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추구권.
머리에 아직 피도 안 마른 나에게는 참 대단한 것이었다. 초등학생에게 익숙한 단어인 '행복'과 어려운 단어인 '추구'가 합쳐진 '행복추구권'이라는 이 멋진 다섯 글자를 교과서에서 보게 된 이후로 나는 꽤 자주 행복추구권이라는 말을 해서 어른들을 웃게 만들었다. 머리에 피가 마르고 나서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인간의 기본 권리 중 하나인 행복추구권은 세상 팍팍한 뉴스를 볼 때마다 내 머릿속을 떠돌다가 두개골 한 편에 부딪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우리 모두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요. 그래서였을까. 그 권리는 점점 내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며 몸집을 늘리더니 결국은 나를 착각에 빠져들게 했고, 행복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똘똘 뭉친 사람으로 만들었다. 나는 한 때 행복추구 과잉시대를 살았다. 텔레비전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사람들은 행복을 노래했다. You Live Only Once. 살다 보니 행복에 대한 의무감은 아주 쉽게 내 삶을 잠식했다.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나는 그렇게 욜로의 시대를 살며 단 한번뿐인 삶에서 행복을 찾아 하늘을 날았다. 통장이 텅장이 되어 갈 때쯤 '욜로 하다가 골로 간다.'는 말에 휩쓸려 일 년에 한두 번씩 해외여행을 다니던 삶에서 겨우 벗어났다.
'행복은 어디에나 있어요.'
행복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각은 아주 쉽게 변했다. 사소한 것에서 행복을 찾으라는 그 다정한 말이 너무나 당연하게 진리가 되어 꽤 오랫동안 나를 위로했다. 행복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지고 사는 사람에게 이 말이 얼마나 고마운 말인가. 이젠 더 이상 행복하기 위해 세계지도를 꺼낼 필요도 없었고, 장거리 여행을 갈 시간을 벌기 위해 퇴사할 필요도 없었다. 내 삶의 곳곳에 숨겨진 네잎클로버를 매의 눈으로 찾아내어 발견의 기쁨을 만끽하면 되는 일이었다. 아주 쉬운 일이다. 물론 처음에는... 행복추구권이라는 단어에 얹힌 중요한 의미는 무시한 채 단순하게 텍스트뿐인 '행복', '추구'라는 글자에 매료되어 있던 나는 매일 하나씩 행복한 일을 찾아내고 일상의 행복을 기록한다는 명목하에 SNS를 시작했다. 매일같이 발견되는 사소한 순간들을 기록하며 만족스러운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그리고 점점 행복에 대한 집착은 스멀스멀 다시 몸집을 불려 내 삶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어떤 행복을 업로드할까 고민했다. 예쁜 카페에 가서 여유롭게 커피 한 잔을 하면서 일이나 해볼까? 혹은 멋진 풍경이 있는 바닷가에 앉아서 감성 터지는 노래를 들으면서 시간을 보내볼까? 그리고 그 시간들은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되어 SNS에 전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좋아요를 눌렀고 나는 뿌듯함을 느꼈다. 아주 가성비가 좋은 행복이었다.
분명 내 삶에 암흑은 늘 존재해 왔는데 애써 그것을 무시하고 행복의 빛만을 좇으며 살다 보니 마치 나는 행복해야 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행복의 정점에서 나는 추락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달리고 또 달렸다. 언젠가는 끝나겠지. 암흑 속을 헤매고 있는 내게 사람들은 말했다. 언젠가는 끝날 어둠이라고, 시간은 모든 걸 해결해 줄 거라고. 버티고 또 버티다 보면 분명 빛이 찾아올 거라고. 하지만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에게 시간은 그 어떤 것도 해결해주지 않았다. 아니, 해결해주기는 커녕 시간은 방관자가 되어 멈춰버린 채 나의 괴로움을 지켜보기만 했다. 하루가 지나고 내일이 지나도 똑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매일매일 해는 뜨는데 나의 하루는 여전히 밤이었다. 행복을 좇으며 살아온 나의 세상은 그렇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분명 행복은 어디에나 있다고 했는데, 매일 우리 주변에 있는 작은 행복을 찾으면 된다고 했는데,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행복은 보이지 않았다. 멈춰버린 어둠의 시간 속에서 방황하던 나는 주저앉았다. 내일을 잃은 사람에게 인생은 더 이상 의미 없는 것이었다. 어차피 내일도 오늘과 같은 밤일 텐데...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나는 어둠으로 가득 찬 삶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일이 기대되지 않는다고 해서 내일을 보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딱 60살까지만 살고 예쁜 모습으로 관에 들어가야지.'라는 말을 달고 살았는데 이토록 삶에 대한 욕심과 집착으로 가득 찬 인간이었다니. 어둠 속에서 나는 나를 새롭게 발견했다. 그리고 그 살고 싶다는 욕망은 나 자신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어둠 속을 헤쳐 나가려고 허우적거리던 바보 같은 짓을 멈췄다. 그리고 가만히 서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얼마나 많은데 어떻게 행복만 삶이라고 할 수 있어? 우울함도 느낄 줄 알고 슬픔도 느낄 줄 알고 화낼 줄도 알아야 더 제대로 된 삶 아니야? 행복추구권은 말 그대로 권리야. 그리고 그 권리는 의무를 수반하는 거지. 그럼 행복에 집착하며 그 권리를 주장하고 싶은 나는 삶에서 주어지는 모든 감정을 느껴볼 의무가 있는 거야. 그런 의무는 지기 싫고 권리만 주장하는 건 잘못된 거야.'
그 설득의 시간을 겪고 나자 놀랍게도 내 삶이 달라졌다. 넘어지는 일이 생겨도, 실수를 해도, 실패로 인생의 쓴맛을 봐도... 말 그대로 괜찮았다. 넘어지면 창피함에 멋쩍게 웃으며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기도 하고, 실수를 하면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사람들에게 사과도 해보고, 실패하면 찾아온 우울감을 기회로 오히려 더 슬픈 영화를 찾아 눈물 콧물 쏙 빼가며 한 번 시원하게 울기도 했다. 그렇게 행복에 대한 고집을 내려놓고 삶에 찾아온 다른 감정들도 즐기다 보니 이따금씩 찾아오는 작은 행복들에 감사하게 되었다.
나만의 무식한 행복추구권은 그렇게 의무와 함께 균형을 맞춰가며 내 삶에 스며들었다. 행복은 어디에나 있다는 다정한 위로의 말을 반박하고 싶은 건 아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꼭 행복한 것만 완벽한 삶은 아니라는 입장을 견고하게 쌓아가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 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소극적으로 고통과 불쾌감 없는 상태를 추구할 권리이고, 적극적으로 안락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추구할 권리를 뜻한다.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된 행복 추구권의 진정한 의미를 가지고 나는 오늘도 살아간다.
행복하지 않은 삶도 꽤 괜찮지 않냐고 나를 다독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