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생각해보면 터널을 걷는 기분이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빛을 지나고는 있는데 그 긴 여정을 보면 어두컴컴한 그런...
서울에서의 생활이 끝나는 것은 어쩌면 내 삶 전체를 따지고 봤을 때 실패의 한 조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아주 처참한 패배였다. 성공하고 돌아온 금의환향 길이 아닌, 상처로 얼룩진 패전국 병사와 같은 절뚝거림이었다. 인간은 참 신비로운 존재라는 걸 그 때 깨달았다. 몸엔 생채기가 하나 나지 않아도 마음이 다친다는 건 마치 큰 사고라도 난 것마냥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더 웃긴 건 무기력함 속에서도 나는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의욕적으로 무언가를 꿈꾸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의식도 없이 내가 해야할 것만 같은 일들을 그저 반복해서 쳇바퀴 돌 듯 아무런 생각없이 해내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무식하게 살기로 했다.
서울에서의 삶을 마치고 돌아온 제주에서의 생활은 나를 전장으로 다시 몰아넣는 것만 같았다. 영어를 전공한 것이 아니었던 나는 영어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 한 채 답안지를 달달 외워 수업을 했다. 대학생들과 성인들을 상대로 하는 토익학원에 던져진 나는 먹잇감이 되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일해야 했다. 영어 교육학과 학생이 수강신청을 했던 그 때는 매일같이 시험대에 세워지는 기분이었다. 밤 2~3시까지 다음날 수업 준비와 수업 자료를 만드는 날이 반복 되었고 주말엔 토익 시험을 보고 기출문제를 만들었다.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날 시간도 체력도 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게 참 행복했다. 내 행복의 가장 첫 번째 이유는 내 존재의 가치를 다시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학원의 수강생들은 자신의 꿈을 위해 스스로 학원을 찾아왔다. 내가 가르치고 있는 이 시간과 내용들이 모여 그들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주는 셈이었다. 좋은 토익 성적을 가지고 학생들은 취업에 성공했고 처음으로 '선생님 덕분이예요.' 라는 말을 들었을 땐 세상이 달라보이기까지 했다. 이젠 더 이상 나의 미래를 위해 누군가의 미래를 짓밟고 상처주는 것이 아닌, 나의 하루하루가 누군가의 미래를 위해 쓰일 수 있다는 것에 기뻤다. 그렇게 나는 점점 내 과거의 상처를 잊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상처는 아물지 않은 채로 감추고 가려져 내 마음 속 저 깊은 어딘가에서 곪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곪아터진 상처를 안고 하루하루 무식하게 버텨내던 나는 기어코 내가 그렇게 원하던 꿈을 이뤄냈다. '꼭, 언젠가는 대학생들과 수업을 할 거야.'
이게 친구들이 말한 1년만 버티면 달라질 거라던 나의 미래였을까를 생각해보면 그건 아니었다. 대치동에서 온갖 상처를 입고 버텨낸 1년은 내 미래가 달라지는데 그 어느 것도 도움을 주지 못 했다. 그 때까지는...
대학교 특강을 하며 나는 1년에 6개월만 일하는 삶을 살았다. 대학생들은 대부분 학기 중엔 학과 수업을 받고 대외활동을 하느라 바빴다. 그래서 난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만 일을 했기에 제주에서 활동을 하는 것으론 부족했다. 그러니 나는 다시 제주를 떠나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일을 찾았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 경북에 있는 한 마이스터 고등학교의 겨울 특강을 맡게 되었다. 마이스터 고등학교 학생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하는 것이 아닌 취업을 먼저 하고 그 이후에 본인의 선택으로 대학을 진학하는 길을 걷는 학생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마이스터 고등학교 강의가 처음은 아니었다. 서울에서 제주로 돌아오기 바로 전 누군가의 소개로 짧게 특강을 했었는데 그 땐 중고등학생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때라 그저 시키는대로 일만 하다보니 내 주체적인 강의가 되질 못 했다. 그저 돈만 벌고 가야지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나는 조금 더 주도적으로 프로그램을 이끌었고 학생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성공하게 하기 위해선 토익 점수가 필요했기에 좀 더 적극적으로 학생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수업은 아주 강행군이었다. 아침 8시 30분에 시작한 수업은 밤 9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그렇게 꼬박 3주간의 시간을 보내고 마지막 수업을 앞둔 날이었다. 하루 12시간을 같이 보낸 우리는 선생과 제자도 아닌 그저 하나의 전우가 된 기분으로 서로에게 의지했다. 학생들도 나에게, 나도 학생들에게. 저녁 식사를 하고 야자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이제 이 힘겨웠던 3주의 시간이 곧 끝나간다는 해방감과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내게 특별한 부탁을 했다. 마지막 날 오전에 모의고사를 보고 자유시간을 달라는 거였다. 그 시간동안 뭘 하고 싶냐 물었더니 어느 누구는 기타를 잘 친다고 했고, 또 어느 누구는 노래를 잘 한다고 했다. 마지막 수업이 끝나면 다시 제주로 돌아갈 선생님을 위해 선물을 주고 싶다면서. 그 말이 너무 예뻐서 눈물이 왈칵 터져나왔다. 갑자기 눈물을 쏟아낸 선생님의 모습에 학생들도 하나 둘 울기 시작했다. 한참을 말없이 울기만 하다가 두서없이 말을 꺼냈다. 나는 참 나쁜 선생님이라고. 그저 채찍질만 할 줄 알았지 목표를 위해 달려가고 있는 학생들의 발에 난 상처 하나 보살피지 못 하는 사람이라고. 그게 너무 미안하다고.
그리고 다음 날, 우리 반에서는 기타 소리와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또 누군가는 랩을 잘 한다며 유명한 노래의 랩을 하기도 했다. 꽃다운 청춘이라는 게 이런 거였나 싶어서 그저 흐뭇하게 보다가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마지막 인사를 하고 텅 빈 교실에 혼자 남아 뒷정리를 하다 문득 노래하고 기타를 치던 모습이 떠올라 멍하니 서 있을 때였다. 분명 아까 인사를 하고 집에 간다던 학생이 숨을 헉헉 거리며 다시 교실로 뛰어들어왔다. 그리고는 한 번만 안아달라고 팔을 벌리고 다가왔다. 얼떨결에 그 학생을 안아주자 나를 끌어안고 말했다.
"고마웠어요 선생님. 수업이 너무 빨라서 못 알아듣겠으면 빠르다고 투덜대지 말고 정신 차릴 생각하라는 말도 좋았고요. 단어 시험 틀린 거 하나하나 아까워하라고 하시던 선생님 모습도 좋았어요. 취업하고 직장에서 힘들 때 제주 어디선가 응원해주고 있을 선생님을 생각하라는 말도 다 고마웠어요. 밤새 선생님이 어제 했던 말 생각해봤는데요. 선생님의 채찍질도 결국 우리를 위한 거니까 고맙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엔 특강 괜히 신청했다 싶었는데 안 했으면 큰일날 뻔 했다니까요.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세요. 선생님이 제주에서 여기까지 와줘서 진짜 고마웠어요. 나중엔 제가 취업 성공해서 제주 놀러 갈께요."
다정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나를 토닥였다. 울지 않으려고 애쓰며 웃는 얼굴로 그 학생을 보냈다. 다시 혼자 남겨진 교실에선 울음이 나질 않았다. 분명 학생들은 없는데 빈자리엔 아이들이 하나씩 앉아있는 것만 같았다. 제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난 학생들이 노래하고 기타치던 모습을 찍은 영상을 수십번 돌려봤다. 그리고 눈물범벅이 된 채 비행기에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