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지고 있는 강사로서의 커리어는 도합 11년, 그 중 아무 것도 모르는 철딱서니 초보강사로 앞만 보고 달리느라 상황 판단이 어두웠던 시간이 3년, 성인들과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프리랜서 강사가 7년, 그리고 강사로써 대가리가 큰 후 소속해서 일하게 된 정규직 강사 1년. 음, 정규직 강사라는 말도 좀 이상하긴 하다. 월급제 강사라고 해야 하나? 프리랜서 강사로 내 앞길을 내가 개척하며 거친 세상에 나가 살았던 시간이 길어서였을까 매달 같은 월급이 나오고 4대 보험을 보장하며 9 to 6는 아니지만 매일 같은 스케줄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일자리가 보장된 곳에서 일을 하다 보니 배가 불러도 한참 부른 것 같다.
입사 반년 만에 내가 깨달은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내가 이런 안정적인 직장과는 전혀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불안증 때문에 삶이 힘들어서 안정적인 직장을 찾느라 기어 들어와놓고는 이제서야 딴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프리랜서로 살면서는 내가 노력한 만큼 내가 보상을 받는 구조였다면 여기서는 나의 노력과 보상은 별개의 일이었다. 아무리 내가 있는 자리에서 발버둥을 치고 온갖 재주를 부려도 결국 내게 주어지는 건 더 많은 업무와 더 많은 책임이었다. 이런 불합리한 구조를 몰랐던 건 아니지만 자유롭게 떠돌아 다니면서 살았던 시간동안 나는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일반 회사를 그만두고 영어 강사가 되기로 결심했던 그 이유.
11년 전, 사회 초년생이었던 나는 회사라는 곳이 뭔지도 잘 몰랐고 그저 시키는 일이 있으면 급한 성격 탓에 먼저 해치우지 않으면 찝찝해서 견디질 못 하는 심성으로 회사를 다녔다. 그러다 보니 같은 일감을 나누어 받아도 팀원들 보다 속도가 가장 빨랐던 내게 팀장은 우리 팀이 다 같이 칼퇴 하자는 명목으로 일감을 더 나누어 줬다. 그리고 그런 악습은 매일같이 반복되었다. 시간 내에 업무를 다 처리 하지 못 하는 직원은 늘 같은 사람이었고 그 업무를 떠맡는 직원도 늘 같은, 나 였다. 하루는 팀장이 자리를 비웠고 그 직원과 메신저로 수다를 떨고 있을 때였는데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본인은 인터넷으로 옷을 고르고 있었고 남자친구와 어디로 놀러갈지 정보를 찾고 있으니 좀 도와달라는 이야기를 했다. 채팅창으로 넘겨져오는 링크들을 보면서 들었던 그 배신감은 11년이 지난 지금도 내게 세상에 대한 모든 애정이 식어버리는 기분을 선물하곤 한다.
그렇게 회사라는 시스템에 학을 뗀 나는 프리랜서로 살면서 내 성격대로 빠르게 일처리를 하면 더 많은 휴식을 얻게 된다는 뿌듯함에 살았다. 그러다 갑작스레 맞이하게 된 불안증에 우울증까지 겹쳐온 나는 어떻게든 벗어나보겠다는 의지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연봉까지 낮춰가며 안정적인 스케줄을 가지고 있는 직장으로 이직을 결심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사회는 달라지지 않았다. 회사라는 시스템은 더더욱 그렇다.
같은 업무를 줘도 누군가는 챗지피티로 오류검사도 하지 않고 대충 해서 제출을 하는가 하면 누군가는 하나하나 자료를 다 꼼꼼하게 읽어보고 머리를 쥐어짜서 자료를 만들어 제출 한다. 물론 누구의 자료가 더 그럴싸해보이는가를 따지자면 AI를 이길 순 없다. 하지만 몇 번 더 같은 업무를 맡겨보면 결국 들통나기 마련이다. 그렇게 내게는 조금 더 큰 책임이 따르는 일과 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 주어졌다. 같은 월급을 받으면서 업무의 불균형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봐도 교묘한 법을 들먹이며 결국 패자가 되는 건 근로자의 입장이다. 그리고 점점 더 원하는 것이 많아지고 규제가 많아진다. 처음엔 내 경력에 맞지 않는 월급에 내가 하는 방식대로 일해준다면 뭐든 좋다고 했던 회사가 이제는 그렇게 좋아하는 챗지피티로 업무규칙을 만들어서 내밀었다. 항목이 많기도 많다. 6가지 카테고리에 각각 최소 5개의 항목부터 많으면 8개까지. 매 순간이 다르고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수업이건만 지켜야 할 건 뭐가 이렇게 많은 건지. 복장규정까지 생겨난 것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1년 1개월의 계약으로 시작했는데 그 계약을 다 채우지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낮은 임금으로 좋은 퀄리티의 사람을 쓰고 싶은 것이 회사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되자 일에 대한 의욕이 줄어들었다. 프리랜서로 살면서 단 한번도 취미생활의 중요성을 생각해보지 않았던 나였는데 이제는 취미생활이 없다면, 내가 좋아하는 것이 없다면 과연 나는 살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이는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회사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한다는 퇴사. 나는 요즘 매일 출근을 하며 퇴근을 기다린다. 그리고 눈을 뜨면 퇴사하기까지 며칠이 남았는지 핸드폰 배경화면에 띄워둔 D-day를 체크한다.
Dobby is free.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직장인이란 얼마나 불행한가. 지금 당장 때려칠까 싶다가도 여태까지 일해온 9개월이 아까워서 퇴직금도 받고 실업급여도 받으려면 버티는 수 밖에. 4개월만 버티면 된다. 4개월만.
남은 4개월을 동태 눈깔 하고 영혼 없이 시간을 죽이자니 바보 같아서 생각을 조금이라도 바꿔보기로 했다. 그럼 남은 4개월 동안 다음에 무슨 일을 할지 다음엔 어떤 삶을 살지 계획하는 시간으로 쓰자. 그럼 조금은 준비된 퇴사를 맞이할 수 있을테니까.
나의 멋진 퇴사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