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by 낫투비


서울에서 제주로 돌아온 후의 내 삶은 기대했던 것만큼 큰 변화를 겪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부족한 실력을 가지고 하루살이처럼 당장 내일을 걱정하면서 아등바등 살고 있을 뿐이었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건 내게는 참 사치 같은 말이었다. 당장 내일 수업을 해내기 위해서 답안지를 달달 외우고 또 출근하면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퇴근 후 같은 일상을 반복했다. 숲은 개뿔, 지금 당장 내 앞에 있는 나무조차도 볼 수가 없는데…


그런데 단 하나, 서울과 너무나 달랐던 한 가지는 바로 출근길이었다. 제주에서의 출근길은 사람들로 가득 찬 지하철도 없고 환승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집 앞에서 차를 타고 20분을 달려 학원 입구에서 내리면 출근 끝. 이렇게 단순해도 단순할 수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주에서의 내 출근길은 높은 빌딩 사이 8차선 도로가 아닌 감귤밭 사이로 난 좁은 길이었다. 맞은편에서 오는 차라도 있으면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긴장해서는 바퀴가 빠지지 않길 바라며 이를 꽉 깨물고 조심스럽게 피해야 하는…


그리고 그 날도 난 좁은 길을 들어서면서 제발 반대편에서 차가 오지 않기를 바라며 초조한 마음으로 차를 몰고 있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나. 아, 물론 그 분이 내 인생의 원수는 아니었지만 바라지 않던 상황이었으니 그 순간만큼은 원수가 따로 없었다. 게다가 트럭이라니. 난처한 상황에 진땀을 빼고 있으니 아저씨께서 창 밖으로 손을 휙휙 저으시며 뭐라 소리치시는데 긴장한 인간의 청력은 현저히 떨어지기 마련. 후진을 하자니 넓은 길로 나가기까지는 너무 멀었고 까딱하면 차가 빠질 것 같은 상태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꼭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국 내 뒤로 차가 두 대, 트럭 뒤로 차들이 조로록 줄을 섰다. 이젠 진퇴양난이다. 안절부절하는 내 기분이 아저씨한테도 전해졌던 걸까. 갑자기 트럭에서 내린 아저씨는 밀짚모자를 고쳐쓰더니 마치 전장에 나가는 장군처럼 내게 다가왔다. 그 짧은 순간, 아저씨가 다가오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이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혹시 화나셨나, 욕을 하시려나, 때리지는 않겠지. 그 짧은 순간에 오만가지 생각으로 가득 찬 내 차를 향해 다가온 아저씨는 운전석 창문을 손으로 툭툭 치더니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창문을 내리라는 건가 싶어서 손이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빼꼼 열었더니 아저씨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온다.


“내려요.”


큰일 났구나 싶어서 앞 뒤 차들을 둘러본다. 아는 사람이 있을리 만무하지만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저 차에 달린 블랙박스들이 증명을 해줄 수 있을까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조심스레 차에서 내리자 아저씨는 옆으로 비키라며 손짓하셨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차에 올라타서는 휙휙 핸들을 몇 번 돌리더니 한쪽으로 내 차를 곱게 비켜 놓았다. 뭐라 한 마디 할 정신도 없이 아저씨의 손짓에 홀린 사람처럼 나는 조용히 다시 운전석에 앉았다. 그리고 옆으로 휙휙 지나가는 트럭과 줄줄이 서 있던 맞은편 차들을 멍하니 보면서 방금 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를 곱씹었다. 한 대 맞았나? 아니다. 혼이 났나? 아니다. 아저씨는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툴툴대는 말 한 마디 없이 꽉 막혀 있던 좁은 길의 도로체증을 한방에 해결했다. 그리고 나는 감사 인사 한 마디 할 새도 없이 뒤에 선 차들의 클락션 소리에 맞춰서 다시 차를 몰았다. 큰 길로 나가는 신호등에 멈춰 서고 나서야 멈췄던 사고 회로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파란 하늘에 뭉게뭉게 떠 있는 구름이 보였다. 구름이 예뻐서였을까, 긴장이 풀린 안도감이었을까. 실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날 이후로 나는 트럭아저씨를 다시는 만나지 못 했다. 하지만 이젠 그 길을 들어서면서 맞은 편에 차가 올 것을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그 이후로도 몇 번이나 나는 맞은 편에서 오는 트럭들을 마주쳤지만 좁은 길에서 옆으로 차를 비켜서면서도 차가 빠질 걱정은 들지 않았다. 좁은 길에서 마주친 차를 능숙하게 비켜 나가면서도 나는 단 한번도 찡그리거나 답답해하지 않았다. 해가 갈수록 운전은 능숙해졌지만 나는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내 운전 실력이 능숙해진만큼 그 아저씨의 신들린 핸들링 실력도 더 훌륭해졌을테니 제주 어딘가엔 나보다 훨씬 운전을 잘 하는 누군가가 있을 거라는 사실을 나는 운전할 때마다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역시 고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 게 맞다. 넓디 넓은 8차선 도로에서 만났던 수많은 고수들보다 좁은 감귤밭길 사이에서 만난 은둔 고수가 내게 더 큰 깨달음을 주었다. 나는 이 제주에서 배워야 할 것이 더 많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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