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선의에 반해 작용하는 운명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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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민과 나데르는 카메라만을 응시하며 이혼소송을 벌인다. 화면에 보이지 않는 판사는 관객의 몫이다. 이민을 가고 싶어하는 나데르와, 아버지를 두고 갈 수 없다는 씨민. 틀린 말 하나 없는 이 둘의 치열한 공방 속에서 누구의 손을 들어줘야 하는가? 재판을 마무리 짓지 못한 두 사람은 결국 별거를 시작한다.
나데르의 출가로 고용된 청소부 라지에는 유산한다. 영화의 플롯은 유산 사건의 진실을 놓고 벌이는 재판 행방을 읊어간다. 불편한 진실은 한꺼풀씩 벗겨져가는데, 그 과정에서 인물구도의 선악 구분은 갈수록 모호해진다. 헌신적인 청소부 라지에는 할아버지의 손을 묶는게 최선이었을까? 씨민은 청소부의 임신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꼭 부정해야만 했을까? 각자의 거짓된 증언들은 하나같이 옳다고 판단되진 않지만 각자의 사정을 들어주자니 참 딱해서 그 선택들을 연민하게 된다. 불쌍한 놈이 불쌍한 놈과 재판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봐주고 싶은 놈은 또 없다.
명백한 빌런 없이 원치 않는 싸움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이 떠오른다. 박찬욱이 대사를 극단적으로 줄이고 차가운 하드보일드 연출로 비극성을 극대화했다면, 이 영화는 내내 인물들을 졸졸 따라다니는 불안한 헨드헬드 카메라 무빙으로 모든 판단을 관객에게 유보함으로써 능동적으로 사건을 재고하게 한다.
딸에 대한 진실한 사랑과 종교에의 의지는 사건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말미에 이들은 오히려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뒤바뀌어 있다. 씨민은 판단을 딸에게 떠넘김으로써 스스로의 죄책감에서 벗어나려 애쓰며, 라지에는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닌 자신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종교를 이용한다. 결국엔 관객이 진실을 기대했던, 씨민의 딸도 위증을 하고 그렇게 모두 전락해간다.
나데르가 이민을 떠나고 싶었던 이유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이 모든 전락의 근원이 부부의 별거(Separation) 때문일까?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감독은 떡하니 제목으로 던져 놓고 이 모든 것이 왜 이렇게 되고야 말았는지를 생각케 한다. 이러려고 이런게 아닌데 … 싶을 때가 많다. 결과가 이럴 줄 알았다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겠지만 어쩌겠나, 우린 미래를 알 수 없고, 때론 요행을 바라기도 하며 오늘의 선택을 거듭해 나갈 뿐. 우리의 선의에 반해 작용하는 운명의 힘은 어김없이 휘몰아친다. 인간은 맞서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며 발버둥친다. 이 영화는 그 잿빛 발버둥을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