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승민 Jan 23. 2021

그래서 사랑이 뭔데,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그 어떤 교훈도 강요하지 않음으로 윤리를, 나아가 사랑을 말한다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라니, 제목부터 배짱이 두둑하다. 사랑을 다뤄온 수만 편의 멜로와 로맨틱 코미디를 관조하는 키에슬로프스키는, 직설적으로 사랑 얘기를 해보겠다고 선전 포고한다. 



붕대를 감은 남자가 누워있고 창 너머로 여자의 일상을 보여준다. 관음 하는 누군가의 시점 숏. 쨍그랑 소리와 함께 망원경을 훔치는 남자 주인공. 관음자와 피관음자를 밝히는 이 오프닝에서 관객은 남자(토메크)에 대한 불편함을 갖게 된다. 


영화는 내내 대사보다 이미지에 집중한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토메크의 고독과 그 성장과정을 간접 체험하게 하는 효과를 부여함과 동시에 대사의 무게감을 높인다. 이로 인해 서사가 진행될수록 토메크의 행위가 죄인 줄 알면서도 관객은 동정심을 느끼게 된다. ‘사랑을 잘 아는 줄 알았던’ 여자는 풋내기 남자에게 상처를 주지만, 부메랑처럼 그 상처가 여자에게 돌아오면서 그녀의 오만과 편견은 무너져 내린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영화의 제목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엔딩은 수미상관이다. 붕대를 감은 남자가 누워있고 다시 여자의 일상이 보인다. 하지만 그 일상을 관찰하는 것은 다름 아닌 여자 자신이다. 자신이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자신의 뒷모습이 보인다. 자신이 알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마주한다. 여자는 토메크의 순수했던 그 감정을 이해하게 된다. 

이 미묘한 변주 속에서 영화는 끝난다. 오프닝 때 남자에게 느꼈던 불편함은 엔딩에서 사라졌지만 여전히 찝찝함은 남아있다. 그렇다고 해서 토메크의 행위가 용인 가능한 것인지, 그의 몸은, 그의 마음은 회복될 수 있을 것인지. 이게 사랑인지. 관객에게 맡기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에서 살인자의 살인과 살인자의 사형, 두 건의 살인을 보여줌으로써 살인에 관한 본질적 질문을 던졌다. 이 영화에서는 어떠한가. 감독은 사랑에 관한 영화를 찍는다고 해놓고 이에 대해 설명하기보다는 질문하고 있다. 이 두 남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아무도 주목하지 않겠지만 토메크를 키우는 양모가 그를 사랑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만하다. 우리가 일컫는 사랑이란 무엇이며, 그 사랑의 방식에는 옳고 그름이 있는가? 본질에 다가갈수록 모호함은 짙어진다. 본질의 본질은 모호함일까?


감독은 작품 내에서 자신의 메시지를 직언할 수도, 관객에게 해석하고픈 모호함을 남기며 영화를 되새기게 만들 수도 있다. 방식에 귀천은 없겠지만 나의 영화는 후자일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