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은 에세이
J는 첫 만남에서 머쓱해하며 말했다. “상은 씨 책을 읽고서 만나려고 했는데… 못 사 가지고….”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럼 읽고 오시지 그랬어요. 요즘 인터넷으로 시키면 하루도 안돼서 오는데. 저 같으면 읽고 왔겠어요” 내 대답에 J는 약간 황당하여있다 웃었고, 그 자리에서 바로 책을 주문했다. 그리곤 카페를 나서서 술을 한 잔 하러 갔다. J는 술을 잘 못 마셨고, 나는 당시 술 없이 못 살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못 마시는 술을 열심히 마셔보려 찬물을 쉴 새 없이 퍼다 나르며 취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J에게 꽤 순박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J와는 그 후로 몇 번 더 만나보다 연애를 시작했다.
J는 내가 집에서 항상 인센스를 켜는 걸 보고 나에게 “인센스 좋아하는구나. 내가 다음에 선물로 줘야겠다”라고 했다. 다음에 J는 아무것도 사 오지 않았다. 그리곤 말했다. “근데 인센스 나 올 때만 키는 거지?” “아니 항상 켜” J가 한 번 더 말했다. “그럼 진짜 사 와야겠다” 그러나 그다음에도 J는 아무것도 사 오지 않았다. 그리곤 세 번째로 말했다. “아 이거 뭐 나그참파? 맞지? 다음에 진짜 사 와야겠다” 내가 말했다. “뭘 사와? 네가 뭘 사 온다는 건지 모르겠어. 너 맨날 말만 하잖아” 내 말에 J의 표정이 ‘들켰다’는 표정이었다. J는 그다음이 되어서야 나에게 인센스를 선물했다.
J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늘 지키지도 못할 말을 했다. 그런 J를 움직이게 만들려면 J를 건드리는 말을 해야 했다. 그니까, J를 움직이게 만드는 건 ‘나를 향한 사랑’이 아니라 ‘그의 자존심’이었다.
나는 형편없는 연애를 더러 했고, 그때마다 제일 자주 찾아 들었던 노래가 ‘UMC -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였다. 내 싸이월드 BGM이었는데, 가사가 이렇다. [정성스럽게 선물을 포장하고 선물만큼의 충성스러운 사랑을 받길 바라지 / 서로의 일과를 확인하고 생활 속에 서로의 비중을 늘려놓기를 원해 / 하지만 우리가 정말 서로를 사랑했을까? (…) 우리를 움직인 건 의무감 호기심 모성본능과 성적 욕구 / 그런데 그것들이 전부 다 사랑하고 관계가 있는 걸까?] 정말이지 내 마음을 담아놓은 가사였다.
우리는 때때로 감정을 헷갈려한다. 외로워서 만나면서 좋아서 만난다고 하는 것, 헤어지지 못하는 마음이면서 사랑하기 때문에 만남을 이어간다고 하는 것. J의 행동이 나를 향한 사랑이 아니라 그의 자존심 때문이었던 것처럼. 우리는 이 모든 감정들을 아쉽게도 종종 짧은 사유를 거쳐 ‘사랑’으로 발화한다. 그러니 우리가 ‘사랑’이 뭔지 모르겠고 어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닐까.
나는 J와의 연애를 끝내고 한동안 연애를 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연애 생각 없다고, 연애만큼 사람 괴롭게 하는 게 없으니 연애하지 말라고 입이 마르고 닳도록 이야기했다. 그리고, 1월부터 연애를 하고 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도대체 어떻게 하다 입장이 바뀌게 된 건지 많이 물어본다. 이 글로 그에 대한 답변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 내 애인과는 원래 아는 사이였다. 장장 7년을 아는 사이로 지내면서 서로 좋은 사람으로 인지하고 있었으나 오히려 좋아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사귀게 되면 현실적인 친구관계마저 잃어버릴까 봐 두려웠으니까.
그러니까 나도 헷갈렸던 거다. ‘연애’가 하기 싫었던 게 아니라 ‘역할놀이’가 하기 싫었던 거고 ‘사랑’이 싫었던 게 아니라 ‘사랑인 척’하는 게 싫었던 거다. 나는 여태까지의 지난한 연애를 겪으며 방황하다가 지금 애인과의 만남을 시작하니 원점으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방랑자로 살다가 집으로 돌아와 따뜻하고 포근하고 편안한 느낌. 요즘엔 난생처음으로 죄책감이나 부채감 없이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서 지낸다. 이 글을 통해 이런 기분을 알려준 지금의 애인에게 많이 고맙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내 입장이 바뀐 것에 대해 ‘한 입 가지고 두 말하는 사람’으로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신 분들이 있다면 그에 대한 설명이 되었으면 좋겠다. 모두 짧게 방황하시고 해로운 관계를 이어가는 자해는 조금만 하시고, 부디 정확한 감정으로 정확한 사랑을 하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