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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e May 07. 2020

그를 붙잡을 수 있는 두 번째 기회

슬프지만 따뜻하고 공허하지만 가슴 뛰던 날

흐릿한 공간이었다.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장소였지만 분명히 따뜻한 장소였다.

'여긴 어디지? 정말 따뜻하다!' 하고 방 문을 나섰는데 어? 꽤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헤어지고 나서 내가 구질구질하게 매달렸던 전 남자 친구였다.


"왜 여기 있는 거야?"라고 물었는데 아무 말이 없더니 갑자기 손을 쓱 내밀고 그는 얘기했다. "우리 이 근처 좀 같이 걷자"


집 앞의 정원을 걸었다. 어? 이상하다. 난 아파트에 사는데 왜 정원을 걷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 고민도 잠시, 나는 손을 잡고 함께 걷고 있는 이 남자에게 집중했다. 그리고 그에게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어서 마음속으로 할 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너를 참 원하고 있었지만 네가 없는 허공을 향해서 나는 손을 뻗고 있었고, 어느 순간 손이 저려와서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너무 초췌해져 있었더라. 너의 시야에서 벗어난 공간은 너무도 차고 시려서 어느 하루도 마음 편하게 발 뻗고 누워 있을 수가 없더라. 나는 그 정도로 힘이 들었어. 근데 비어있던 내 공간에 갑자기 니 얼굴이 이렇게 보이니 지금 나는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잘 모르겠어. 여긴 어떻게 오게 된 거야? 그리고 너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니?


하고 싶은 말들을 마음속으로 정리만 했는데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아, 나 정말 그동안 힘들었구나. 나는 마음을 다잡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눈물이 나려는 것도 간신히 참았다. 그리고는 나란히 걷고 있는 그에게 말을 꺼내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때였다. 그는 가던 길을 멈추고 갑자기 내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하더니 먼저 말을 꺼냈다.

"그냥 인사하러 왔어. 난 이제 다시 가보려고"

응? 이게 무슨 소리지? 나와 연애하던 시절에도 너는 종종 이기적인 행동을 한 적이 있었지.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와서는 또 이기적으로 손을 잡고 걷기만 하다가 내 얘긴 듣지도 않고 가겠다고?


"오랜만에 봤잖아. 조금만 더 걷다가 가. 응?"

"아니야. 내가 여길 오는 게 아니었는데 괜히 와서 미안해. 그래도 잘 지내고 있는 얼굴을 보니 좋네"


이 무슨 드라마 대사 같은 상투적인 표현인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리고 뭐? 잘 지내고 있는 얼굴을 보니 좋다고? 화가 날 법도 했던 나는 그런 얘길 듣고도 그저 그의 손을 꼭 잡고만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뜻한 공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헤어지길 잘했다고 스스로를 위안했던 적도 있었다. 가끔 이기적이고, 정신연령은 나보다 한참 어린것 같고(난 어른스러운 사람을 좋아했으니까), 서로의 가치관도 다른 것 같다며 이별의 이유를 그럴싸하게 만들어서 주변 친구들에게 내 상황의 정당함을 설명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따뜻한 공기를 느끼는 순간, 그럴듯해 보였던 이유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와 함께 있을 때 느껴지는 포근함이 좋아서 늘 옆에 있었지. 다시 느낄 수 없었다면 그를 잊는게 더 빠를 수도 있었을텐데 왜 그는 나를 다시 찾아와서 그 때의 그 공기를 가져다준 걸까. 점점 그가 원망스럽기 시작했다.


어느새 다시 눈물이 나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내게 인사했다. 그리고는 알 수 없는 넓은 정원을 지나 크다 못해 웅장하게 펼쳐진 대문을 열고 밖으로 먼저 나가버렸다. 속으로 생각했던 그동안의 내 감정들은 하나도 전달하지 못했다. 아니 그보다도 나는 이전에 그를 붙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렸던 것이 생각났다.


그와 헤어지고, 나는 지겨우리만치 주변 사람들에게 이별의 아픔을 흐느끼며 어김없이 찌질한 저녁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보고 싶은 콘서트가 있다면서 내게 연락해왔었다. 나는 전혀 좋아하지 않는 가수였는데 그의 취향에 따라 종종 듣다 보니 오히려 나중엔 내가 더 팬이 되었던 가수의 공연이었다. 오랜만의 콘서트라는 것도 반가웠고, 헤어짐을 마주한 고통이 꽤 힘들었던 터라 그의 갑작스러운 연락이 반갑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 나는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주변 친구들의 만류 때문이었다.

"걔 정말 이상하다. 너랑 그렇게 싸울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갑자기 연락한 거야? 이것봐. 이번에도 자기 마음대로잖아" 그땐 친구들의 그 얘기들이 하나같이 그럴듯하게 들렸다. 그래 자기 마음대로 불같이 화를 내고 돌아서더니 왜 이제 와서 콘서트 타령이냐 하면서 그에게 단호하게 거절을 통보했었다.


그 이후부터 나는 친구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뒤늦게 깨달았지만 정말 내게는 단 1%도 도움이 되지 않는 충고였었고, 그걸 그대로 따라갔던 내 모습이 그렇게 한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 거절했던 콘서트 생각이 났고, 나는 대문을 나선 그를 잡을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라고 판단했다. 빠른 걸음으로 뛰쳐나가 대문을 열었다.


대문을 열자마자 나는 눈이 부신 거리를 마주했다. 미간을 찌푸렸다가 다시 크게 떠보니, 미로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이건 뭐지? 아니 그보다 그는 어디로 간 거지? 처음 보는 동네, 공포와도 같은 미로 한가운데로 들어서서 나는 그를 계속 찾기 시작했다. '나한테 다시 한번 기회를 줘'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리고 얼마 후, 정신이 들었다.

무서웠던 미로를 지나, 나는 침대 위에서 일어났고 눈물로 가득 적신 베개가 옆에 놓여있었다.

'아, 꿈이었구나.'


커튼을 제치고 밖을 바라봤다. 날이 흐리고 을씨년스러웠다. 조금 쌀쌀한가 싶어 후드 집업을 꺼내려했는데 갑자기 꿈속에서 느꼈던 따뜻한 공기가 온 몸을 감싸고 돌았다. 적막 속의 따뜻한 공기를 느끼며 나는 한참을 침대 위에서 멍하니 앉아있었다.


이별의 홍역을 앓고 있던 어느 날, 나는 슬프지만 따뜻하고 공허하지만 가슴 뛰는 꿈을 꾸고 나서야 그를 조금씩 정리할 수 있었다.


한참이 지나 하는 말이지만, 그 때 꿈에 나타나 줘서 정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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