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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은 Feb 14. 2022

나는 어떻게 내가 되었나?

여성

나는 어떻게 내가 되었나? - 여성


초등학생 때였는데, 엄마에게 친구 집에서 하룻밤을 자겠다고 했다. 엄마는 안된다고 했다. 이유를 물어봤다. 엄마는 다른 설명 없이 그냥 안된다고 했다. 내가 말했다. 오빠는 되잖아. 엄마는 말했다. 오빠는 남자잖아. 그게 왜?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봤다. 여자는 그러면 안돼. 난 그 말이 당시에 이해되지 않았다. 


이해되지 않는 말은 내 인생에서 계속됐다. 한 번은 중학교 때였다. 물론 시대적으로 많은 개념들이 잘못 형성되어있을 때고, 한없이 어렸을 때였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아무튼, 한 여자애가 남자애들이 PC방에 가서 게임을 했던 이야기에 껴서 여자애 본인이 PC방에 가서 어떤 게임을 하고 어땠는지 이야기를 했는데, 남자애들이 약간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하루는 그 여자애가 없던 날이었던 것 같은데, 남자애들이 이렇게 말했다. “여자애가 PC방 가는 게 자랑이냐” 난 순간적으로 충격을 받았다. 여자애가 PC방에 가면 왜 안 되는 거지? 하지만 난 그러면서도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가만히 어색하게 웃으면서 그 자리에 있었다.


여자가 하면 안 되는 건 이런 것 말고도 많았다. 목소리가 크면 안 되고, 잘못된 거에 따지기 보단 얌전히 있어야 되고, 편하게 앉으면 안 되고, 밤늦게 돌아다니면 안 되고, 술을 취하도록 먹으면 안 되고, 짧은 치마나 붙는 옷을 입으면 안 된다. 반면 여자라면 당연히 해야 되는 것도 많았다. 설거지도 해야 되고, 요리도 해야 되고, 상냥해야 하고, 용서해야 하고, 잘 웃어야 한다. 특정 누군가가 여자 개개인에게 이렇게 해야만 한다고 지시를 내린 건 아니다. 하지만 분명하게 이런 사회적 분위기 안에서 우리는 길러졌다. 


나도 그런 분위기에 맞춰 살았었다. 토 달지 않고 몇 번을 참고, 용서하고, 내 의견을 내세우지 않고, 잘 웃으면서 뭘 모르는 척하면서 말이다. 왜냐면 그래야 마땅하고, 그래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던 내가 정신을 차리게 된 건 수많은 여성들의 죽음으로 페미니즘이 겨우겨우 사회적으로 대두됐을 때였다. 여자는 왜 예뻐야 하는지, 여자는 왜 애교가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사유. 그리고 여자를 지칭하는 김치녀, 된장녀 같은 용어들. 나는 왜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런 여자가 되지 않으려 왜 노력하면서 살아왔지. 이 모든 걸 그제야 깨달았다. 그리고 나에겐 세상이 전과 같이 보이지 않았다. 거슬리는 단어가 생겼고, 틀린 질문들이 눈에 보였다. 


자연스럽고 평범한 예시가 있다. 오랜만에 쉬는 날에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있었다. 아빠가 문을 슬쩍 열고 내 방을 보면서 말했다. ‘정리 좀 해라… 아가씨 방이 이러면 쓰나…’ 순간 잠이 확 깨서 ‘아가씨 아니었으면 그 말 안 할래? 여자로 만들어놓곤 이래라저래라’라고 말했다. 아빠는 고개를 절레절레 지으며 못 이기겠다는 표정을 짓곤 방을 나갔다. 도대체 아가씨 방은 어때야 되는 걸까. 예전의 나였다면 머쓱하게 웃으면서 일어나서 정리를 했을 텐데, 이제는 그 말이 틀린 말이라는 것을 안다. 안방이 깨끗한 건 아빠가 아니라 엄마가 정리했기 때문이라는 걸 안다. 난 그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지금 당신은 틀린 말을 했어’라는 식의 말을 하기까지도 너무 오래 걸렸다. 그렇지만 아마 대다수가 나정도의 속도로 눈을 떴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분위기를 나아지게 만드는 데 있어서 어떻게 일조할 수 있을지는 작가로서 다분한 사유와 실천이 필요하겠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이룰 실천은 있다. 작년에 나의 조카가 태어났는데, 조카의 성별은 여성이다. 그 작고 천사 같은 아이를 보고 있으면, 그 아이가 삶과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시점에서 ‘세상은 원래 그런 거’라는 말이나 ‘여자는 그러면 안돼’라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더군다나 설명하기 복잡하다는 쉽고 가까운 이유로 말이다. 나는 그 아이에게 네가 여자라서가 아니라 세상이 잘못되어있어서 그런 것이며, 나아지는 과정에 있으며 거기에는 많은 사람들의 사유와 실천이 필요하다고 말해주려 한다. 설령 그게 어렵고 오래 걸리는 설명이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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