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상에 몇 년 전부터 '똑같이 울더라도 자전거에 앉아 우는 것보단 벤츠에 앉아 우는 게 낫다'는 말이 널리 퍼져있다. 나는 저걸 보고 돈은 언제나 옳다는 취지라고 받아들였다. 배금주의는 경계해야 할 풍조지만, 돈 자체는 굉장히 인생에서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이다. 돈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돈을 목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꽤나 많은 것 같다.
언젠가 아는 형과 드라이브하러 갔던 북악산 자락 평창동 아파트 가격을 부동산앱으로 검색해봤다. 8억 5천. 그것도 지은 지 18년이나 된 낡은 아파트였다. 우리 집은 지은 지는 14년 됐고 평수도 49평이나 되지만, 가격은 그 반절도 안된다. 평생 공직에 몸담으신 부모님들이 퇴직금을 저당 잡고 받은 대출로 겨우겨우 마련한 우리집 한 채. 두분의 피와 부부싸움이 녹아들어 간 삶의 결실(우리집)은 한때 전국적인 부동산 열풍을 타고 꽤나 가격이 오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1가구 1 주택에 해당되는 사람들이라, 어차피 다른 곳도 가격이 올라서 이사를 못 갔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집값은 다시 떨어졌다) 나의 부모님은 평생 그렇게 돈을 굴릴 줄 도 모른 채 주변 친인척들에게 퍼다 주는 삶을 사신 분들이고, 아버지는 나이 60이 되어서야 첫 새차를 구입하셨다.
이 글을 왜 적었을까 나는?. 잠이 안 와서이다.
어제 오후 4시가 다돼서 일어나서 그런지 역시나 잠이 안 온다.
불면증을 검색해봤더니 유튜브에서 의사들이 나와 조언을 해주는 좋은 동영상이 있었다. 여러 조언들 가운데 하나는 침대에 누우면 바로 자는 습관을 들여야 뇌가 기억해서 잠이 잘 온다는 것이었다. 침대에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할수록 불면증 확률이 올라간다고 한다. 맞는 말 같다. 나는 주로 웹툰을 보거나 유튜브를 보거나 넷플릭스를 본다. 그런 생활을 한 게 2년 가까이 된 것 같다. 시력도 안 좋아진 게 느껴지고 눈도 뻑뻑하고 수면습관이 엉망이 되었다. 이것 때문에 엄마랑 불화도 생기고 여러모로 좋지 않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쟤 늦게 잤으니 내버려두라는 아빠 말이 더 밉다' (그냥 사람이 미운 걸지도)
아무튼 차치하고, 평창동의 분위기는 딴 세상 같았다. 한국 제일가는 부촌이라던 말 때문인지는 몰라도 같은 자연풍경이 도무지 서울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아파트나 빌라 등 건물들만 보더라도 같은 구조물인데도 뭔가 신비롭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은 지 20년이 돼가는 낡은 아파트에 8억5천만원 만큼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어느새 저 집을 내 버킷리스트, 아니 어쩌면 내 일생일대의 꿈으로 설정해볼까라는 생각까지도 가졌다. 그리고선 자려 누웠는데 그 생각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만약 자연이 뛰어난 곳에 살고 싶었던 거라면 지방 소도시에도 좋은 환경 속에 지어진, 상대적으로 저렴한 주거공간들이 많다. 국외로 스케일을 키워 캐나다나 미국, 호주 등으로 눈길을 돌리면 클-라스 자체가 달라진다.
나는 왜 [저곳]에 살고 싶었을까?
아마도 [서울] 거기에 [부촌] + 수려한 [자연]이라는 '특별함'의 냄새가 나를 취하게 만들었던 걸지도...
(만약 그 아파트가 '1억5천짜리' 소시민들의 주거공간이라면? 생각만 해도 인상이 180도 달라진다.)
단번에 느낌이 달라지더군. 나는 솔직하게 내가 속물임을 인정한다. 1억 5천짜리 우리 옆동네 아파트 단지에 관한 안 좋은 기억이 있다. 마트에서 알바를 했는데 자꾸 카트가 없어진다. 옆 아파트 단지 주민들이 카트를 사적으로 유용하려고 자꾸 집에 가져가는 것이었다. 언덕길도 많고 낡은 집이나 사람이 살지 않는 집도 많아서 그런지 바로 옆동네지만 우리 아파트 단지랑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덕분에 나는 점장의 지시로 온아파트 단지를 돌며 현관 앞에 놓여 있는 카트들을 수거해와야 했다. 때로는 카트 수거하는 데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퇴근시간을 넘겨서까지 아파트를 씩씩 거리며 돌아다녀야 했다. 시간을 줄이려 최고층에서부터 일일이 버튼을 눌러 멈추고 카트를 회수하는 작업을 하다 결국 아파트 주민에게 한소리 들은 적도 있다. 보통의 나라면 예의 바르게 사과를 했겠지만, 대가 없는 초과근무가 하루하루 쌓여가는 통에 뿔이 났던지라 듣는 둥 마는 둥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 아파트에 그 주민'이라며 어느새 나는
주거공간의 가치와 거주민의 인격수준을 동일시 해버린 것이다.
8억5천짜리 집에 이사 가게 되면, 화장실에서 흡연하는 놈도, 단지 내에서 걸어가면서 흡연하는 새끼도, 밤늦게 소음을 내는 놈도, 엘리베이터에 침을 뱉는 놈들도 없을 것 같았다. 소득 수준과 학력 수준, 가정교육 수준, 거기에 집값까지... 비슷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혀 연관성 없는 개념들을 어떻게든 얼기설기 짜 맞춰서, 그런 상식 없는 놈들을 저주 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안다. 나라는 사람에게 있어 소유는 경험을 이기지 못함을. 예전부터 벼르고 벼르던 화장품이나 책 등을 사면 기분이 참 좋다. 그런데 그 좋은 기분이 별로 오래가지 않았다. 집에 와서 구매한 물품들을 놓아두면, 카드를 긁을 때의 설렘은 사라지고 그때부턴 내방의 공간을 차지하는 여타 물건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책임져야 할 소유물의 하나가 된다.
반대로 정말 귀찮고 하기 싫고 심적으로 부담이 되더라도 해야 할 일을 끝마쳤을 때 느끼는 해방감, 성취 감등은 상대적으로 정말 오래 지속되었다. 여행을 가서 맛있는 것을 먹고 새로운 세계를 보고 느끼고 하는 체험은 정말 강력하다. 심지어 당시엔 힘들고 지친 기억이더라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오래도록 진하게 여운이 남는 추억이 된다. 그래서 소유는 경험(기억,추억)을 이길 수가 없다고들 하는 가 보다.
외할머니는 객관적으로 참 가난한 분이었다.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되어 시부모를 모시고 농사를 지으며 세남매를 기르셨다. 원래는 5남매였으나 둘은 열악한 영양과 보건수준 때문에 일찌감치 어린 아기때 세상을 떠났다.
농사로 지친 고단한 몸을 이끌고 이불에 몸을 누이려 하면, 시어머니가 남편과 자기 싫다며 같은 방으로 찾아와 잠을 청했다.(그 시어머니는 아들과 달리 굉장히 장수하셨다) 남편의 동생은 얹혀살면서 형수에게 돈을 타고 음식을 축내며 일은 하지 않았다. 시부모에 아이들, 남편의 형제까지 부양한 것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호박고구마 한상자가 기도까지 차오르는 듯한 속이 답답해지는 이야기들을 너무나도 많이 전해 들었다. 그런 속 터지는 순간들을 외할머니는 고고히 수십년 동안 버텨내셨다.
폐암성 뇌졸증으로 쓰러지시기 직전까지도 외할머니는 자식들의 집안일을 말없이 묵묵히 해내고 손주들을 돌보셨다. 쓰러지신 후에는 병원의 중환자실에서 의식없이 오래토록 앓으시다 의사의 '가망이 없다'는 말에 시골고향집으로 옮겨지셨다. 임종 전날밤, 어른들이 내게 인사를 시켰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아랫목에 누워계신 외할머니를 바라보며 '외할머니 저에요 ... 얼른 나으세요'라고 말했던 것 같다. 내가 외할머니의 뺨을 한번 쓰다듬었던가? 분명 의식이 없으실 텐데 내 목소리를 듣는 외할머니 눈에서 눈물 한방울이 거칠고 야윈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혹시 나를 알아보시는건가 싶어 어린 마음에 외할머니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람이 죽기전에 경험한다는 회광반조의 순간이었을 지도 모른다. 내가 자던 손님방으로 새벽에 엄마가 창호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와 흐느끼며 말했다. '계인아 외할머니 돌아가셨어...' 그게 나와 외할머니의 마지막 순간 이었다.
생전에 아끼던 자손을 망자가 해한다는 민간의 믿음 때문에, 나는 두 번 다시 외할머니를 보지 못하고 입관도 못본 채, 친척 손에 맡겨져 서울로 올라왔다. 한 사람의 길고도 힘든 삶은 그렇게 끝나버렸다. 그럼에도 오늘날 까지 나를 비롯해 엄마, 이모 등 외할머니를 기리고 추억하는 이들이 참 많다.(이모는 주로 외할머니한테 못되게 굴어서 후회되는 이야기를 자꾸 꺼내지만) 외할머니는 비록 가난했지만, 양반가의 후손으로 명예와 인덕을 늘 강조하시며 살았다고 한다. 당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주변인들에게 늘 후하게 대했다는 외할머니의 미담은 듣는 내게 알 수 없는 자부심과 연민, 애정을 느끼게 만들었다. 군대 훈련소에서 정말 지치고 힘들 때, 종교행사 중 불교행사에 참석했다. 여러 제례중 생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원하는 순간이 왔다. 나는 부모님도 친할머니도 아닌 외할머니를 가장 먼저 떠올렸다. 부디 부잣집 자식으로 태어나 고생을 모르고 밝고 건강하게 행복한 삶을 누리며 사시길 빌었던 것 같다.
김미경 강사는 강의에서 그렇게 회자되는 사람은 영생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맞는 말인 것 같다. [코코]에도 그런 비슷한 개념이 등장한다. 기억하는 사람이 살아있는 한 사후세계에서 영체는 영생한다. 자신을 기억해주는 마지막 이가 죽게되면, 그 영혼은 소멸한다. 나의 외할머니는 앞으로도 꽤나 오래도록 기억속에 살아계실 것이다.
나의 외할머니, 어릴 때는 잘 몰랐지만 커가면서 점점 그리워지는, 나의 사랑.
나와 엄마의 행복하고 따스했던 유년기.
엄마도 이렇게 외할머니가 보고픈 날이 많겠지?
나에게는 엄마가 계시지만, 엄마는 엄마의 엄마가 보고 싶은 날엔 어떻게 하나?
내가 대학에 다닐 무렵부터 엄마는 말씀하셨다. 이미 남은 감정과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더이상 슬픈 영화나 드라마에 눈물을 쏟지 않는다고. 맞는 말인 것 같다. 그 어떤 드라마나 영화도 두 모녀의 삶에 비하면 초라한 가짜에 불과하다. 침대에 조그마한 성경책을 올려두고 매일밤 울면서 신께 외할머니의 쾌차를 간청하던 엄마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평생 쏟아 내야할 눈물을 나의 엄마는 그때 이미 다 흘려내버렸나 보다.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몰랐고 어떻게 엄마의 슬픔을 덜어 줄 수 있는지 알지 못했던 어린 나는, 그저 엄마가 빨리 눈물을 그치기를 바라면서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아픈 기억으로, 미안함으로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그래서 알게 모르게 엄마의 감정과 상황에 과몰입 하게 될 때가 있다. (요즘은 덜하다.) 나와 엄마는 별개의 개체라는 것을 배우고서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내 마음이 편해야 엄마한테 더 잘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것 같다.