 대해 아버지와 부인을 끝까지 지켜보려는 에노키즈의 분노가 담겼다는 해석이 일반적이지만, 그 주체를 뒤바꿔 생각해 보면 영화는 새로운 국면에 직면할 수 있다.
종교에 매달리며 자신과 가족을 구원으로 이끌려 애쓰지만 어린 시절부터 늘 현실적 제약 앞에 무릎 꿇고, 그 타협의 과정을 오롯이 에노키즈에게 보여줬던 시즈오. 천황 앞에서, 며느리의 나체 앞에서 끝끝내 떳떳한 선택을 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죄책감은, 아들의 전락에 대한 혐오감에 뒤엉켜 뼈를 공중에 정지시키기에 이르는 것이다.
네 피는 내 피 이기도 해. 악마의 피가 흐르고 있지.
에노키즈를 가톨릭에서 추방할 때 자신의 이름 또한 제명해 버림으로써 시즈오는 스스로 죄책감을 벗어나려 애쓴다. 하지만 정지된 아들의 뼈와 함께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은 이를 묵인할 뿐.
‘천국의 사원으로 데려다주오…’ 오프닝에서 체포될 당시 에노키즈가 불렀던 노랫말은 엔딩에서 그의 아버지의 입에서 다시 등장한다. 구원을 원하는 아버지와 아들, 똑같이 죄악의 굴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들을 향한 감독의 시선에 차이는 없다.
이제 영화의 제목으로 돌아가 보자. ‘복수는 나의 것’. 이 비장한 선언은 의문점으로 가득하다.
먼저, 누구의 복수인지가 모호하다.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복수인가? 에노키즈는 끝내 아버지를 죽이지 못하고 먼저 사형당하지 않았는가. 복수가 그의 것이기엔 과분하다. 그렇다면 아들을 향한 시즈오의 복수인가? 뼈를 던져버리며 모든 것을 털어 버리길 꿈꾸던 시즈오에게 공중에서 정지된 뼈는 좌절감을 안기지 않았던가. 그럼 에노키즈에게 죽임을 당한 나머지의 복수인가?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 이전에, 왜 '복수'인가? 근본적으로 복수란 해를 받은 것에 대해 해를 돌려주는 행위다. 다시 말해 당한 것에 대한 반작용인 것이다. 하지만 이 서사에서 에노키즈의 무자비한 학살에는 이유가 없다. 그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원한도 앙금도 없던 사람들이다. 그에게 호의적이었던 하루의 입을 맞춤과 동시에 목을 졸라 죽이는 장면에서, 그 명분 없는 살인의 비정함은 극대화된다. 그렇기에 ‘복수’라는 표현은 이 범죄 일대기와는 동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결론적으로, 그 누구도 복수를 가지지도, 끝내지도 못했다. 다시 말해, 누구의 복수인지, 왜 복수를 하는지도 명확히 파악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단순히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주인 없는 외침 만이 허공에 떠돈다. 허물을 향해 집착하는 인간의 초라한 민낯과 함께 한 마리의 짐승을 연상시키는 제목이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때에 갚으리로다 그들의 환난의 날이 가까우니 당할 그 일이 속히 임하리로다.'
복수는 정말 신의 것일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복수라는 그 허무를 향해 자기 파멸의 길로 스스로를 이끄는 인간이야말로 필멸의 존재다.
이 영화를 처음 보면 도대체 이런 찝찝한 사이코 작품이 있나, 싶을 수 있다. 하지만 영화적 충격을 잡아먹는 더 큰 충격이 있으니, 바로 이 영화는 실화라는 점이다.
인간과 짐승을 구분 짓는 이성이라는 심지에 불이 붙는 순간 인간은 짐승이 되어 버리고 만다.
때론 불이 붙는 이유를 찾기 힘들다. 이 끔찍한 일대기의 근원을 단정 짓기 힘들듯이 말이다.
꽃이 피기 전에 자신의 색을 정할 수 없듯,
태어나자마자 이미 서사적 존재인 인간이, 오롯이 ‘인간’ 답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아니, 도대체 인간 답다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복수는 나의 것>은 복수의 명분도 대상도 모른 채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외치는,
인간의 필멸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이마무라 쇼헤이의 역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