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다른 걸 채워야 할 3.3제곱미터의 공간
유튜브나 TV의 감각적이고 분위기 있는 인테리어를 원한다면 꼭 지켜야 할 한 가지 원칙이 있다.
바로 ‘정리’이다.
아무리 예쁜 장식과 가구도 빛을 발하려면 적당한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인테리어 프로그램들은 필요 없는 것들을 비워두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이런 정리가 집뿐만 아니라 꿈에도 적용되는 듯하다.
하고 싶었던 것, 즉 오랫동안 열망하는 소망이나 꿈을 이루려면 그에 맞는 충분한 에너지와 시간이 필요하다. 이건 어떤 목표를 설정하느냐와 상관없이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하고 싶은 것들이 많다는 것은 집에 각종 짐과 가구들이 쌓여있는 것과 동일하다. 발 디딜 틈 하나 없기 때문에 무언가 변화를 주고 싶다면 우선 정리를 해야 한다. 무엇보다 가늘고 긴 도전을 위해서, 그리고 재능을 찾으러 여러 문을 두드려보기 위해선 이런 작업은 필수적이다.
최근 정리를 했다. 하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영상 번역이어서 작년 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강의를 수강했다. 영상 번역은 외국 영화나 드라마를 번역해서 한글 자막을 만드는 일인데 워낙 콘텐츠를 좋아해서 남들보다 먼저 신작을 보고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실제로 번역을 하는 것은 상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영상 번역은 단순히 번역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영상에서 자막이 언제 떠야 할지를 잡아주는 작업도 함께 해야 했는데 일일이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진행하다 보니 시간이 꽤 많이 소요됐다. 맞춤법 검사 등 검토 작업도 포함해서 처음엔 영상 5분을 번역하는데 8시간이 넘게 걸리기도 했다. 또 원어를 아무리 잘 이해하고 있어도 한국의 정서에 맞게 전달하는 것이 필요해서 생각보다 영어 실력보단 한국어 실력이 더 중요하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즐거웠다. 날을 새면서 끝낸 과제에서 내가 만든 자막을 보면서 신기했었고 실제로 일감을 받아서 작업을 하고 내가 번역한 문장을 영상으로 보면서 뿌듯했었다.
특히 내가 다녔던 학원은 번역회사랑 연계되어 있어서 초급에서 심화반을 거치고 졸업시험에 통과하면 번역작가로서 꾸준히 활동할 수 있었다. 다행히 승급시험에는 통과해서 심화반도 수강했지만 마지막 졸업시험에는 떨어져서 번역작가 활동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재시험을 볼 수도 있었지만 나는 여기서 멈춤 버튼을 누르기로 했다. 거의 1년 간 퇴근 후 새벽까지 원 없이 수많은 영상을 돌려보면서 어떤 표현이 더 좋을지를 고민해봤고 영어 사전과 국어사전을 지겹도록 살펴보면서 정확한 표기와 의미를 알아가기도 했다. 이대로 영상 번역이란 꿈을 보내주는 게 지난 시간이 아깝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 생각했을 때 이 정도면 충분히 열심히 했다고 느껴져서 후회는 없다.
하고 싶은 일에 미련이 남는 이유는 헤어진 연인에게 미련이 남는 이유와 동일하게 아직 내가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전 애인의 물건을 버리면서 미련을 비워내는 것처럼 이제 지나간 꿈이 차지하고 있던 1평 남짓한 공간을 비우고 새로운 도전을 맞이할 준비를 할 때가 된 듯하다.
Time to move 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